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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구의 음악 에세이]프랑스 인상주의 빛낸 모리스 라벨

‘무한반복’ 볼레로 성공에 작곡가도 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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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09호 편집팀⁄ 2011.02.14 13:55:13

이종구 박사 (이종구심장크리닉 원장) 라벨(Maurice Ravel)은 프랑스의 바스크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머니가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성장한 스페인 사람이라, 문화적으로 스페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어린 시절 라벨의 가족은 파리로 이주했으며 일곱 살에 피아노 공부를 시작해 화음과 대위법(Countpoint) 등 작곡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는 피아노보다는 작곡에 더 흥미를 보였는데 1889년 파리 박람회에서 러시아의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음악을 들은 후 러시아 음악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으며 에릭 사티(Erik Alfred Satie), 엠마뉴엘 샤브리에(Emmanuel Alexis Chabrier)와 드뷔시의 영향을 받았다. 음악원에서는 스페인의 비네(Ricardo Vines)를 만난 후 평생 그의 친구가 되었다. 비네는 라벨의 피아노 음악에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연주자가 되었다. 파리 음악원의 학생이 된 그는 1891년에 피아노과에서 1등을 했지만 공부를 게을리 해 1895년에 퇴학을 당하고 1895년에 다시 복학하여 포레(Gabriel U. Faure)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그의 첫 작품은 ‘2대의 피아노를 위한 하바네라(Habanera)’였는데 후일 이것이 ‘스페인 광시곡(Rapsodie espagnole)’의 3악장으로 부활했다. 파리음악원 재학 시절 그는 로마대상 장학금에 도전했으나 실패하였다. 보수적인 프랑스 예술원이 그의 음악을 너무 혁신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890년대에 이르러 라벨은 12년 선배인 드뷔시를 만났는데 그 당시 많은 음악인들은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 전주곡’에 영향을 받았다. 라벨 역시 드뷔시의 음악을 공연장에서 많이 연주했다. 그러나 라벨도 유명해지면서 두 사람은 서로 누가, 언제, 음악적으로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대해 공개적으로 의견 충돌을 일으키기도 했다.

1900년대 라벨은 인상파 음악인 ‘거울(Mirrors)’ ‘자연의 이야기들(Histories naturelles)’ ‘스페인 랩소디(Rapsodie espagnole)’ ‘밤의 가스파르(Gaspard de la nuit)’ 등을 발표하였다. 1909년에는 발레루스의 디아길레프(Sergey Pavlovich Diaghilev)가 라벨에게 ‘다프네와 클로에(Daphnis et Chloe)’를 위탁하고 전설적인 무용수 니진스키(Vaslav Nijinsky)가 주역을 맡았다. 스트라빈스키는 “‘다프네와 클로에’는 가장 아름다운 프랑스 음악 중 하나”라고 호평하였다. 이 음악은 리듬과 서정적 다양성, 자연의 향기로 유명하다. 1920년경에는 디아길레프가 라벨에게 ‘라 발스(La valse)’를 위촉하였으나 그는 이 음악이 발레 음악으로 부적절하다고 거부하였고, 그들의 관계는 결국 디아길레프가 결투를 요청할 정도로 악화되었다. 하지만 ‘라 발스’는 공연장에서 사랑받는 음악이 되었다. 1922년경에 가장 유명한 지휘였던 쿠체비츠키가 라벨에게 무소르그스키의 ‘전시회의 그림’에 대한 편곡을 위촉하였는데 대성공을 거두어 라벨은 더 유명해졌으며, 전 세계에서 이 곡이 연주되자 많은 수입을 얻기도 하였다. 1928년 파리에서 그의 인기는 하향곡선을 그렸지만 미국 투어로 대성공을 이루었다. 그는 뉴욕에서 재즈 공연을 보고 좋아했으며 조지 거슈윈(George Gershwin)을 만났는데 거슈윈이 라벨과 프랑스 음악을 공부하고 싶다고 하자 라벨은 “당신은 이미 일인자인데 왜 2등급의 라벨이 되고 싶어 하느냐”며 거절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그는 그의 인기곡인 ‘볼레로(Bolero)’를 작곡하였다. 그는 이 음악을 하나의 새로운 실험으로 아무런 방향 없이 멜로디를 여러 번 반복했는데 이 곡의 성공에 대해서 자신도 의아해했다. 그 후 그는 계속 피아노곡을 작곡하였으나 1932년 머리에 부상을 입어 정신 상태가 악화되자 작곡을 그만두었다. 이후 뇌 수술을 받았지만 그 부작용으로 예순 둘이던 1937년에 사망하였다. 그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고 애인도 없었지만 후일 동성연애자로 알려졌다. 라벨은 드뷔시와 더불어 20세기의 새로운 인상파 음악을 창조한 ‘프랑스의 자랑스러운 음악인’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지금도 그의 음악은 수없이 연주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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