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가 1952년에 내놓은 중편소설 ‘노인과 바다’는 대어(大魚)를 낚으려고 고군분투하는 늙은 어부의 의지를 간결하고 힘찬 문체로 그려낸 작품으로, 1952년 퓰리처상, 195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명작이다. ‘노인과 바다’는 ‘인간은 상어로 상징되는 죽음에 의해 소멸되지만 용기와 자기극복(自己克服)으로 과감하게 죽음과 대결하는 데 인간의 존엄성이 있다’는 헤밍웨이의 실존철학이 담긴 작품이다. 짧은 분량으로 쉽게 읽히지만 묵직한 교훈을 주기 때문에 가볍게 읽을 수 없는 소설이다. 세계적인 명작 ‘노인과 바다’를 연극 무대에서 보면 어떤 느낌일까? 왠지 광활한 바다와 푸른 자연, 백발의 노인, 노인을 경애하는 소년이 등장하고, 바다 냄새가 코끝을 살랑살랑 간지를 것만 같다. 2월 11일부터 서울 대학로극장에서 공연 중인 2인 연극 ‘노인과 바다(4월 3일까지 공연)’는 흔히 볼 수 있는 해외 라이선스 공연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인의 피와 땀이 스며든 ‘토종’ 한국 작품이다. ‘2011년 올해의 젊은 연극인상’을 수상한 김진만(극단 앙상블 대표)이 각색과 연출을 맡고, 연극인 정재진과 박상협이 각각 노인과 청년을 연기한 이 연극은 지난해 제10회 2인극 페스티벌에서 관객이 뽑은 인기 작품상과 최우수연기상(정재진)을 받으며 성공적인 출발을 알렸다. 그러나 연극 ‘노인과 바다’에서는 광활한 바다는커녕 바다 냄새조차 맡을 수 없다. 13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좁은 객석과 5평 남짓한 작은 중앙 무대, 건드리면 부서질 것 같은 허름한 나무 배, 먼지가 한가득인 그물망, 그리고 온몸이 때로 꼬질꼬질한 두 배우뿐이다. 공연장을 들어섬과 동시에 청년 배우 박상협이 자리를 안내하는데, 스태프가 아닌 배우가 관객을 직접 이끄는 모습은 초라하기까지 하다. 시시콜콜한 명작인데다 가난한 기운이 감도는 이 연극 볼까 말까? 보기 전부터 고민에 빠진다. 그런데 그런 고민은 막상 공연이 시작되면 무의미해진다. 거침없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무대에 빨려 들어가는 기분을 주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관객과 대화를 하기도 하고 농담을 던지기도 하고 놀리기도 하고 무리한 행동을 요구하기도 했다가 다시 본연의 연기로 돌아가는 박상협의 종잡을 수 없는 모습에 저절로 시선이 따라가는가 하면, 관객과 줄 하나를 맞잡고 낚시(놀이)를 하는 정재진의 진지하면서도 비장함이 묻어 있는 표정과 행동에는 식은땀이 흐른다. 공연의 하이라이트인 노인이 청새치를 노리는 상어 떼와 싸우는 장면에서는 손에 땀이 쥐어지고 엉덩이가 의자에서 떨어지고 붙기를 반복한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청새치를 두고, 다시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는 노인의 쓸쓸한 모습에서는 인간의 위대함이 느껴지면서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다. 지루할 것만 같은 이 작품을 감동과 재미로 멋지게 버무린 김진만 연출에게서 연극 ‘노인과 바다’의 탄생 과정과 지나온 이야기 등을 들어봤다. -‘노인과 바다’를 연극으로 만든 계기가 궁금합니다. “5년 정도 구상했습니다. 그동안 무대에 올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꾸준히 해왔어요. 원작과 번역본, 삽화가 들어 있는 책, 논문, 영화,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자료를 찾아서 참고했습니다.” -‘노인과 바다’가 무대화하기에 적합한 작품이던가요? “막상 무대화하려니까 적합하지 않더군요. 광활한 바다 이야기, 전지적 작가시점, 노인의 모놀로그, 작가의 세밀한 묘사가 어우러진 작품이라 무대에 올리기가 쉽지 않았어요. 중간에 포기할까도 생각했죠. 그러다 어느 순간 감이 오기 시작했어요. 새로운 무대 언어로 재창출하는데 좀 더 용감하게 펼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해외에는 연극 ‘노인과 바다’가 없나요? “제가 알기론 재작년까진 없었어요. 