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구 박사 (이종구심장크리닉 원장) 사랑은 슈만, 리스트, 쇼팽, 베를리오즈 등 많은 위대한 작곡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큰 자극제가 되었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에게는 사랑보다 스탈린의 정치적 탄압이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일부에서는 쇼스타코비치를 공산주의에 굴복하고 순종한 사람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회고록과 지인, 가족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작곡가로 살아남기 위해 한때 협조를 하기는 했었지만 끝까지 스탈린의 잔인한 독재에 저항했다. 2006년 쇼스타코비치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나라에서도 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으며 2006년 4월에는 KBS와 청소년 오케스트라가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를 공연하기도 했다. 쇼스타코비치는 제정 러시아 시절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1917년 러시아의 붉은 혁명이 성공하고 2년이 지난 1919년 쇼스타코비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했다. 그의 졸업 작품인 ‘교향곡 1번’은 1926년에 초연되었고 졸업 후 그는 피아노 연주자로도 활동했다. 1927년에는 바르샤바 국제콩쿠르에 참가하였으나 경직된 그의 스타일이 호응을 얻지 못해 입상에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거기서 지휘자 브루노 발터를 만났으며 베를린에서 ‘교향곡 1번’을 초연하였다. 그 후 쇼스타코비치는 작곡에 전념해 1927년에 ‘교향곡2번’을 발표하였다. 1927년에는 오페라 ‘코’를 작곡하였으나 스탈린의 공산당 관료들로부터 형식주의라는 비판을 받은 뒤 그의 고난은 시작되었다. 형식주의란 음악뿐만 아니라 문학과 미술 등의 장르에서 내용보다는 형식 또는 스타일 위주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1927년 그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니 지휘자였던 소렌티스키와 평생 친구가 되었는데 그를 통해 말러의 영향을 받아 ‘심포니 4번’을 작곡했다. 이 곡은 그 당시의 어둡고 비관적인 소련의 현실을 반영하는 듯했으며, 쇼스타코비치는 이 작품을 발표하면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갈 것을 두려워하여 34년간이나 공연하지 않았다. 말러의 영향 받아 ‘교향곡 4번’ 작곡하고도 어둡고 비관적인 소련 현실 담았다는 비난 받을까 두려워 34년간 공연하지 않아 이후 쇼스타코비치는 1934년에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작품과는 무관하며 대중과 평론가로부터 호평을 받았지만 쇼스타코비치에게는 치명적인 작품이 되었다. 이 오페라는 절망적인 생활을 이어가던 한 부부의 이야기인데, 어느 날 아내가 남편을 쥐약으로 살해하는 내용이다. 하루는 스탈린과 그의 공산당의 거물급 지도자들이 볼쇼이극장에 나타나 이 공연을 관람하던 중 스탈린이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돌연 오페라 극장을 떠났다. 며칠 후 공산당 기관지 ‘프라브다’는 쇼스타코비치의 형식주의를 맹렬히 비난하면서 이런 작곡가들의 장래는 좋지 않을 것이라 경고하였다. 그 후 그의 작품은 공연이 금지되었고 작품 의뢰도 고갈됐다. 이제 그는 정부와 공산당이 제작하는 선전 영화 음악으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1917년 붉은 혁명이 성공하고 레닌이 집권한 후 러시아는 당분간 문화적으로는 무엇이든지 가능한 자유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그리하여 러시아의 음악가, 문학가, 화가들은 서구 문화의 영향을 받은 아방가드주의를 실험하기도 했으며, 초기에 쇼스타코비치는 그들과 친하게 지냈다. 