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성 동국대 교수 새로 개통한 깨끗한 8호선 전철을 타고 ‘산성’ 역에서 내린다. ‘산성’ 역 바로 앞 정거장이 ‘남한산성입구’ 역인데 처음 오는 이들에게는 잘 구분이 안 된다. 지난 봄 몇몇 지인들과 남한산성 성벽을 돌기로 하고 산성역으로 약속을 했건만 그 중 2명이 남한산성입구역에서 내리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이후로는 약속을 하고도 거듭 문자로 확인하고 있다. 1번 출구로 나오면 30여m 아래에 버스정류장이 있다. 9번, 52번 버스가 산성 안까지 연결된다. 버스를 타지 않고 산성으로 오르려면 산성차로(山城車路) 옆으로 잘 가꾸어 놓은 근린공원 속 폭포 나무계단을 타면 된다. 본래 이 길은 구불구불 오르는 2차선 차로 옆으로 아슬아슬하게 인도와 차도가 구분되지 않던 길이었다. 이랬던 길을 나무 데크로 잇고 산 속 오솔길도 이어 연결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중간 중간 차도 옆을 지나야 하는 길이기에 쾌적하게 산성으로 오르고자 한다면 버스를 이용할 것을 권한다. 아니면 산성유원지 쪽 계곡으로 오르는 코스를 타거나 마천동 쪽에서 오르는 것도 방법이다. 버스가 산성 안 종점에 도착한다. 흔히 이 곳 조그만 로터리를 산성 내에서 제일 번화한 곳이라서 그런지 ‘종로’라고 부른다. 중동 건설이 붐을 이루고 있을 때 우리의 산업역군들이 사막 한 가운데에 도로를 내면서 명동이니, 종로니 이렇게 향수어린 이름을 지어 불렀다고 한다. 문득 남한산성 종로가 정겹게 다가온다. 남한산성과 병자호란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국사 시간이나 많은 자료에서 접했을 것이고, 최근 김훈 선생의 병자호란이 널리 읽히면서 익숙한 역사적 사실이 되었으니 이 글에서 따로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이곳 남한산성 지역은 언제부터 우리 조상들 곁으로 다가온 것일까? 종로에서 서북쪽, 즉 국청사 방향에 행궁터가 있는데 근래에 이 주변 일대를 발굴하고 있다. 우선 발견된 것이 백제(百濟)의 흔적이다. 행궁터 서쪽 담장 주변을 발굴하였더니 백제 초기 토기 파편들이 발견되고 2개의 저장용 웅덩이가 발견됨으로써 이곳이 한성백제시대 유구(遺構)임을 알게 되었다.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기에 사적 480호로 지정하였다.
왜 백제의 흔적이 이곳에서 나온 것일까? 우리가 백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오해는 백제 최후의 수도 사비성과 낙화암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낙화암의 전설도 무심한 이들이 기록한 그릇된 역사지만, ‘백제=사비성’이라는 편협한 선입관이 우리를 지배한다. 백제라면 전라-충청도를 생각하지만 사실 백제는 그 역사의 70% 이상이 서울의 동쪽, 즉 지금의 강동구-하남시에서 이뤄진 나라. 사실 백제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강동, 하남)에 근거를 둔 나라였다. 백제 678년 동안 한성(漢城: 서울)백제 시대 493년, 웅진(공주)백제 시대 63년, 사비(부여)백제 시대 122년이었으니 백제를 말하려면 수도 서울 동쪽에 있었던 나라였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남한산(성)은 백제의 수도 한가운데에 있던 산이었다. 또 하나의 발굴 성과는 기록에만 남고 실지(實地, 실제 위치)를 확인할 수 없었던 신라의 주장성(晝長城)에 대한 가능성이다. 신라의 진흥왕은 나제동맹(羅濟同盟)을 깨고 이 남한산성 지역을 포함한 한강 유역을 확보했다. 이후 신라는 당(唐) 나라와 동맹을 맺고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는데 당은 신라마저도 그들 지배하에 두려 하였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 백제 유민들과 함께 당군(唐軍)을 몰아내고 방어기지로 성을 쌓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문무왕 12년조(672년)에 ‘한산주(서울 경기)에 주장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이다(築寒疝州晝長城 周四千三百六十步)라는 기록이 있다. 행궁터에선 옛 건물 터가 분명히 드러나고 거대한 기와가 무더기로 출토되었다. 기와 길이 64cm에 무게는 조선 기와의 4배나 되는 20kg인 데다가 명문(銘文: 새겨져 있는 글씨)도 천주(天主), 갑진년말촌주(甲辰年末村主)라는 글씨로, 삼국사기의 주장성 건축 기록이 거의 틀림없다는 의견이 많다. 이런 역사적인 지역이다 보니 병자호란 때 인조는 백제의 시조 온조대왕을 꿈에서 뵙고 도움을 받았기에 온조대왕 사당을 지었다. 수어장대 옆 숭열전(崇烈殿)은 인조가 지은 온조대왕의 사당이다.
