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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이야기가 있는 길 18]사람이 긁어내도 강은 또 살아나니…

25년만에 부활한 미사리 앞 당정섬을 보며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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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12호 박현준⁄ 2011.03.07 13:30:23

이한성 동국대 교수 오늘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들어간 미사리(渼沙里) 길을 걸어 배알미에 있는 약사여래마애불을 찾아 간다. 서울과 그 교외(郊外)는 박물관이다. 선사시대의 유물, 유적으로부터 시작해 백제, 신라, 고구려의 흔적이 산재해 있고 고려의 자취를 거쳐 조선 500여 년의 수도로서, 관심을 갖고 눈길을 한 번 던지면 예사로이 넘어갈 곳이 한 군데도 없다. 미사리. 이제는 카페 촌으로 70, 80세대에게 젊은 날의 낭만을 불러일으키는 감성적 마을이 됐지만 조정경기장 반대쪽 강변길로 들어서면 자연과 역사가 숨 쉬는 감동적인 장소로 바뀐다. 이 길은 어느 계절이나 다 아름답지만 가을, 억새꽃이 흐드러질 때 가장 아름답다. 명일역에서 탄 16번 버스가 조정경기장 앞을 지나 미사리 마을 속 깊숙이까지 데려다 준다. 조정경기장은 88올림픽 때 조정 경기를 위해 세워진 경기장인데 이제는 조정 경기 외에 주로 경정장(競艇場: 소형 모터보트 경기로, 경마처럼 도박을 하는 곳)으로 활용되고 있다. 어느 날 경정장에 들어가 보았다. 수익 낸 사람보다 손실 본 사람이 많다 보니 정서가 불안해 보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조용한 강가 마을이었던 미사리여, 네가 너무 힘들어 보이는구나. 마을길을 지나 강변으로 간다. 두물머리에서 합쳐져 도도히 흘러내리는 강물이 맑다. 본래 이 곳 강에는 퇴적토가 쌓여 만들어진 세 개의 섬이 있었다. 미사리는 현재 육지와 연결돼 있지만 본래는 삼각주 섬이었다. 이 섬과 연결된 두 개의 섬이 있었는데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세 섬이 단절됐다고 한다. 미사리(섬), 당정섬(堂亭섬), 둔지섬(屯地섬)이 그들이다. 이 중 당정섬은 팔당대교 바로 아래쪽의 26만평이나 되는 큰 섬으로,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하고 있었다. 미사리 쪽에서 팔당대교 쪽을 바라보면 검단산과 예봉산이 마주 바라보고, 두 산 사이는 마치 협곡처럼 잘록하다. 고등학교 다닐 때 물리 시간에 배운 ‘베르누이의 정리’를 잠시 떠올려 보자. ‘좁은 곳을 지나는 유체(流体)는 빨리 흐르고, 넓은 곳을 지나는 유체는 느리다’는 이론이다. 그러니 예봉산과 검단산 사이에서 빨리 흐르는 물 속에 섞여 있던 모래와 자갈이 일단 넓은 곳으로 나오면 속도가 느려지니 자갈과 모래가 퇴적돼 당정섬이 만들어진 것이다. 미사리 앞에는 원래 당정섬, 둔지섬 등 ‘삼형제 섬’이 있었는데, 미사리를 제외한 나머지 두 섬을 한강 정비한다며 긁어없애. 미사리도 그렇고 둔지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당정섬은 1986년까지만 해도 건재했었지만 한강종합개발사업에 쓸 골재 채취장이 되면서 이곳에 대를 이어 살던 배천 조씨(白川 趙氏)들이 떠나고 불과 10년 만에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여기 살던 그 많던 재첩, 말조개, 어류(魚類), 우거졌던 미류나무 등 식물군, 철새들…. 그 모든 것이 살 곳을 잃고 사라져 버렸다. 불과 20년 전 우리 세대가 가졌던 환경과 자연에 대한 무지함을 이처럼 생생히 증언하는 곳도 많지 않을 것이다.

