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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이야기가 있는 길] ⑭ 마애불 쪼기, 그만 하자

<평창동 길> 군량미 보관하던 촌이 지금은 부자동네 대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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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06호 편집팀⁄ 2011.03.03 09:26:39

이한성 동국대 교수 북한산 자락인 종로구 평창동, 조선 시대에 이 지역에는 두 개의 곡창이 있었다. ‘이야기가 있는 길 12’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숙종은 북한산성(1711년) 축성 후에 탕춘대성을 쌓아(1715년) 유사시에 서울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지금의 평창동, 구기동 지역을 도성 백성들이 옮겨와 방어할 수 있는 지역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식량이 확보돼야 하므로 이 지역에 군량미 창고를 세웠다. 이에 따라 선혜청(宣惠廳)과 총융청(摠戎廳)이 창고를 세웠으므로 이 지역이 평창동(平倉洞: 군용 식량창고가 있는 동네)이 되었다. 지금은 이곳이 서울에서도 유명한 부촌이 되었으나 조선 시대에는 척박한 골짜기 골짜기마다 자연부락이 자리 잡았던 마을이었다. 평창동 경로당 앞에 ‘별기군 훈련소 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자리하고 있다. 별기군(別技軍)은 기울어져 가는 조선 말기에 신식 군대를 길러 새롭게 무력(武力)을 강화하려고 했던 명성황후 민비의 입김이 작용한 서양식 군대였다. 1881년(고종 18년) 외척인 민영익을 교련소 당상으로 하고, 호리모토(堀本) 일본군 중위를 교관으로 해서 서양 무기, 서양식 군복으로 꾸민, 당시로서는 엘리트 군인 80명으로 출발했다. 대우도 파격적이었다. 군복도 초록색 서양식 군복이었는데 ‘초록군대’라는 별명을 들으며 꽤 멋쟁이 느낌을 주었던 것 같다. 문제는 수백 년간 조선의 군대 조직을 이뤄 온 구식 군대에 대한 차별이었다. 급여도 수개월 밀리기가 일쑤였는 데다가 급여로 나온 곡식에 모래까지 섞여 있으니 불만이 터져 임오군란(1882년)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교만한 호리모토는 살해되고, 일본 공사관까지 불타는 일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 일로 조선은 뒷감당하기 어려운 여러 사태에 직면했다. 각론하고, 별기군은 초기에는 지금의 독립문 근처 모화관, 그리고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자리에 있던 하도감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1886년 이후에는 평창동 이곳에서 훈련했다. 보현산신각 안내판이 있는 국민은행 길로 들어선다. 잠시 후 럭키평창빌라가 좌측으로 나타나고 그 입구 화단에 총융청 평창(平倉, 군량미 창고)이 있던 자리였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길은 두 대의 차가 지나칠 정도의 약간 굽은 포장길로 이어지는데, ‘쉐누(cheznous)’라는 이름의 상점을 만나면 우측 길로 올라가야 한다. 잠시 후 오른쪽으로 가정집 같은 분위기의 ‘작은 형제회 수도원’을 만나고 이어서 우측으로 이 곳 분위기와는 다소 다른 한옥을 만난다. 이곳은 월탄 박종화(月灘 朴鍾和) 선생이 1975년부터 돌아가신 1981년까지 살던 집이다. 본래 이 집은 충신동(忠信洞)에 있었는데 집이 헐리자 그대로 이곳으로 옮겨 왔다. 보존 가치가 있는 옛집들을 문화재로 등록할라 치면 재산권을 방해받는다며 허물어버리거나 팔아치우니 도대체… 선생의 귀중한 작품, ‘여인천하’ ‘세종대왕’ ‘양녕대군’ ‘임진왜란’ 등 무수히 많은 작품이 이 집에서 쓰였으니 귀중한 유적이 아닐 수 없다. 다행히도 근대 문화유산으로 지정돼 문화재등록 제 89호임을 알리는 표지가 붙어 있다. 필자는 이 앞을 여러 번 지나갔어도 문밖에서만 서성였는데 이번에는 함께 동행한 여성 학인들이 계서, 월탄 선생 손녀 분의 배려로 집안 속속들이를 둘러볼 수 있었다. 선생의 유품들, 휘호(揮毫), 집안의 편액(扁額) 모두 다 문화유산이 되기에 손색이 없었다. 특히 편액 중 눈길을 끈 것은 ‘조수옹(釣水翁: 물을 낚는 늙은이)’ ‘일년무일불간화(一年無日不看花: 한 해 하루도 꽃 안 본 날 없네)’다. 선계(仙界)에 머물렀을 선생의 마음이 곁에 계신 듯 전해져 온다.

