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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이야기가 있는 길]⑮ 선조들은 이런 데까지 신경썼구나…

호암산의 호랑이 기운 누르는 호압사를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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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07-208호 편집팀⁄ 2011.01.31 14:45:00

이한성 동국대 교수 삼성산(三聖山)은 서울과 안양을 경계로 하는 가까운 곳에 있지만 관악산에 가려 그 빛을 잃은 것 같다. 게다가 사람들은 삼성산을 별도의 산으로 보지 않고 관악산의 한 봉우리 정도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삼성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언급한 것처럼 금천현(衿川縣)의 진산(鎭山)이다(三聖山在縣東十里 鎭山). 관악산이 과천현의 진산이듯이 삼성산은 엄연히 금천현의 진산으로서 그 자리를 인정해야 한다. 서울대입구역에서 환승한 버스가 20여 분 달려 고개를 넘더니 호압사(虎壓寺) 입구에 정차한다. 우측에는 아파트 촌, 좌측에는 호압사의 일주문이 보인다. 최근에 세운 문인데 ‘虎壓山門(호압산문)’이라는 편액을 붙여 놓았다. 여기서부터 호압사까지는 4~5백m 정도 거리인데 처음부터 오르막이라 미처 준비할 새가 없다. 길도 차 다니기 쉽게 시멘트 포장을 하고 빨래판처럼 울퉁불퉁 요철을 만들어 놓았다. 기왕에 걸을 생각이라면 살짝 왼편 오솔길을 택해 오르자. 10분 남짓이면 호압사에 닿는다. 호압사(虎壓寺). 여느 절과는 이름의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그 내력을 알려면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설명을 읽을 필요가 있다. ‘호암산(虎岩山), 현 동쪽 5리에 있다. 범 같은 바위가 있어 호암산이라 한다. 윤자(尹慈: 조선 전기에 금천현감을 지냈음)의 말에, 금천 동쪽에 있는 산의 우뚝한 형세가 범이 가는 것 같다. 또 험하고 위태한 바위가 있는데 호암(虎岩)이라 부른다. 술사(術士: 풍수나 점치는 사람)가 보고, 바위 북쪽 모퉁이에 절을 세워 호갑(虎岬)이라 했다. 거기에서 북쪽 7리 지점에 다리를 궁교(弓橋)라 한다. 또 북쪽 10리 지점에 사자암이 있다. 모두 범이 가는 듯한 산세를 누르려는 것이다.’ 이 설명에서 헤아릴 수 있듯이 지금의 호압사 앞 우뚝한 바위산이 범이 가는 형상이어서 ‘호암산’이 됐으며 이 범의 기운을 누르려고 호갑사(虎岬寺)를 세웠는데 이 절이 지금의 호압사(虎壓寺: 범의 기운을 누르는 절)로 이름이 바뀌었음을 헤아릴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궁교(弓橋)를 세워 항시 화살로 겨누고,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사자암을 세워 여차하면 사호상박(獅虎相搏: 사자와 범이 한 판 겨룸)하도록 삼중의 장치를 해 놓았으니 옛 분들의 유비무환의 마음이 읽혀진다. 조선시대에는 범이 많다 보니 호환(虎患)이 잦았다. 심지어 임금이 계시는 창덕궁까지 범이 내려왔다는 기록이 실록에 있으니 백성들은 얼마나 범을 두려워했겠는가? 이처럼 하는 것을 비보(裨補)풍수라 하는데 요즈음 가정에서 유행하는 인테리어 풍수도 이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마음 약함은 차이가 없다. 호랑이가 걸어가는 형상이라는 호암산의 호랑이 기운을 누르기 위해 화살로 겨누고 사자와 겨루게 했으니 그 마음씀이란… 호압사는 전해지기를 무학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전설에 경복궁을 세울 때 자꾸 무너져서 그 원인을 알아본 즉 이 호암의 위력으로 인해 무너졌기에 이곳에 호압사를 세웠다고도 한다. 실록이나 여지승람에 호압사나 호갑사 라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는 민간의 전설인 것 같다. 이 절의 본전(本殿)은 대웅전이나 대적광전이 아니라 약사전이다. 서울시 문화재자료(제8호)인 조선시대의 석조약사불이 모셔져 있다. 금니(金泥)로 칠해져 있어서 석조인지 전혀 눈치 채지 못했었다. 삼성각에는 산신, 독성, 칠성뿐 아니라 무학대사 영정도 봉안돼 있다.