이제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이라는 치욕의 역사만으로 기록될 게 아니라 번성했던 백제의 산성으로, 당나라를 막아낸 신라의 자랑스러운 성으로 되살아나야 할 것이다. 종로에서 우측 길 치안센터 쪽으로 내려가다가 뒷길로 들어서면 천주교 순교성지를 만난다. 단아하게 세운 ‘순교자 현양비’가 길손을 맞고, 안쪽으로 작은 성당이 있다. 조선 후기 천주교가 박해를 받으면서 많은 신자들이 전국 오지로 흩어져 고단한 삶을 이어 갔다. 남한산성도 숨어 살만한 오지였으나 본시 지금의 하남시 고골(古邑)에 있던 광주읍치(廣州邑治: 광주를 다스리던 치소/治所)가 남한산성 수축 후 인조 5년(1624년)에 이 곳 남한산성 안으로 옮겨오자 산성 안은 행정의 중심지가 되어 더 이상 오지가 아니었다. 신유박해(1791년)를 비롯해 병인박해(1866년), 기해박해(1839년)에 이르는 동안 이름도 없는 민초들이 믿음의 이름으로 300 여 명이나 스러져간 아픈 장소이기도 하다. 남한산성은 백제의 수도 한가운데 있던 성이었으니, 남한산성의 가장 번화한 거리를 ‘종로’라고 부르는 것에 다 연유가 있으려나. 병인박해 때는 처형의 피가 심하게 흘러넘치자 한지(韓紙)를 얼굴에 대고 물을 부어 밀착시킴으로써 질식사하게 만드는 도모지(塗貌紙: 얼굴에 종이를 바른다는 뜻) 형(刑)이 행해지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말 우국지사 황현(黃玹) 선생의 ‘매천야록(梅千野錄)’에 의하면 도무지(都無知: 도대체 알 수 없음)를 어찌해 볼 수없는 상황인 ‘도모지(塗貌紙)’와 연결시키고 있다. 이 도모지 형(刑)은 속설이 전하기를 패륜을 저지른 집안 사람을 은밀히 죽이는 사형(私刑)의 방법이었다 하니, 요즈음 갱 영화에서 비닐을 씌워 질식사 시키는 살인 방법의 원형일 것이다. 현양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해공 신익희(海公 申翼熙) 선생 동상이 있다. 해공 선생이 이 곳 남한산초등학교를 졸업하셨다 한다. 동상 글귀에 민주위도동등락역(民主爲到同等樂域: 민주란 함께 즐거운 곳에 이르는 것)이라고 적혀 있다. 그는 자유당 이승만 대통령 시절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가 서거한, 즉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이끈 분이기도 하다. 이 분의 뒤를 이은 조병옥 박사마저 그 뒤 급서(急逝)했는데 어릴 적 들었던 노래가 생각난다. ‘가련다 떠나련다 어린 아들 손을 잡고…’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를 패러디하여 만든 노래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선생 뒤를 따라…’ 어느 시대에나 민중에게는 억압에 용수철처럼 튕기는 힘이 있었기에 역사는 발전해 왔던 것 같다. 이제 길을 더 내려가면 남한산성 역사관이 나온다. 잠시 들러 항쟁의 역사를 느끼고 간다. 역사관 뒤로 오르는 고샅길을 따라가면 사람 발길 닿지 않는 느낌의 개원사(開元寺)를 만난다. 개원사는 남한산성 축성 뒤 지은 일곱 절 중 하나이다. 남한산성은 인조 2년(1624년)~인조 4년(1626년) 축성됐다. 이때 축성에 지극한 공을 세운 이가 승려 벽암(碧巖) 각성(覺性)이었다. 