둔지섬은 미사리 하류에 있던 섬이다. 이곳은 퇴적층 모래사장이 육지 쪽으로 많이 쌓여 필자도 30년 전, 바지 걷고 건너가 텐트를 치고 삼복(三伏)의 휴일을 보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때도 이미 이 섬의 이름은 선리(船里)로 바뀌어 있었고 대를 이어 살던 담양 전씨(田氏)들이 떠나가고 있었다. 이제는 섬의 흔적도 사람의 흔적도 없는 강가의 빈 땅이 되었다. 그나마 세 섬 중 미사리만은 살아남아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미사리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조상들이 남긴 삶의 흔적 덕분이리라. 이곳은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부터 청동기(靑銅器),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 김원룡 교수가 제기한 고고학 시대 구분으로서 역사학의 부족국가시대. 삼한시대에 해당함), 백제,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의 온갖 유물, 유구가 나옴으로써 1979년 사적 269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니 한강종합개발 사업 와중에도 섬이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나온 출토품 중에 흥미로운 것은 빗살무늬토기인데 이 빗살무늬토기는 시베리아 초원의 고아시아인들이 사용한 토기다. 그 분포는 스칸디나비아, 중앙아시아, 바이칼호, 만주, 한국으로 이어지는 폭넓은 지역이다. 이 토기가 나온 층의 방사선 탄소 연대 측정을 했더니 약 5300년 전으로 나왔다. 이는 중앙아시아 출토 층보다 앞선 시기라 하니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학자들의 연구를 지켜 볼 일이지만 그 당시는 오직 사람의 이동으로 문명이 전해지던 시기임을 생각한다면, 중앙아시아와 한반도 사이에 사람이 왕래하는 교류가 있었다는 증거일까? 태종실록 13년(1413년) 10월 11일 조에 보면 임금이 내시를 파견해 광주성황당에 제(祭)를 지낸 기록이 나온다(遣內侍 祭廣州城隍之神). 미사리는 광주에 속하는 지역으로 매년 8월이면 성황제를 지냈다고 한다. 태종이 파견한 내시는 이 곳 미사리에서 성황제를 지낸 것일까? 아니면 덕풍동에 있던 성황당에서 지낸 것일까? 둘 중 하나일 텐데 그 이상의 기록이 없어 안타깝다. 확인이 된다면 500년 넘는 전통을 가진 성황제로 부활할 수 있을 텐데…. 제방을 내려가 강변 둔치로 간다. 조정경기장과 마을을 지키려고 섬에 제방을 쌓았지만 둔치는 자연 그대로의 퇴적층으로 강물보다 크게 높지 않다. 억새가 흐드러지게 피어올랐다. 누군가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아아~ 으악새 슬피 우우니 가을이인가아요?’ 햇빛 속에 흔들리고 있는 그 모양을 차마 놓아 둘 수 없어 억새밭을 배경으로 사진도 한 장 찍어 둔다. 강가에는 갈대도 무성하다. 누군가가 퀴즈를 낸다. ‘갈대와 억새를 구분할 수 있는 사람?’ 또 누군가는 갈대에 취한다. ‘사나이 우는 마아음을 그 누가 아아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에 수운정~’ 조정경기장 구간을 지나자 덕풍천을 건너게 된다. 덕풍천은 남한산성 아래에서 발원하여 하남 시내를 통과해 한강으로 유입되는 하남시의 가장 큰 하천이다. 이제 하천 정비가 잘 되어 냄새도 없고 천변은 시민들의 걷기코스로 단장돼 있다. 다시 살아난 당정섬을 바라보니 옛적 이곳에서 바지 걷고 물 건너가 삼복 더위에 야영하던 기억도 새로워라 개울을 건너자 억새밭은 더욱 넓게 펼쳐져 있다. 그 속을 미로처럼 지나게 만든 코스도 있어서 걷는 재미가 한결 커진다. 좌로는 예봉산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우로는 검단산이 바로 앞으로 펼쳐진다. 검단산(黔丹山). 옛말에 검, 감, 곰 등의 말은 신성한 것이나 신(神)을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단군왕검의 ‘검’, 감악산의 ‘감’, 공주의 옛 지명인 곰나루에서 ‘곰’, 제주도의 검은오름 등이 모두 신성한 것을 뜻하는 어원을 갖고 있다고 한다.