앞마당에는 수령 500년의 느티나무가 그 세월만큼이나 가슴을 다 비우고 서 있다. 가슴은 허허로워도 그 그늘은 넓고도 크다. 사람도 나이 먹어 가면서 속은 비우고 그늘은 크게 하라고 무언으로 일러 주신다. 호압사에서 금천체육공원 쪽으로는 ‘천주교 삼성산 성지’가 있다. 기해박해(己亥迫害: 1839년 천주교 탄압) 때 엥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가 새남터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 목을 베어 군문에 매어 다는 것)를 당해 그 시신을 노고산(서강대 뒷산)에 20여일 임시로 안치했다가 이곳으로 옮겨 58년간 잠들게 한 곳이다. 이제 나무 층계 길로 호암산을 향한다. 길은 많이 가파르다. 이윽고 호암 아래 이르러 뒤돌아보니 호압사가 자그마하게 내려다보인다. 너무 아담해 보여 호암을 누르기보다는 호암에 눌린 것처럼 보인다. 그래도 좋다. 이 땅에 어디 범 한 마리라도 살아 있다면야. 이제부터는 능선길이다. 샘도 많아 물 걱정도 필요 없다. 장군봉을 지나고, 신림동으로 내려가는 갈림길도 지나고, 무너미 갈림길도 지난다. 삼성산 정상을 바라보면 송신탑이 산의 정수리에 꽂혀 있다. 옛 분들이 보셨다면 얼마나 놀라셨을까? 속설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 시절 원효(元曉), 의상(義湘), 윤필(尹弼) 세 고승이 수도하던 산이라서 삼성산(三聖山)이라 했다는데, 시흥읍지에는 ‘삼성산은 현 동쪽 10리에 있다. 무학, 나옹, 지공 세 분이 주석하고 정진하며 계셨기에 삼성산이라 한다(三聖山在縣東十里. 無學 懶翁 指空 三釋各三精監而居之 因三聖山)’고 기록했다. 무너미 갈림길에서 삼막사로 가는 길은 시멘트 포장길이다. 이 곳 송신소 차량 이동로로 사용하려니 이렇게 포장길이 된 것 같다. 잠시 후 반월암이 나타나기 직전 좌측 바위에 사각형으로 뚫린 구멍이 있다. 구멍 위 꽃무늬 위에는 서영당(西影堂), 추씨(秋氏)라는 각자(刻字)가 보인다. 흔히 말하는 마애부도(磨崖浮屠)인데 부도라기보다는 사리공(舍利孔: 사리를 봉안한 구멍)이라는 말이 적절할 것 같다. 승려나 도력을 많이 쌓은 재가불자가 입적(入寂)하면 다비(茶毘: 화장)하여 남은 유골이나 사리(舍利)를 탑과 같은 형태의 부도(浮屠)에 봉안하는데 이렇게 하려면 비용과 공력이 너무 많이 든다. 따라서 자연 바위에 구멍을 뚫어 사리함(유골함)을 넣고 입구를 막으면 적은 공력으로 부도를 대신할 수 있는 개량 장례법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마애사리 공(구멍)의 예는 북한산 도선사 위의 ‘김상궁 사리탑’, 불암산 ‘학도암 마애사리공’, 불암산 ‘불암사 마애사리공’ 등에서 볼 수 있다. 어느 시대에나 간소화해 실용성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있었기에 시대가 발전했던 것 같다. 이러한 마애사리공을 보면 요즈음에 유행하고 있는 납골당의 원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참으로 시대를 앞서간 장례법이기에 자연히 머리가 숙여진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이 누군가 이 사리공의 막은 돌을 열고 내용물을 가져가 버렸다는 점이다. 아마도 사리를 넣었을 사리함이 탐나서 꺼내 갔으리라…. 5백살 먹은 느티나무가 속은 비었지만 넉넉한 그늘 만들어 주니, 사람도 늙으면 마음 비우고 그늘을 크게 하라는 뜻인 듯 그 속에 들어 있던 사리(유골)는 어찌 했을까? 보지 않아도 짐작할 만하다. 그런 일들이 우리를 속상하게 한다. 더욱이 이 곳 안내문에는 돌을 던지지 말라는 부탁의 말씀까지 적혀 있다. 어느 도굴꾼은 남의 유골마저 훼손하더니 이제 지나가는 산객(山客)들은 사격 연습이라도 하듯이 그 구멍에 돌을 던진단 말인가?

