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보다 교도소에서 보낸 세월이 더 긴 두 늙은 도둑이 고위층의 미술관 금고를 털려다 경비견에게 잡힌 뒤 수사관에게 조사를 받는다. 있지도 않은 범행 배후와 있을 수도 없는 사상적 배경을 밝혀내려는 사명감이 투철한 수사관, 그리고 세상 물정 모르는 두 노인의 대화는 관객에게 포복절도 웃음과 함께 깊은 동정심을 일으킨다. 연극 ‘늘근도둑 이야기’가 지난 2008년 1월부터 2010년 2월까지 ‘연극열전2’의 두 번째 작품으로 선정돼 2년 2개월 동안 장기 공연을 마치고 1년여 만에 공연을 재개한다. 2월 11일 서울 대학로아트원씨어터 3관 차이무극장에서, 2월 18일 경기도 고양아람누리 새라새극장에서 연이어 개막된다. ‘비언소’ ‘칠수와 만수’의 이상우(극단 차이무 예술감독)가 쓴 이 연극은 1989년 4월 동숭아트센터 개관 기념 ‘제1회 동숭연극제’ 초청작으로 동숭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초연됐다. 당시 강신일, 김기호, 문성근 등 굵직한 배우들을 캐스팅했으며 이후 명계남, 박광정, 유오성, 정은표, 박진영, 이대연, 박철민, 최덕문 등 개성과 연기력을 겸비한 다양한 배우가 거쳐 갔다. 올해로 22번째 생일을 맞은 ‘늘근도둑 이야기’는 김승욱, 이대연, 김뢰하, 이성민, 박원상, 최덕문, 김학선, 오용, 서동갑, 송재룡, 박상우, 이희준, 이중옥, 민성욱 등 극단 차이무의 간판 배우가 네 팀으로 나뉘어 꾸민다. 다양한 연출의 손을 거쳐 온 이 연극의 이번 연출은 ‘섬세한 연출로 연극의 잔잔한 맛 하나까지 촘촘히 살려낸다’고 평가받는 극단 차이무의 민복기 대표가 맡았다. 그는 “이번 작품에서 극의 밀도를 높이기 위해 어감과 상황을 소폭 수정하는 한편, 관객의 가려움을 박박 긁어 주는 시원한 시사 풍자 외에 두 늙은 도둑의 인간적인 모습에 더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연출가, 극작가, 연기자 수식어만 여러 개 공연을 약 2주 앞두고 찾은 ‘늘근도둑 이야기’ 대학로의 지하 연습실. 투명한 문밖으로 배우들의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15평 남짓의 좁은 연습실에서 20명이 넘는 배우와 스태프가 격렬하게 엉겨 붙었다 떨어진다. 옷과 머리에 밴 땀 냄새가 코끝을 시큼하게 했다. 그 가운데 민복기 연출(43)도 있었다. 배우들의 연기와 동선을 지시하는 모습이 카리스마 있게 다가왔다. “오늘 겨우 배역을 정했어요. 이번 공연은 네 팀이나 되기 때문에 어떤 배우가 어떤 배역에 적역이고, 어떤 조합이 최선인지를 파악하는 데 오래 걸렸습니다.” 배우들이 자리를 비운 뒤 연습실에서 마주한 민복기 연출은 공연의 진행 과정을 설명했다. ‘늘근도둑 이야기’의 출연 배우가 아니라 자신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는 말에 적잖이 당황했다는 그는 “저보다 우리 배우들이 더 유명한데…”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그의 표정에서 날카로운 연출가보다 대중의 관심을 바라는 무명 연기자의 순수한 마음이 느껴졌다. 대학교(건국대)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한 민복기 연출이 연극을 처음 접한 건 대학교 연극 동아리에서였다. 이후 대학연극제에서 심사위원과 참가자 자격으로 만난 이상우 작가와의 인연이 있었고 졸업 후 진로를 고민하던 그는 운명처럼 이 작가를 다시 찾았다. 그리고 연출부, 조연출을 거쳐 브레히트의 ‘사천의 선인’ 연출로 프로로서 첫 단추를 멋지게 끼웠다. ‘강거루 群’ ‘행복한 가족’ ‘양덕원 이야기’ ‘슬픈 연극’ ‘썽난 마고자’ 등은 민복기 연출이 차이무에 몸을 담으면서 쓰고 연출하고 올린 연극이다. 그런데 민 연출이 이처럼 연극계에서 잔뼈가 굵은 연극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대중은 그리 많지 않다. 기자가 그를 본 첫 느낌도 그랬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연기자 같은데, 누구더라?’ 그는 연극은 물론 ‘유령’ ‘질투는 나의 힘’ ‘황진이’ ‘시’ ‘로드넘버원’ ‘오필승 봉순영’ ‘눈의 여왕’ ‘달콤한 나의 도시’ 등 다수의 영화와 드라마에서 활약한 연기자다. 깜짝 놀랐다. 대학로의 유명 극단 대표가 영화와 드라마에서 작은 역으로 출연하는 모습은 왠지 낯설다. “TV나 영화 출연은 제가 한 연극을 보러 온 관계자가 제안해서 하게 됐어요. 제가 영화나 드라마를 쫓아다녀서 얻은 배역은 아닙니다. 자주 활동하지 않고 들어오는 작은 역할만 띄엄띄엄 하다 보니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진 않더군요. 하지만 몰라주시는 편이 저는 편해요. 유명해지면 불편하니까요.”