검단산의 ‘검(黔)’도 예외는 아니어서 ‘검단산’은 곧 신성한 산이며, 신(神)이 사시는 산이다. 그래서 검단산은 옛 광주(廣州)의 진산(鎭山: 주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주 동쪽 7리에 있는데 진산이다(在州東七里鎭山)라 했고,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에는 ‘동부면에 있는데 곧 고읍의 진산이다. 백제 검단선사가 거처하던 곳이다’(在東部面卽古邑之鎭山也,百濟僧黔丹禪師所居)라고 적고 있다. 검단선사(黔丹禪師)는 백제 24대 위덕왕 때 고승으로 고창 선운사를 창건한 승려다. 이름이 검단이다 보니 견강부회하여 이런 이야기를 만든 것 같다. 전국에는 검단산이 여럿 있는데 이 분이 언제 모두 다니며 거처하셨겠는가?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보면 자못 의미심장한 말이 나온다. ‘동으로는 높은 산에 의지하고(東據高岳)’란 표현이다. 백제본기 온조왕 조에 보면 도읍할 곳을 정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생각건대, 이 하남 땅은 북으로는 한강을 띠고 동으로는 높은 산에 의지하고 남으로는 옥택을 향하고 서로는 대해를 격했다(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隔大海)’라 하였다. 여기서 하남 땅이란 이미 정설로 굳어져 가는 풍납토성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곳에서 동쪽으로 의지할 만한 높은 산(高岳)은 검단산 말고는 달리 설명할 수가 없다(다산 정약용 선생도 검단으로 비정함). 또 온조왕 원년 5월조에 보면 자신들의 시조인 부여의 건국자 동명왕의 묘를 세웠고(立東明王廟), 2대 다루왕(多婁王 )부터 모두 8명의 임금이 배알한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동명왕묘는 어디에 세운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검단산으로 비정하고 있다. 검단산이 광주의 진산이듯이 백제 시대의 검단산은 나라의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산이었던 것이다. 동쪽의 고산(高山)에 대한 의미는 중국도 다르지 않아 역대 황제들은 동악(東岳) 태산(泰山)에서 제사를 지냈다. 억새 숲을 지나니 앞으로 팔당대교가 가깝고 산곡천(山谷川)이 나타난다. 산곡천은 검단산에서 발원해 창우동을 지나 팔당대교 앞에서 한강으로 유입되는 하천이다. 강 쪽으로는 25년 전 완전히 파괴됐던 당정섬이 다시 물 위로 모습을 드러내고 숲도 형성돼 가고 있다. 인간이 파괴한 곳에 자연은 다시 퇴적물을 쌓아 섬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어느 해던가 신문을 보니 300여 마리의 고니(白鳥)도 날아와 겨울을 나고 갔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것은 경이(驚異)다. 자연과 시간은 참으로 위대하다. 산곡천을 건너 길을 강가 쪽으로 잡는다. 이곳이 창모루(倉隅)이다. 조선시대에 세미(稅米)나 공물(貢物)을 거두어 두는 창고들이 있었는데, 조운(漕運: 뱃길)으로 운반한 물건들을 거두어 두는 곳이다. 이곳에는 예봉산 쪽으로 이어주는 창모루 나루도 있었다. 창모루 등산로 입구에는 ‘도미나루 350m’라는 안내가 붙어 있다. 이 곳 도미나루 앞 한강을 두미강(斗尾江)이라 불렀었다. 한강은 지역마다 고유의 이름이 있는데. 예를 들면 한강을 오강(五江)으로 구분하여 용산강, 서강, 삼개… 이렇게 구분했던 것이다. 도미나루로 비정(比定)할 수 있는 이야기가 삼국사기 도미(都尾) 열전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여기에 옮겨 본다. 도미는 백제 사람인데 비록 오두막집의 소민(小民)이나 자못 의리를 알고 그 아내는 아름답고 또 절행이 있어 그때 사람들의 칭도하는 바가 되었다. 개루왕이 듣고 도미를 불러 말하되 〃무릇 부인의 덕은 비록 정결을 앞세우나 만일 사람이 없는 깊숙한 곳에서 그럴 듯한 말로 꾀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자가 적을 것이다.〃 하니 도미는 아뢰어 〃사람의 심리란 측량하기 어려우나 신의 아내 같은 자는 비록 죽어도 변함없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왕의 색욕에 굴하지 않고 정절 지켰다는 삼국사기 속 도미부인의 사연 서린 곳이 바로 이곳 미사리 옆의 ‘도미나루’던가. 왕은 시험코자 하여 도미를 만류하여 도미를 머물게 하고 한 근신으로 하여금 왕의 의복과 말로써 가장하고 밤에 그 집에 가서 사람을 시켜 먼저 왕의 행차를 알리고 그녀더러 이르기를 “나는 오랫동안 너의 아름다움을 들었기로 도미와 더불어 내기하여 너를 차지하게 되었으니 다른 날에 너를 맞아들여 궁인을 삼겠다. 이제부터 너는 나의 소유물이다” 하고 드디어 난행하려 드니 그녀는 “국왕께서는 농담이 없으신 법인데 제가 감히 순종하지 않겠습니까. 대왕께서 먼저 방에 들어가 계시오면 제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겠습니다” 하고 물러 나와 한 계집종을 잘 꾸려 들여보냈다.