아마도 그 구멍이 무엇인지 모르는 무심한 이들이 저지르는 일이었을 것이다. 잠시 후 반월암이 나타난다. 절로 오르는 층계 양쪽으로 범어(梵語)로 쓴 ‘옴마니반메훔’ 진언이 가득 적혀 있다. 이윽고 삼막사에 도착한다. 정사(正史)에는 기록이 없으나 세상에 전해지기로는, 세조 때 왕실의 안녕을 빌던 원찰이 서울 네 곳에 있어서 4대 명찰이라 했다는데 동쪽은 불암사, 서쪽은 진관사, 남쪽은 삼막사, 북쪽은 승가사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삼막사에는 문화재도 많고 볼거리도 만만치 않다. 절 입구의 안내판에는 신라 문무왕 17년(677년) 원효, 의상, 윤필이 천막 치고 도를 닦았기에 삼막사(三幕寺: 휘장 막)라 한다. 여지승람 기록에는 삼막사(三?寺: 아득할 막/묘)로 기록되어 있으니 세 성인이 천막치고 도 닦았다는 이야기는 후세에 붙여진 이야기인 것 같다. 절 마당으로 들어서면 시야가 확 트이는 것이 멀리 서해바다가 보인다. 마당에서 바라보는 축대 위에는 아담한 고려 시대 삼층 석탑이 자리 잡고 있다. 경기유형문화재 112호인데 승장 김윤후(金允候)가 몽고군 원수 살리타이(撒禮塔)를 처인성 싸움에서 죽인 것을 기념해 세운 것이라고 한다. 김윤후는 살리타이를 쏘아 죽였는데 나라에서 제수한 상장군의 직위를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고 끝내 제수 받지 아니하였다 한다. 그런 승장 김윤후를 기념하기에는 탑이 너무 아담하다는 생각이 든다. 삼막사에 특이한 것은 6분의 관세음(觀世音)을 모신 육관음전(六觀音殿)이 있고, 다른 절과 달리 지장보살을 모신 곳을 명부전이나 시왕전, 지장전으로 편액하지 않고, 명왕전(冥王殿)이라 이름 붙였다는 점이다. 경기 문화재자료 60호이다. 명왕전에는 중앙에는 지장보살, 좌우로는 무독귀왕, 도명존자가 협시하고 있고 그 옆으로 시왕(十王)이 도열하고 있다. 지장보살이란 분은 석가모니불이 떠나신 후 우리 중생을 위해 성불(成佛)도 미루고 중생 제도(구하기)에 몸 바치는 분이라고 한다. ‘중생 제도를 다해 바야흐로 깨달음을 얻고 지옥이 비워지지 않는다면 약속컨대 나 혼자서는 성불하지 않겠다.(衆生度盡 方證菩提 地獄未空 誓不成佛)’라고 하셨다 한다. 이 분 옆에는 우리가 잘 아는 염라대왕과 그 친구들, 시왕(十王)이 계신다. 이야기 나온 김에 시왕(十王)에 대해 짚어 보아야겠다. 흔히 불가나 민속신앙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49재(齋), 100일, 소상(小祥), 대상(大祥)을 치른다. 사람이 죽으면 시왕(十王)에게 10번의 심판을 받는다고 한다. 일주일에 한 번씩 해서 일곱 번(49번) 심판 받고, 100일에 심판 받고, 1년(小祥), 3년(大祥)에 심판 받아야 심판이 끝나는 것이다. 이 때 돌아가신 영혼이 잘 보이게 도우려고 산 자들이 망자를 위해 재(齋)를 올린다. 죽은 지 일주일 후에 진광대왕에게 심판 받고, 그 일 주일 뒤에는 초강대왕에게 심판 받고…. 이렇게 하여 3년 뒤 오도전륜대왕에게 심판 받는 것으로 심판이 끝난다는 것이다. 지옥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중생이 구원받기 전에는, 절대로 자기 혼자는 성불하지 않겠다는 자장보살의 정성이… 지난 가을 국립박물관에서 열린, 어쩌면 우리 시대에 가장 멋진 전시회였을 ‘고려불화전’에 선보였던 염라대왕, 변성대왕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죄인의 혀를 뽑는 염라대왕도, 독사로 심판하는 변성대왕도 고려 불화로 표현되면 아름다운 예술이 되었던 것이다. 유형문화재 125호인 사적비는 숙종 33년(1707)에 세워졌는데 마모가 심해 판독이 어렵다. 그 옆 천연 바위에 최근 조성한 마애산신(磨崖山神)은 그런대로 산신과 동자와 범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세월이 가면서 명품이 될 것이다. 