3000년 전 이름 모를 옛사람의 글에서, 또는 오늘처럼 30년 전 우리 곁을 떠난 한 작가의 한 마디에서 마치 곁에 있는 사람의 입김 같은 것을 느낄 때 우리는 인간의 진정성이 시간 너머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잠시 우리 시대에 돌이켜볼 만한 족적을 남긴 분들이 사시던 집들을 생각해 본다. 애석하게도 부암동 무계정사 터를 찾아 갔다가 얼마 전까지도 건재하던 빙허 현진건 선생의 옛집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을 보고 허탈했던 기억이 새롭다. 문제는 이런 것이다. 이 집은 개인 소유였는데 기념물이나 문화재로 지정되면 그 날부터 개인의 재산권 행사에 제약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니 어떤 유적을 문화재로 지정하려 들면 그 집의 주인은 재산권을 포기하든 아니면 빨리 철거하든지 기로에 선다는 것이다. 박목월 선생 댁도 유족에 의해 철거됐다 하고, 이상의 옛집은 애초에 흔적도 없게 되었다. 그나마 미당, 춘원, 난파 선생 등의 옛집은 지켜진 경우이니 천만다행이다. 앞으로는 지켜야 할 대상이라면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제 값을 주고 구입해 지켰으면 좋겠다. 다른 나라에 가 보면 기념할 만한 사람이 낙서한 종이 한 장까지도 지키는 것을 볼 때, 우리는 너무 많이 잃은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월탄 선생 댁 건너편에는 요즘 지은 집들이 있는데(평창동길 83) 그 집 담장 아래 한 쪽에 큰 바위가 자리 잡고 있다. 다가가 보면 그 바위 밑이 굴처럼 깊이 들어가 있고 아래에 맑은 샘이 있다. “이곳에 집들이 들어서기 전 숲 속에 자리했던 바위 밑 옹달샘이 그 모습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 곳 숲도, 개울도, 그 때 불던 바람도, 그리고 너를 찾아 와 목축이던 산토끼도 산새도 모두 없건만 너는 그 모습 그대로 기이하게 세상 속에서 외롭게 그 자리에 남아 있구나….”

오르는 길이 가파르다. 저 앞쪽에 3거리가 나타나고 그 앞으로는 자그마한 절 해원사가 보인다. 이곳에서 좌로 길을 잡는다. 50m 남짓 가면 이 곳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붉게 칠한 이층 시멘트 건물을 만난다. ‘보현산 굿당’이다. 이 굿당 직전에서 산 쪽을 바라보면 보현봉 방향으로 산 아래에 맞배지붕의 작은 기와 건물이 보인다. 돌층계를 따라 올라간다. 소나무가 우거진 사이에 돌담을 친 이 건물이 보현산신각(普賢山神閣)이다. 이제는 전국에 몇 남지 않은 귀중한 민속자료(서울시 민속자료 3호)다. 안내판이 서 있는데 일반 무속 굿 하는 곳이 아니고 보현봉 산신(山神)께 유교 식으로 일 년에 두 차례 3월1일, 9월 13일 제(祭)를 올린다고 한다. 이때는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올린다고 한다. 과거 각 마을에는 그 곳에 사는 분들이 모시는 신성한 대상이 있었다. 산 아래 마을은 산신께, 바다나 강 마을은 용왕께, 평야 마을은 안녕을 의탁할 만한 나무나 바위 등에게 복과 안녕을 의탁했다. 이곳 평창동 마을도 예외는 아니어서 눈 뜨면 바라다 보이는 보현봉 산신께 그들의 안녕을 의탁했던 것이다. 그래서 산 아래 큰 굴(큰 골짜기)에는 남신을, 소단 굴(작은 골짜기)에는 여신을 모시고 같은 날 같은 제물과 정성으로 제를 올렸다고 한다. 만일 남신께 조금이라도 잘 하면 여신이 질투해 음기가 발하니 그 해에는 큰물이 나고, 남신이 화가 나면 양기가 발해 산불이 잦았다고 한다. 여신의 산신각은 이곳에서 서쪽으로 500여m 떨어진 곳에 있는데 화재로 불타 40여 년 전 마을 사람들이 붉은 벽돌로 재현하였다. 또 하나 제를 지낸 흔적은 평창 터가 있던 빌라 뒤 산 언덕에 부군당(府君堂)이 있었다 하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신목(神木)만이 우뚝하여 서울시 보호수 65호로 보호받고 있다. 산신의 천도복숭아를 2개 먹으면 안 죽는다는데… 늙고 병들었는데도 안 죽는다면? 그게 좋을까? 이 곳 산신당을 여러 번 가 보았으나 언제나 닫혀 있어 그 곳에 걸려 있다는 산신도를 보지 못하여 아쉬워했는데 우연히 어느 자료에서 그 그림을 보게 되었다. 여느 산신도와 다름없이 범과 동자를 거느린 산신의 모습이었다. 분명히 눈에 띄는 것은 동자가 들고 있는 복숭아 세 개였는데 이는 불사(不死)를 상징하는 천도(天桃)일 것이다. 곤륜산(崑崙山)에는 서왕모(西王母)라는 여신이 계신다. 이 분께 복숭아 하나를 얻어먹으면 영원히 늙지 않고, 두 개를 얻어먹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 당신은 몇 개를 얻고 싶으신가? 두 개? 두 개를 얻어 영원히 죽지 않으시려거든 꼭 하나 잊지 마셔야 할 것이 있다. 그리스에 새벽의 여신 오로라가 있었다. 그녀는 남편 디토너스가 너무 사랑스러워 제우스에게 디토너스가 영원히 죽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 기도가 너무 간절했던지 제우스가 그 청을 들어 주었다. 디토너스는 행복했을까? 그는 늙고 병들어 가는데도 영원히 죽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영생(永生)을 얻으시려거든 건강과 행복도 함께 챙기시기를. 보현산신각 뒤 쪽에는 법정사라는 절이 있다. 불사를 잘한 절인데 요즈막에 가면 을씨년스럽다. 이 절 동쪽 등성이 쪽, 철로 만든 울타리 안쪽에 돌로 만든 제단 터가 있다. 조선시대에 사용되던 천제단(天祭壇)이라는데 정확한 기록은 확인할 수 없다. 이제 다시 길을 내려와 해원사 앞으로 돌아온다. 이 길이 ‘북한산 둘레길’인데 평창동 구간 둘레길은 높은 담이 있는 집들을 끼고 걷는 길이라서 걷는 즐거움이 없다. 06번 마을순환버스로 일선사 입구 등산로로 이동한다. 전부터 이 길은 평창동에서 출발하여 북한산을 가장 편하게 오를 수 있는 길로 각광받던 오랜 등산로다.