왕은 뒤에 속임을 당한 줄 알고 크게 노하여 도미에게 일부러 죄를 내려 그 눈을 빼버리고 사람을 시켜 끌어내어 작은 배를 태워 강 위에 띄웠다. 그리고 그녀를 끌어다가 강제로 난행하려 하니 그녀는 “지금 남편을 잃고 독신이 되어 혼자 살아갈 수 없는데 하물며 왕을 모시게 되었으니 어찌 감히 명령을 어기오리까. 지금 월경으로 온 몸이 더러우니 다음날 목욕재계하고 오겠습니다”라고 함으로 왕은 믿고 허락하였다. 그녀는 그 길로 도망하여 강가에 당도하여 건너가지 못하고 하늘을 부르짖으며 통곡하노라니 갑자기 한 조각배가 물결을 따라 앞에 오므로 그 배를 타고 천성도에 이르러 그 남편을 만나 본 바 아직 죽지 않고 풀뿌리를 캐먹고 있으므로 드디어 배를 함께 타고 고구려 산산 아래 당도하였다. 그리고 객지에서 일생을 마쳤다. 여기에서 이들 부부가 건너간 나루가 과연 도미나루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백제의 수도 풍납토성과 가깝고 이름이 같은 나루이기에 여기에 소개해 본다. 천호동 천일어린이공원에는 도미부인 동상이 세워져 있고, 충남 보령 오천면 도씨 가문은 도미부인 사당도 건립했는데 이 곳 도미나루가 훨씬 문화콘텐츠로서 가깝지 않겠는가? 강가로 가는 길이 막혀 있다. 배알미까지 다시 연결하는 계획이 있다 하니 잠시 불편함을 참고 퇴촌 가는 도로로 올라온다. 사람은 없고 차만 쌩쌩 달린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는 검단산 북쪽 백아곡(白鴉谷)에서 생산되는 작설차(雀舌茶)에 대한 시가 실려 있다. 우세화시집(又細和詩集)의 춘일체천잡시(春日棣泉雜詩) 7수 가운데 첫수, 백아곡 새 차가 싹이 처음 나왔는데 (鴉谷新茶始展旗) 마을사람에게 한 포 겨우 얻었네 (一包纔得里人貽) 체천의 수질은 얼마나 맑은지 (棣泉水品淸何似) 은병에 길어다가 시험삼아 끓이네 (閒就銀甁小試之) *최근 연구에 의하면 이 詩는 강화학파 이면백(이광사 손자) 작품이라 함.

검단산 북쪽 기슭에서 차가 생산됐다는 기록은 필자에게 매우 신선한 것이다. 차는 지리산이나 조계산쯤의 남부 지방에서만 나는 것이려니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는 새로운 문화 코드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큰 것이다. 이윽고 배알미에 도착한다. 배알미, 지명치고는 너무 특이하다. 흔히 배알미(拜謁尾)라고 써서 한양을 떠나가며 임금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든지, 반대로 한양 향해 오면서 임금께 배알하는 곳이라는 그럴듯한 설명이 붙어 있다. 그러나 지명학자들의 설명을 빌리면 맞지 않는 말이다. ‘배알’은 ‘비탈’의 사투리 ‘비알’에서 변한 말이고, ‘미’는 산을 뜻하는 ‘뫼’이거나 들을 뜻하는 ‘미’에서 변한 말이다. 이 곳 지형을 볼 대 ‘비알뫼’ 즉 ‘비탈뫼’일 것인데 ‘비탈 산기슭’이란 뜻일 가능성이 높다. 배알미라는 지명에 대해서는 ‘임금을 배알하는 곳‘이라는 둥 별 해석이 다 있지만 실제로는 ‘비탈뫼’일 가능성이 가장 높아. 옛골토성 앞에서 길을 건넌다. 길가 숲 속에 바위가 하나 서 있고 약사여래불이 새겨져 있다. 아마도 예전에 근처에 절이 있었을 것이다. 약사불은 예외 없이 코가 문드러져 버렸다. 배알미 여인네들 배로 들어가 아들로 환생했을 것이다. 홀로 이 곳을 지키는 약사불이 안쓰럽다. 인사드리고 길을 건넌다. 11-1번 버스를 기다려 타고 하남으로 나온다. 교통편 지하철 5호선 상일동행 명일역 1번 출구 ~ 성덕여상 방향 횡단보도 건너서 ~ 16번 버스 환승 ~ 미사리 종점 하차. (16번 노선: 문정동, 농수산센터, 성내역, 천호동, 명일동, 황산) 걷기 코스 버스종점 ~ 강변으로 ~ 강변에는 달리기/자전거, 걷기 길 있음 ~ 길 골라서 억새, 갈대밭 ~ 덕풍천 ~ 강변길 계속 ~ 산곡천/ 팔당대교 지나 ~ 강가쪽 길로 ~ 언덕길 지나 큰 길로 올라섬 ~ 강가 가건물 유일정사 ~ 옛골토성 ~ 길건너 산 아래 마애불 (돌아 올 때) 1) 옛골토성 앞 11-1 버스 탑승 하남시내 행 2) 도보로 검단산 입구(애니메이션 고교)까지 (30분 소요)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마애불과 문화유적지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갑니다.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본지 Art In 편집위원)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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