또 이곳의 특이한 명물은 거북 귀(龜) 자를 전서체 등 3가지 형태로 써 놓은 이른바 삼귀자(三龜字) 암각인데, 불기 2947년(1920년) 서화가 지운영(池運永: 종두를 실시한 지석영 선생의 형님) 선생이 관세음 꿈을 꾸고 새긴 것이라 한다. 이제 칠보전(七寶殿)으로 10분쯤 올라간다. 칠보란 북두칠성을 뜻하는 말이다. 도교의 숭배 대상이었던 북두칠성은 불교에 수용되면서 칠원성군(七元星君)이 되고 북두칠성의 중심점인 북극성은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로 자리 잡았다. 칠보전에는 치성광여래를 중앙으로 좌측에는 일광보살(日光菩薩), 우측에는 월광보살(月光菩薩)이 협시(脇侍)하고 있다(경기 유형문화재 94호). 이 삼존불은 영조 39년(1736년) 조성된 것으로, 연대가 확실하므로 시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고 있다. 칠보전 앞에는 경기시도 민속자료 3호인 남근석과 여근석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규모는 크지 않으나 남근석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정낭(精囊:불알)이 아담하게 붙어 있고, 여근석은 하트모양으로 예쁘게 마주하고 있다. 북두칠성과 남근석 여근석. 이는 회심곡이나 무가(巫歌)의 칠성풀이를 완벽히 실현한 장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칠성님 전 명을 빌고, 제석님 전 복을 빌고, 아버님 전 뼈를 타고, 어머님 전 살을 빌어…” 남근석, 여근석을 설명하는 안내판에는 이곳에서 치성 드리면 출산, 번영, 수명장수를 이룰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랬는지 칠보전 안에 치성광여래는 이미 코가 없어졌다. 아들 점지 받기를 원하는 엄마들이 그 코를 갈아서 약 먹듯이 먹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칠성님 코를 베어 먹고 아들 낳기를 원했다니 빙그레 미소가 떠오른다. 얼마나 상징적인가. 이제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간다. 장군봉을 지나면 좌측으로 석수동 쪽으로 벋어나간 능선길을 만난다. 호암산성의 흔적도 만나고, 신라 때 만든 것으로 추측되는 ‘한우물’도 만나고, 돌로 만든 석구상도 만난다. 석구상 설명판을 읽으면, 한우물 조사 발굴 때 석구지(石狗池)라고 음각된 장대석이 나왔고, 시흥읍지에는 호암산 남쪽에 석견(石犬) 사두(四頭)를 묻었다고 기록됐다. 이런 기록으로 볼 때 최근까지 해태상 등 다른 동물로 보아 왔던 시각은 석구(石狗: 돌로 만든 개)로 통일돼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무슨 까닭으로 4마리의 개를 세웠을까? 아마도 네 마리 개가 사방에서 호위하여 호암을 누르도록 한 것은 아닐까?(가능성은 적겠지만, 아니면 아마도 범에게 바친 제물이던지…) 석구상을 지나면 아파트촌 마을이다. 이제 석수역으로 향한다. 오늘 여정은 여기에서 마무리한다. 교통편 2호선 서울대입구 3번 출구, 버스 환승(5412, 6515)해 호압사 하차. 2호선 신림역 3번 출구, 버스환승(152) 뒤 호압사 하차. 1호선 노량진역 버스환승(152, 5517) 뒤 호압사 하차. 1호선 금천구청역(시흥역)에서 금천구마을버스 1번 타고 호압사 하차. 걷기 코스 호압사 입구 ~ 호압사 ~ 호암산 ~ 장군봉 ~ 서울대방향 갈림길 ~ 무너미 갈림길 ~ 마애부도(반월암) ~ 삼막사 ~ (회귀) ~ 호암산 ~ (좌로) ~ 한우물/석구상 ~ 석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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