동령폭포 지나고, 머루교 지나 오른 지 1시간여 만에 청담샘 갈림길로 들어선다. 붐비는 일선사 길에 비해 한적하다. 10분여 오르니 고즈넉한 절터에 닿는다. 샘물도 시원하다. 안내판에 청담샘이라고 적혀 있다. 이곳은 돌축대도 실하고 부지도 넓어 규모 있던 절터였음을 알 수가 있다. 사람들 말로는 청담사(靑潭寺) 터라 하는데 기록은 확인할 수가 없다. 신라 때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선생의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해동화엄대학에 10산이 있는 바, 한주 부아악(북한산) 청담사라(海東華嚴大學之所有十山… 漢州負兒岳靑潭寺也)’라 했다 한다. 신라 화엄 10산문 중 하나가 한산주 북한산 청담사라 했기에 혹시나 이곳과 관련 있는 것은 아닌가 했었는데 2008년 은평뉴타운 공사 중 청담사라는 명문이 있는 기와가 발견되었다 하니 이곳은 신라 때 청담사와는 관련이 없는 것 같다. 이 절터 오른쪽으로 흐릿하게 오르는 돌층계 길이 있다. 보현굴과 보현봉 오르던 오래 된 길이다. 등산을 위해서는 가지 말아야 할 길이다. 보현굴에 새겨져 있는 마애칠성과 마애산신을 만나러 올라간다. 옆으로는 일선사가 보이고 보현굴 우측 바위에 칠성(七星)님이 새겨져 있다. 칠성은 본래 하늘의 북두칠성을 신앙의 대상으로 한 도교 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불교와 민간신앙에 녹아들었다. 회심곡이나 칠성풀이에서 보듯 “칠성님 전 명을 빌고 제석님 전 복을 빌고, 아버님 전 뼈를 타고 어머님 전 살을 빌어…” 이렇듯 목숨과 영혼을 칠성님으로부터 받는 것으로 믿어 왔다. 그래서 일곱 별에 이름을 붙이고 신격화하였으니, 첫 별은 천추성(탐랑성)으로 자손만복을 이루어 주고, 둘째 별은 천선성(거문성)으로 장애재난을 소멸해 주고, 셋째 별은 천기성(녹존성)으로 업장을 소멸해 주고, 넷째 별은 천권성(문곡성)으로 상서로운 일을 맡고 있으며, 다섯째 별은 옥위성(염정성)으로 중생의 백 가지 장애를 소멸하고, 여섯째 별은 개양성(무곡성)으로 복덕을 주관하며, 일곱째 별은 요광성(파군성)으로 건강장수를 책임진다.