각성은 구례 화엄사 출신으로 당시 승려를 대표하는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 겸 총절제중군주장(總節制中軍主將)을 맡았는데, 축성과 함께 공성(空城, 빈 성)이 되지 않도록 7개의 사찰을 창건하였다. 당시에 이미 망월사(望月寺)와 옥정사(玉井寺) 두 절이 있었는데 국청사(國淸寺) 천주사(天柱寺) 개원사(開元寺) 남단사(南壇寺) 한흥사(漢興寺) 장경사(長慶寺) 동림사(東林寺) 일곱 절이 세워짐으로써 가히 산성 안에서는 불법과 함께 단단한 방어 체계가 완비되었던 것이다. 헌종 때의 학자 관암 홍경모(冠岩 洪敬謨) 선생이 쓴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 헌종 12년, 1846년, 廣州의 역사 지리를 기록한 책)에 의하면, ‘성을 쌓을 때에 승려 각성이 팔도도총섭이 되어 성 쌓는 일을 전담하였고 팔도 승군을 불러 모았다. 또한 성 안 각 절에 영을 내려 팔도에서 부역 온 승군들을 나누어 맡아 식사를 제공하는 등의 일을 하도록 했다 …중략… 아홉 절은 각각 병기와 화약을 비축하였다. (築城時以僧覺性爲八道都摠攝 專任城役 召募八道僧軍 且令城內各寺 分掌八道赴役僧軍供饋等事 …중략… 九寺各藏軍器火藥).’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남한산성 아홉 절의 승려들은 단순 승려가 아니라 승군(僧軍)이었으며 각 절에는 무기와 화약이 비축되어 있었다. 이 무기와 화약들은 1905년까지도 보관돼 오다가, 산성 안의 사찰들이 의병의 은거지가 될까 두려워한 일제에 의해 절들이 파괴됨으로써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다시 중정남한지에 있는 개원사(開元寺) 기록을 잠시 살펴보자. ‘개원사는 동문 안에 있다. 불경이 많고 큰 유기 동이가 4개 있는데 중량은 각각 2백여 근이며 용량은 쌀 수 석이다. 한 조각배가 서호로 떠 왔는데 배에는 사람은 없고 단지 대장경 책함이 있었다. 함 위에 7자가 쓰여 있는데 중원 개원사가 처음 발간한 것이다(在東門內 多藏佛經 有大鍮盆四 重各二百餘斤 量容米數石 …중략… 有一葉船漂泊西湖 舟中無人 惟藏大藏經冊函 函上有七字曰: 中原開元寺開刊).’ 이런 연유로 개원사에는 불경이 많았던 것인데 중정남한지 개원사 설명 끝 부분에는 개원사가 화마(火魔)를 피한 이적(異蹟)이 실려 있다. 현종 때 하루는 화약고에서 불이 나서 맹렬히 타 오르는데 홀연히 반대 방향에서 바람이 일어나 불이 꺼졌다. 또 한 번은 숙종 때인데, 5칸 누각에서 불이 나 다 탈 지경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큰 비가 쏟아 붇듯 내려 불이 저절로 꺼졌다. 이처럼 남한산성 9절 중에 개원사에 이적이 많았음이 기록에 남아 있다. 개원사 일주문으로 들어간다. 너무도 조용해 조심스럽다. 깨끗하고 고요에 빠진 절 마당으로 들어서니 잘 가꾸어 놓은 어느 별장집 정원 같은 느낌을 준다. 금고기를 키웠다는 옛 기록을 되살리려 했는지 연못도 파져 있다. 대웅전 앞마당으로 오르기 전 마애관세음보살이 길손을 맞고, 돌조차 퇴락한 듯한 작은 바위에 감실을 파고 모신 석조여래 좌상이 또 한 번 길손을 맞는다. 전각 이름도 특이하게 불유각(佛乳閣)과 화현전(化現殿)이다. 불유각으로 들어가면 마애약사여래불을 만난다. 불사(佛事) 중 땅 속에서 발굴된 불상이라 하는데 고졸하다. 얼굴 둥근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인상을 하고 계시기에 무엇인가 부탁드리면 들어줄 것 같다.