다양한 활동은 새로운 경험에 대한 즐거움을 주는 한편, 한 가지에 주력하는 데는 방해가 되기도 한다. 여러 작품을 동시에 하는 연기자는 대사를 헷갈릴 때도 있다. 하물며 연출가, 극작가, 연기자 등 활동 분야까지 여럿인 민 연출은 오죽하랴. 이에 대해 그는 “헬스를 할 때 쓰는 근육이 있으면, 탁구를 할 때 쓰는 근육은 또 다르다”면서 “나는 연출할 때, 희곡을 쓸 때, 연기할 때 쓰는 근육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헷갈리지 않는다”며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2011년 ‘늘근도둑 이야기’ ‘늘근도둑 이야기’는 극단 차이무의 가장 잘 알려진 레퍼토리로, 2011년 공연에서는 민복기 연출을 비롯해 차이무의 모든 인력이 투입돼 눈길을 끈다. “공연을 쉬는 1년 동안 올해 올릴 공연을 위해 준비했어요. 이번 공연은 차이무의 선후배가 다 함께 참여해서 뜻깊고, 게다가 오래 작업해온 [이다.]엔터테인먼트와 공동 제작을 하게 돼 무엇보다 좋습니다. 차이무라는 이름을 단 극장에서 공연하는 점도 남다르고요.” 공연은 네 팀을 각각 두 팀으로 나눠 서울과 고양에서 올린다. 서울 공연 팀은 고양 무대에도 한 번씩 오를 계획이다. 하지만 출연 배우가 너무 많다 보니 연출가로서 느끼는 고충은 분명히 있다. “배우들이 바쁘다 보니 스케줄과 연습 시간을 조율하는 게 가장 힘들어요. 하지만 팀마다 독특한 색깔이 있어서 보는 재미가 쏠쏠해요. 천재지변이 없는 한 팀별로 공연할 테니 여러 조합을 봐도 볼만할 겁니다.” ‘늘근도둑 이야기’는 20년이 넘게 꾸준히 사랑을 받아온 작품이다. 그 인기 비결을 묻자 민 연출은 오히려 “엄청 재미있잖아요?”라고 반문한다. 공연을 봤으면 당연히 그 이유를 알 거란 의미였다. 대단한 자신감이다. 그는 “우리보다 루저(looser, 패배자)인 늙은 도둑들이 우리도 차마 긁지 못하는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통쾌함이 있다”며 자신이 느낀 바를 풀어놨다. ‘늘근도둑 이야기’는 시사 현안을 풍자해 웃음과 공감을 주기는 것으로 유명한 시사풍자 코미디다. 사전심의를 받는 드라마와 영화와 달리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는 연극에서는 좀 더 강하게 풍자를 할 수 있어 그 맛이 다르다. 이번에는 대통령 열 명 가운데 전과자가 있고, 대통령 열 명 중 둘은 사면복권을 받았고, 국내 일류 기업의 총수들 대부분이 전과자고, 유명한 연예인은 전과자가 돼 가고 있다고 풍자하면서 ‘이 사회는 전과자 아니면 정치를 못하고, 전과자 아니면 경제를 못하고, 전과자 아니면 예술가도 안 된다’는 기막힌 현실을 꼬집는다. 하지만 민 연출은 ‘늘근도둑 이야기’가 사회 풍자만 늘어놓는 연극은 아니라며 이번엔 풍자보다 두 노인의 인간적인 면을 부각할 생각임을 밝혔다. “풍자를 작품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말이 되는 풍자라고 해도 밑도 끝도 없이 찌르기만 하면 오히려 연극 내용과 안 맞을 수 있어요. 그보다 저는 늙고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덩그러니 세상에 던져지면 어떻게 살아갈까, 그리고 기구한 상황에 부닥친 늙은 사람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요.” ‘늘근도둑 이야기’를 예전에 보고 이번에 또 보는 관객은 어떤 차이를 느낄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민 연출은 “이 연극을 예전에 본 관객들은 세상의 풍자를 보고 욕을 들으며, 즐겁게 보면서도 세상이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라며 “2011년판을 다시 보는 사람에게 이번 연극은 재미있게 보면서 인생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늘어나는 노령 인구를 젊은 세대가 부양해야 하는 요즘, 인생의 막바지에 놓인 노인들이 도둑질 하는 모습을 보면서 인생을 생각하면 어떨까 싶다”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그는 ‘늘근도둑 이야기’를 보러올 예비 관객들에게 “연극을 통해 뭔가를 얻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오면 잃을 게 더 많다”며 “편하게 공연장에 와서 얻을 게 있으면 얻고 없으면 없는 대로 즐겁게 보고 갔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이어 “이 작품이 어느 날 아무 생각 없이 문득 떠오르는 연극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