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7호 박현준⁄ 2011.04.11 15:08:42
이한성 동국대 교수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 중 하나가 청량리(淸凉里)다. 조선시대에 강릉과 평해를 가려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주요 길목이었다. 조선시대 대로 중 하나인 평해대로(平海大路 일명 관동대로)는 흥인지문(동대문)을 나와 청량리를 지나서 중량포(中梁浦, 中良浦, 中浪浦) 건너 망우리고개(忘憂里峴)에서 한시름 잊고, 양근(양평) 원주 지나 강릉 찍고, 삼척/평해로 가는 주요대로였다. 또한 새벽 성문을 여는 파루(罷漏: 5경3점에 33번 치는 종. 오전 4시 12분 쯤)에 맞춰 성문안 사람들에게 땔감을 팔러 가는 민초들이 지나가던 길이었다. 그러던 한적한 시골동네가 기찻길이 뚫리고 100년 전(1911년) 청량리역이 들어서자 시끌벅적한 대처가 되었다. 1974년 지하철 1호선이 뚫리자 동네는 더욱 북적이게 됐다. 사람이 많고 특히 나그네가 많으면 언제나 따라오는 것이 홍등가(紅燈街)였다. 얼마 전 오늘 걷는 이 답사길 이야기를 꺼내자 어느 숙녀 입에서 문득 튀어나온 단어가 청량리 뒤에 붙는 번지수였다. 새로 건립한 청량리 역사(驛舍)는 첨단의 현대적 건물로 지어졌고 주변도 산뜻한 공원이 되었지만 우리네 머릿속에 기억된 잔재는 오래 남는다. 부끄러웠던 일, 힘들었던 시대…. 이런 것들도 모두 우리 삶의 한 부분이었음을 이 곳 청량리는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꺼내기도 거북한 일이지만 이런 집창촌(集娼村)이 없어지면서 아주 많은 지역에 게릴라처럼 흩어져 생겨난, 새 단어를 만든다면, 산창촌(散娼村)은 더욱 흩어진 우리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다행히 청량리는 그 이름 그대로 맑고(淸) 산들(凉)하게 옛 모습으로 돌아갔다. 지하철 1호선 청량리역 3번 출구를 나와 미주아파트 쪽으로 나간다. 50여m 나아가자 ‘루크안경’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여기에서 골목길로 좌향좌 한다. 이제는 집들 사이 골목길에 지나지 않지만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걸어 보면 이 길이 예전에는 나지막한 산등성이였음을 어림할 수 있다. 그렇다. 삼각산의 정기가 서울 동쪽으로 뻗어나가면서 비백(飛白: 일필휘지로 갈겨쓴 붓글씨에서 먹이 안 묻고 지나간 공간. 그와 같은 산 능선길)을 만들고 다시 남으로 내려가 배봉산(拜峰山: 시립대학 뒷산)에서 솟구쳐 명당을 만드니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와 순조의 어머니 수빈 박씨가 이곳에 잠들어 있었다. 길의 8부 능선쯤에 이를 즈음 동네 집들 사이 우측으로 절 지붕이 보인다. 골목길로 들어서자 ‘천장산 청량사’를 알리는 돌기둥 문이 서 있고, 인왕(仁王)이, 혹시 이 자가 도량(道場)을 침범하는 삿(邪)된 자는 아닌지 눈 부라리고 팔 걷어붙이고 지켜보고 있다. 이크! 모자도 벗고 옷깃도 여미면서 마음을 낮춘다.