화현전에는 석조여래입상이 모셔져 있다. 모두 불사하다가 땅 속에서 발굴된 여래상이라 한다. 이 분도 마음 좋은 인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전문가들 감정으로는 고려 때 불상의 특징을 나타낸다고 한다. 개원사에서 고려 시대 것으로 보이는 불상이 나왔으니, 남한산성의 역사는 얼마나 거슬러 올라가나? 성벽 길을 따라 시간을 걸어본다. 그렇다면 개원사 이전 고려 때 벌써 이곳에 절이 있었단 말인가. 아니면 어느 절에서인가 이 부처님들을 모셔 왔다가 개원사 폐사와 함께 땅에 묻혀 졌던 것인가? 밝혀야 할 궁금증이 많다. 다만 이 석불들은 비지정문화재이나 상당한 보존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불상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방문해 보시기를 권한다.
이제 개원사를 떠난다. 일주문을 나서면 우측으로 등산로 안내판이 있다. 남한산성이 분지(盆地)이다 보니 방향은 남쪽인데 성벽 방향으로 오르게 된다. 도중에 남한산성 축성 때 세운 절, 남단사(南壇寺) 터를 지난다. 깨진 기와들이 발끝에 걸린다. 언제나 폐사지에 오면 시간(時間)이라는 화두(話頭)를 꺼내 들게 된다. 시간 속에 묻힌 이야기들을 찾는 일이 길을 나서는 이유 중에 하나일 것이다. 모든 이들에게 물리적으로는 동일하고 만인에게 가장 평등한 것이 시간이지만 처해 있는 상황과 마음에 따라 시간은 천태만상으로 달라진다. 사랑하는 이와 하루는 한 시간보다도 짧지만 미워하는 이와의 한 시간은 일 년보다도 더 긴 시간 아니겠는가? 그래서 시간이란 화두는 역시나 곰씹을수록 맛이 새롭다. 남단사 터를 지나니 성벽에 이르고 여기에서 우향우, 남문(지화문) 방향으로 방향을 튼다. 곧바로 남장대(南將臺) 터가 나온다. 남한산성에는 4개의 장대(將臺)가 있었다. 장대란 높은 곳에 세운 일종의 지휘소에 해당된다. 동서남북 방향으로 각각 하나씩 세웠는데 지금은 서장대(西將臺)에 해당하는 수어장대(守禦將臺)만이 남아 있다.
남장대터에서 휴식도 하고 가지고 온 간식도 나누어 먹는다. 천안에서 온 답사 멤버가 호두과자를 가져와 모두 맛있게 먹었다. 천안의 많은 호두과자 집에도 원조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호두과자가 유난히 맛있었다. 남장대터 바로 옆으로는 제2남옹성이 있다. 성을 쌓을 때는 성벽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성벽으로 접근해 온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게 축성한다. 이 돌출부를 옹성(甕城) 또는 치성(雉城)이라 부른다. 남한산성 남쪽 성벽에는 3개의 옹성이 있다. 이제 성벽길을 따라 남문으로 간다. 산성성벽길 종주구간 중 일부에 해당한다. 필자는 가끔 지인들과 남한산성 성벽길 종주를 하는데 북한산성에 비해 아주 웰빙 코스이니 한 번씩 걸어 보시기를 권한다. 이윽고 남문(지화문)에 도착한다. (다음호에 계속)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마애불과 문화유적지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갑니다.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본지 Art In 편집주간)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