그런데 작년에 (‘노인과 바다’를) 연습하면서 찾아봤더니 미국에서 그해 3인극(노인, 소년, 내레이터 등장)으로 제작돼 순회공연을 하더군요. 하지만 2인극으론 국내 초연입니다. 그리고 올해가 헤밍웨이 타계 50주년으로 저작권이 만료되는 시점이에요. 그래서 일찌감치 연극 ‘노인과 바다’와 뮤지컬 ‘노인과 바다’의 저작권 상표등록을 마쳤습니다. 뮤지컬은 7~8월 정도에 열 생각입니다.” -뮤지컬 ‘노인과 바다’는 어떤 광경일지 상상이 안 가는 군요. “지금은 대본과 가사를 쓰고 있는 단계입니다. 형식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이 오가고 있어요. 배우가 많이 나오면 좋을 것 같다는 의견도 있고요. 하지만 작품을 고치면서 배우 둘이 하는 밀도 있는 뮤지컬을 만드는 쪽으로 마음이 많이 기울었어요. 이 작품은 다양한 인물이 만들기 때문에 재미있는 게 아니고 내레이션 청년이 다양한 역할을 해가면서 노인을 움직이게 하고, 노인이 고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관객과 소통하기 때문이거든요.”
-배우(박상협)가 관객에게 자리 안내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노인과 바다’가 명작소설이기 때문에 지루하고 어렵다는 편견이 있어요. ‘재미없다’는 각오를 하고 오는 관객도 있고요. 그래서 우리에게 친숙한 마당극적인 기법을 써봤어요. 공연장에 들어오는 손님을 어촌 마을에 놀러온 관광객으로 설정하고 배우가 반갑게 맞아주는 형식의 공연 말이죠. 이에 따라 관객은 극장에 입장하면서부터 이 작품과 연관성을 갖는 기분을 느낄 수 있어요.” -연극 제목이 원래부터 ‘노인과 바다’인가요? 바꿀 생각은 안 했나요? “제목을 바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어요. 명작을 바꾸는 순간 욕을 먹을 수 있다는 부담이 있고, 함부로 제목을 바꾸면 작품이 가진 고유의 정서, 작품이 표현하고자 하는 깊은 의미가 달라질 수 있거든요. 그리고 ‘노인과 바다’ 원작 자체에 있는 튼튼한 힘을 충분히 살려낸다면 그 가치를 관객이 알아줄 거라고 믿었어요. 많은 관객이 ‘재미없을 줄 알았는데 편안하고 즐겁게 봤다’ ‘노인의 모습에 감동받았다’는 관람 평을 남겨줬어요.” -주로 어떤 관객이 오나요? “자녀를 데리고 관람하는 부모 관객도 있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 관객, 젊은 연인 관객, 소설 대신 연극을 통해 이 작품을 이해하려는 관객 등 다양한 관객이 다녀갔어요. 연극을 보고 소설을 다시 읽고 싶다는 반응이 많았어요.” -아이 관객은 지루해하지 않나요? “생각보다 그러지 않아요. 아이들이라고 해서 이 공연을 보고 크게 느끼는 게 없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며칠 전 공연에선 15살 여자아이가 공연을 본 뒤 펑펑 울면서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험난한 고난을 겪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한 인생이 아닌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걸 봤어요. 아이들의 마음속에도 분명 무엇인가 있더라고요. 아이들 때문에라도 이 공연에 대해 책임감이 많이 듭니다.” -무대 구조가 마당놀이를 보는 듯 한데요, 일부러 만들었습니까? “아니에요. 극장에 적합하게 짰을 뿐입니다. 2인극 페스티벌 때는 정면만 트여있었어요. 그때는 무대를 시원스럽게 펼쳤죠. 이번엔 소극장 특성에 맞게 조금 더 활성화 시켰어요. 그래서 우리 연극은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요.” -뮤지컬 배우 김승대의 출연은 어떻게 됐습니까? “김승대 씨는 청년 역할에 잘 어울리는 배우지만 제작사 사정으로 참여하지 못했어요. 뮤지컬에서 이름을 알렸지만 연극 욕심이 대단한 배우죠. ‘노인과 바다’의 제작이 표류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 때마침 다른 연극에 캐스팅돼서 무산됐어요. 청년 역할은 젊은 남자배우라면 도전해보고 싶은 매력적인 캐릭터입니다.” -노인 역할 캐스팅은 어떻게 했나요? “작품을 만들 때부터 저는 지금의 노인 역 정재진 선생을 가장 먼저 떠올렸어요. 