그 후 스탈린이 트로츠키 등 정적을 제거하고 절대 권력을 장악하자 경제는 어려워지고 수십만의 정치범들이 시베리아 강제수용소로 사라졌다. 또한 수많은 ‘인민의 적’들이 공공연히 처형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러시아의 인민들은 행복하게 사회주의 건설에 동참하고 있다고 선전하고 있었다. 이런 사정에 따라 죽음과 영생을 주제로 한 말러의 심포니를 좋아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4번’은 행복, 환희, 희망이 아니라 절망을 주제로 한 듯했으며, 스탈린은 이 곡을 용납할 수 없었다. 더더구나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 후 쇼스타코비치는 ‘올바른 비판에 대한 답’이라는 표제가 붙은 ‘교향곡 5번’을 작곡하면서 정치적 재활의 기회를 노리기도 하였으나 모두 허사였다. 스탈린과 사회주의의 승리를 찬양하기 위한 예술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시대였다. 히틀러와 제2차 세계대전은 쇼스타코비치에게 재생의 기회를 주게 된다. 1941년 히틀러의 군대는 레닌그라드를 포위하고 시민들은 900일 동안 100만 명의 희생자를 내고 쥐를 잡아먹으면서도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면서 전쟁을 이겨냈다. 이때 레닌그라드에 갇혀 있던 쇼스타코비치는 라디오를 통해 전 세계에 나치에 저항할 것을 호소하면서 ‘교향곡 7번’을 쓰기 시작했다. 이때 쇼스타코비치는 ‘타임’의 표지에 나올 정도로 유명해졌다. 이 교향곡은 영웅적인 러시아인의 저항과 궁극적인 승리를 상증한다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후일 쇼스타코비치는 회고록에서 “이 교향곡은 레닌그라드의 고난에 대한 것이 아니라 스탈린이 거의 파괴한 레닌그라드를 히틀러가 완전히 파괴하려다 실패한 이야기”라고 썼다. 1948년 그와 소련의 많은 예술문화인들은 다시 한 번 반사회주의적이라는 이유로 위협적인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스탈린은 그 후 1949년 서방과의 관계 개선 노력으로 쇼스타코비치를 문화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으로 보내는 등 유화 정책을 펼쳤다. 1951년에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을 위대한 정원사로 묘사하는 칸타타 ‘숲의 노래’를 작곡하기도 하였다. 아마도 이것은 스탈린에 대한 굴복이 아니라 참지 못할 고통을 피하고 음악을 계속하기 위한 생존수단이었을 것이다. 히틀러에 대한 러시아의 승리를 교향곡 7번으로 일약 세계적 영웅 올라. 스탈린 돕고 공산당에도 가입하지만 회고록엔 “압력에 못 이겨 했을 뿐” 1953년 스탈린의 사망은 쇼스타코비치에게 정치적 재활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1960년 쇼스타코비치는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그 후 그의 ‘교향곡 4번’이 공연되었다. 후일 그는 아들과 처에게 협박을 받고 입당하였다고 자백하였다. 쇼스타코비치는 평생을 흡연자이자 술꾼으로 지냈다. 1955년에는 소아마비로 다리 한 쪽이 불편해졌고 1958년 중풍 증세를 보이고 오른팔이 약해지자 피아노 연주를 포기하였다. 그러다 결국 1975년에 폐암으로 세상을 등졌다. 그는 교향곡 15개, 관악 4중주 15개 외에도 총 147개의 작품을 남겼다. 그는 사망한 1975년에도 6개의 작품을 쓰는 등 최후의 순간까지 작곡에 인생을 바쳤으며, 모스크바의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되었다. 러시아의 유명한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에프는 1997년에 제작된 ‘스탈린에 저항하는 쇼스타코비치(Shostakovich against Stalin)’이라는 기록영화에서 쇼스타코비치를 잔인한 독재자 스탈린에 용감하게 저항한 작곡가로 규정하면서 “스탈린이 끊임없는 탄압이 오히려 쇼스타코비치를 더 훌륭한 작곡가로 만들었다”고 결론지었다. 아마도 스탈린의 탄압이 없었다면 쇼스타코비치는 위대한 작곡가로 거듭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