청량사(淸凉寺). 지금은 산동네 골목길에 없는 듯이 자리 잡은 절이지만 예전에는 당당한 절이었다. ‘청량리’라는 지명을 낳게 한 절이니 만만할 리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자. “고려 이자현(李資玄)이 춘주(春州, 지금의 春川) 청평사에 있었는데 예종(睿宗 고려 16대 왕)이 남경(지금의 서울) 순행을 하면서 아우 자덕을 보내어 나와 청량사에 머물도록 유시했다. 일찍이 그를 불러 만나서는 성품을 잘 기르는 요체에 대해 물었는데 ‘심요’ 한 편을 올렸다. 왕이 찬탄하여 상을 내리고 대우가 심히 후하였다. (高麗李資玄在春州淸平寺 睿宗幸南京 遣其弟資德 諭赴行在 留淸平寺 嘗引見 問養性之要 遂進心要一篇 王歡賞待遇甚厚)” *참고: 이자현은 고려 예종 때 명문가 사람으로 지금의 소양강 청평사인 보현원 → 문수원을 가꾸고 수도함. 호는 청평거사로 청평사라는 절 이름도 이자현의 호를 딴 것임. 사거 후 화장해 청평사에 부도를 세움. 한때 ‘질낮은 동네’로 통했던 청량리…. 그러나 일대 지명을 보면 결코 만만한 지역이 아니고, 요즘 원래 모습 찾고 있어서 다행. 성능(聖能)의 북한지에도 같은 내용의 글이 실려 있는데 단지, ‘지금은 폐사 되었다. 옛터는 알지 못한다(今廢 舊址未詳)’라는 내용이 첨가되어 있다. 삼각산에 있는 사찰들을 언급하면서 설명한 부분인데 즉 ‘삼각산 청량사’에 대해 소개한 글이다. 그 이유는 고산자 김정호의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를 보면 알 수가 있다. 경조오부도는 수선전도(서울 시내 중심 지도)에 비해 범위를 넓게 그린 지도인데 이 지도에는 서울의 동쪽 산줄기가 비교적 상세히 그려져 있다. 그 산줄기의 흐름은 ‘화계사(북쪽 줄기) ~ 수유현 ~ 벌리(번동) ~ 우장현(장위동) ~ 천장산(경종의 의릉) ~ 청량사 ~ 배봉산’으로서 청량사는 삼각산의 화계사 산줄기가 벋어나간 끝자락에 있으니 삼각산 산계(山系)에 포함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청량사가 자리한 산 이름도 가지가지여서 넓게는 삼각산, 조금 좁히면 천장산(天藏山), 바로 뒷산을 이르면 바리산, 비리산(飛裡山), 엄귀비의 비문에 다르면 천수산(天秀山)인데 이는 이 지역을 가벼이 보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제 50여m 언덕길을 오르면 바리산 정상부로 간다. 철 펜스가 설치돼 있고 숲이 잘 가꾸어진 묘역이 나타난다. 길을 좌로 잡아 평지로 내려온다. 영휘원(永徽園)과 숭인원(崇仁園)이 있다. 이곳은 과거 홍릉(洪陵) 구역 내 남쪽에 자리 잡은 고종의 후궁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엄씨와 영왕(英王 李垠)의 장자 이진(李晉)의 묘소이다. 명성황후 민비는 일본 세력을 약화시키고 러시아 세력을 키우는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이에 불안을 느낀 일제는 공사 미우라(三浦)의 주도 아래 낭인(浪人: 불량배)들을 동원해 조선 왕비의 침전에 난입해 국모를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른바 을미사변(乙未事變)이다. 2년 후인 1897년 명성황후는 지금의 국립산림원(홍릉수목원) 자리에 있던 비구니 스님들의 절 돌곶이승방(석관천 니사: 石串川 尼舍) 자리에 장사지내지고 홍릉이라 명하였다.
이렇게 되자 위협을 느낀 고종은 이듬해(1896년) 2월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한다.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는 수치스러운 국왕의 피신 사건이었다. 이 때 자신의 가마로 고종을 피신토록 한 이가 명성황후를 모시던 상궁 엄씨였다. 그 후 엄 상궁은 지근 거리에서 고종을 모시니 이듬해인 1897년 10월 엄 씨의 몸에서 왕자가 태어났다. 바로 영왕 이은이다. 영왕은 후사가 없던 순종의 뒤를 이을 황태자(懿愍皇太子: 의민황태자)로 책봉되었다. 생모인 엄상궁은 황귀비(순헌황귀비)로 책정됐고. 1911년 황귀비 엄씨가 서거하자 홍릉 남쪽 이 곳에 장사지낸다. 묘소의 이름은 영휘원(永徽園)이다. 왕이나 왕비의 묘소는 능(陵)이라 부르며 세자, 세손, 세자비, 세손비, 후궁 중 왕(세자)의 생모, 왕의 친아버지의 묘소는 원(園)이라 부른다. 따라서 엄귀비의 묘소도 원(園)이 됐다. 이 분은 교육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양정의숙, 숙명여학교, 진명여학교를 창설한 분이기도 하다.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고종을 가까이 모시던 엄상궁에서 아들(영왕)이 태어나고, 그녀는 홍릉 아래 영휘원에 묻히니… 영휘원 남쪽으로는 이어서 숭인원(崇仁園)이 있다. 엄귀비의 첫손자이며 영왕 이은의 장자인 이진(李晉)의 무덤이다. 영왕은 어린 나이에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서 그 곳에서 교육을 받고 일본인 방자(方子) 여사와 정략 결혼을 하는 처지에 놓인다. 그들의 첫아들이 1921년 8월 일본에서 태어났는데 인사차 조선에 왔다가 경복궁 석조전에서 의문사한다. 생후 8개월 된 영아에 불과한 나이였다. 순종은 이를 가슴 아프게 여겨 할머니 옆에 후히 장례를 치르도록 하였다. 홍릉에 묻혀 있던 한 맺힌 명성황후는 고종이 승하하자 지아비를 쫓아 1919년 금곡으로 천장(遷葬)하여 갔으나 엄귀비와 그 손자는 지금도 옛 홍릉 묘역에 잠들어 있다.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하는 석양의 홍릉 묘역은 국력 잃은 나라의 아픈 역사를 말없는 가운데 우리에게 증언한다. 영휘원을 나서면 담을 맞대고 있는 곳이 세종대왕기념관이다. 문을 들어서면 언덕길이 길게 이어지는데 우측으로 큰 비각이 있다. 세종대왕신도비가 건물 안에 웅장하게 서 있다. 안내문에 문종 2년(1415년)에 세운 비석이라고 한다. 의문이 생긴다. 어찌하여 세종께서 묻힌 여주 영릉(英陵)에 있지 않고 이곳에 있는 것일까?