봉산탈춤 회원으로 오랫동안 활동한 친분도 있었고요. 하지만 장기공연을 하자면 혼자 하기엔 어려우니깐 다른 배우도 접촉해야 합니다. 최불암, 주현, 김성겸, 김기현(영화 ‘노인과 바다’의 노인 역 안소니 퀸의 목소리를 더빙한 성우 겸 배우), 변희봉, 이대근, 신구, 이순재, 오현경 등 이 역할에 잘 어울릴 만한 배우는 많아요. 얼마 전엔 신영균, 송재호 씨가 꼭 해보고 싶은 역할로 ‘노인과 바다’의 노인이라고 말하는 인터뷰를 본 적도 있어요. 어르신들은 노인을 보면서 자기 모습을 투영시키는 것 같아요. 왕년에 잘 나가지 않은 사람은 없거든요. 하지만 현재 사람들은 노인들을 무력하고 열정이 없는 뒷방 늙은이 취급을 합니다. 극 중 노인은 예전만큼 지금도 최선을 다할 수 있고, 무엇이든 잘할 수 있다는 모습을 증명해 보이는 인물입니다. 연륜 있는 배우들은 이 배역을 통해 ‘나는 아직 살아 있다’라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어요.” -청새치 소품을 무자비하게 뜯는데요, 매회 새로운 소품을 사용하나요? “저는 공연 모니터를 가장 많이 하는 연출가로 유명해요. 그런데 청새치가 뜯길 때마다 가슴이 아파요. 노인은 자기 살이 뜯기는 아픔을, 청년은 청새치를 뜯을 수밖에 없는 아픔을, 관객은 자기 마음이 뜯기는 아픔을 느낍니다. 여기엔 상실감과 공허함이 깃들어 있죠. 하지만 현실은 해체된 청새치 소품을 다음날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하나 만드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거죠. 그리고 원상 복구한 청새치는 그날 저녁 또 뜯깁니다. 청새치 소품에 대해 궁금해 하는 관객이 많은데요, 말하면 관객의 상상을 차단할 수 있기 때문에 분장실의 비밀로 남겨두겠습니다.” -관객과의 소통이 지루함을 없애주는데요, 관객 반응은 대체로 어떤가요? “처음엔 경직돼 있다가 극장에 들어설 때 배우가 반갑게 맞아주는 모습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것 같아요. 청년과 노인이 관객에게 주는 줄은 ‘소통의 끈’이라 할 수 있어요. 관객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가고 참여를 유도하고, 끊임없이 묻고 놀라기고, 박수를 쳐줍니다.” 제게는 작품을 완성시켜주는 건 관객이라는 지론이 있는데요, ‘노인과 바다’는 저의 지론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노인의 (거지같은) 분장과 마지막 장면에서 돛을 어깨에 이고 배 주위를 도는 모습에서 예수의 모습이 보이기도 합니다. 의도했습니까? “종교를 떠나 보편적인 작품을 만들려고 했기 때문에 그런(예수) 것을 의도하진 않았어요. 노인은 수많은 사람을 대변하진 않지만 자기 삶의 무게를 끝까지 짊어지고 가면서 절대 포기하지 않고 엄청난 인내심과 성취감, 자기 삶의 열정을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노인과 바다’는 2인극 페스티벌에서 관객이 뽑은 인기 작품상을 수상했는데, 그 이유를 뭐라고 보나요? “세계명작을 무대화하는 일이 쉽지 않은데, 지루할 거란 예상을 깨고 재미있다는 데에 점수를 많이 준 것 같아요.” -대학로극장은 혜화역과 많이 떨어져 있어서 관객을 끌기에 좋은 조건은 아닙니다. 관객이 ‘노인과 바다’를 봐야하는 이유를 세 가지만 꼽는다면? “첫 번째로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훌륭한 원작을 무대에서 생생하게 목격하는 묘미가 있습니다. 소설을 읽은 사람은 소설을 무대에서 새롭게 감상할 수 있고, 읽지 못한 사람은 연극을 통해 원작에 대해 흥미를 느낄 좋은 기회입니다. 두 번째는 공연장에서 공연 감상뿐 아니라 극에 자연스럽게 동화돼서 마음껏 즐길 좋은 추억이 될 작품입니다. 배우가 주는 줄도 잡아 보고, 청새치, 돌고래, 별, 달, 태양, 바다, 날치, 갈매기, 널려 있는 명태 등 자연물이 돼서 작품의 인물과 교감할 추억을 만들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비극에 가까운 원작과 다르게 연극 ‘노인과 바다’는 희비극입니다. 관객이 편안하게 웃고 소통하다가 어느 순간에 삶의 힘겨움을 겪을 때 비장미가 드러나는 작품이기 때문에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