이런 소원을 빌고자 바위에 칠성을 새겼는데 믿음을 달리 하는 사람들이 쪼아내고 페인트를 쏟아 부어 귀중한 민간신앙 자료가 파괴되었다. 보현굴 산신도 범과 동자를 거느린 보현봉 산신인데 호분(胡粉)을 희게 칠하여 신성함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 산신도 훼손을 면치 못하였다. 산신의 영험함이 다한 것인가. 자신을 훼손하는 손길을 막지 못하였으니 안타까움을 떨치지 못하고 오른 길을 다시 내려간다. 청담샘에서 다시 본래 등산로로 내려가 우측 숲으로 들어가면 흔히 평창동 (청담샘)마애불이라 부르는 마애미륵상이 있다. 자연 암반에 3~4m 높이로 북악의 능선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이 마애불도 심히 훼손되었다. 얼굴도 상처 입고 두 손은 무엇으로 내려쳤는지 떨어져 나갔다. 이제는 이런 일이 그만 일어났으면 좋겠다. 죄없는 마애불을 훼손함으로써 자신의 종교를 높이고 자랑하는 사람들. 꼭 그렇게 해야 신앙심이 증명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눈을 들어 저 넘어 형제봉을 바라본다. 호환(虎患: 범의 피해)과 관련된 형제의 전설이 있다. 고려조에 반역으로 몰려 숨어 살던 형제가 태조 이성계가 한양천도 하자 한양으로 떠났다 한다. 이 능선에서 범을 만났는데 범을 죽이고 아우도 죽었다 한다. 그러나 호환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남편을 잃은 암범이 형을 해쳐 형제는 죽어 이곳에 두 봉우리가 되었다 한다. 남쪽 높은 봉이 형이고 뒤쪽 낮은 것이 동생인데 동생이 형을 향해 손을 내젓고 있다. 그러나 형제봉은 이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한북정맥을 타고 온 백두산의 정기는 이 형제봉 능선을 타고 넘어 와 보토현(補土峴: 북악터널 위 옛고개)을 지난 뒤 구준봉을 거쳐 북악에서 다시 솟구쳐 서울의 주산(主山)이 되는 것이다. 세종실록 15년(1433년) 7월 9일 기록을 보면, ‘백악(북악)은, 삼각산 봉우리에서 내려 와 보현봉이 되고 보현봉에서 뻗어 평평한 언덕 몇 리가 되었다가 우뚝 솟은 봉우리가 백악이다. 그 아래는 명당이 되어…(白岳自三角峰而下 作普賢峰 自普賢峰來作平岡數里而聳起尖峰 是白岳也 其下作明堂…)’라 하였다. 서울의 산세(山勢)는 보현봉, 형제봉, 구준봉으로 이어지는 평평한 언덕들, 북악, 그 아래 명당들이 요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곳을 가로지르는 고개가 있었는데 평창동과 정릉을 넘나드는 고개 보토현(補土峴)이다. 지금은 북악터널이 있어 고개는 없어졌다. 조선시대 한 때는 이 고개로 사람들이 많이 다녀 고개가 깎이니 서울로 넘어 오는 지력(地力)이 쇠할 것을 걱정하여 흙을 돋우기도 하고 통행을 금지하기도 하였다. 이번 걷기는 평창동으로 회귀하는 것으로 마무리 한다. 더 걷고자 하는 이들은 일선사 지나 대성문으로 오르면 북한산성 주능선길이다. 가고자 하는 길이 있으면 동, 서, 북 어느 곳으로든 방향을 잡아 볼 일이다.

교통편 3호선 경복궁역에서 버스 1711, 1020번 환승 뒤 평창주민센터 하차. 3호선 불광역에서 연신내행 버스 7211번 환승 뒤 평창주민센터 하차. 버스편은 정릉, 홍제동 방면에서 110번 탑승 뒤 평창주민센터 하차. 또는 우이동, 홍제동 방면에서 153번 탑승 뒤 평창주민센터 하차. 걷기 코스 평창주민센터 ~ 평창터 표지석 ~ 박종화선생 가옥 ~ 보현산신각 ~ 천제단 ~ 일선사 산행 입구 ~ 청담샘 ~ 보현굴 ~ 마애불 ~ 평창동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마애불과 문화유적지 탐방을 합니다. 3~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갑니다. 1월 답사는 29일(토) 오전 9시 30분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모여 창의문~백사실~북악스카이웨이~ 김신조루트~숙정문~북촌 길을 답사할 예정입니다.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본지 Art In 편집주간)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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