해답은 예종(睿宗) 실록에 있다. 세종대왕의 능자리가 풍수적으로 좋지 않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논의한 기록들이 있다(예종 원년 1468년 11월29일, 12월1일). 같은 해 12월26일에는 여흥(驪興: 지금의 여주)에 천장(遷葬)할 자리를 확정한다. 그리고 다음 해(예종 1년: 1469년 7월10일) 천장하면서 임금이 명하기를 “구 영릉 석실은 파지 말고 편의에 따라 묻되 산 형태 그대로 흙을 덮고 잡상 비석 또한 묻어라(舊英陵石室勿掘 隨宜埋之 覆土若山形然 雜象碑石亦埋之).” 이렇게 하여 지금 내곡동 헌인릉 내에 있던 세종의 영릉은 여주로 옮기고 비석과 석물은 그 자리에 묻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1973년 겨울부터 1974년 봄까지 발굴해 세종대왕기념관에 전시해 놓았다. 비석이나 석물들이나 가히 장관을 이룬다. 이곳을 지날 기회가 있으면 꼭 들러 보시기를 권한다. 또 하나 눈여겨 볼 가치 있는 석물(石物)이 있다. 영조 25년(1749년) 청계천을 준천(濬川)하면서 수표교 아래 세웠던 물높이 측정 장치 수표(水標)다. 수표교 다리는 장충단공원에 있고 수표는 이곳에 있으니 다시 다리 곁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수표 표면에는 높이를 잴 수 있도록 일척, 이척, 삼척… 이렇게 새겨 놓았다. 척(尺)의 간격이 너무 좁아 길이를 재 보았더니 척의 거리가 약 21cm에 불과하다. 현재 우리 기준 척(尺)을 사용하지 않고 주척(周尺)을 사용했던 것이다. 이제 기념관을 나와 길을 건넌다. 국립산림과학원(홍릉수목원)이 자리 잡고 있다. 담 밑에는 홍릉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이 터에 있던 돌곶이승방 자리 터가 명당이라서 승방을 옮기고 그 자리에 능을 썼다고 한다. 아마도 청량사와 합쳐졌던 것 같다. 지금은 흔적이 없으나 고산자의 경조오부도에 그려져 있는 돌곶이승방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한양 주변에는 네 개의 전문 비구니 사찰(尼舍)이 있었다. 여염집 여자들도 있으나 왕실에 혼자 남은 여자들이나 나이 먹은 궁인들이 와서 노후를 의탁하던 곳이다. 창신동의 청룡사(새절승방), 보문동의 보문사(탑골승방), 옥수동 미타사(두뭇개승방), 석관천의 돌곶이승방…. 고종이 승하하자 명성황후의 홍릉은 금곡으로 옮겨지고 남은 땅은 홍릉수목원이 되어 서울에서 자연을 만나는 기쁨을 주니….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명성황후의 홍릉은 금곡으로 옮겨 부군인 고종과 함께 묻히고 이곳은 수목원이 됐다. 현재 2000여 종에 2만여 그루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고 한다. 필자도 금년의 첫 복수초와 산수유를 이 곳 수목원에서 만나는 기쁨을 누렸다. 서울 한복판에 이처럼 자연의 모습과 식물군을 골고루 갖춘 곳도 없을 것이다. 토, 일요일만 일반에게 개방하니 방문일을 주말에 맞추는 것이 좋겠다. 한나절 숲속을 거닐면서 다양한 식물을 만날 수 있으니 주말 나들이로 손색이 없다. 침엽수림 사잇길을 지나 수목원을 벗어난다. 정릉천과 월곡천이 만나 흘러내리는 개울이 이제는 주민들의 산책공간이 되었다. 이 길을 건너 고대(高大) 방향으로 간다. 10분이 안 걸려 길을 건너면 교우회관 건물 앞으로 가게 되는데 우회전하여 50m 가면 개운산 방향으로 가는 길을 만난다. 즉 고대 후문으로 가는 길이다. 이 길로 1km 가면 고대 후문이 나오고 개운산으로 오르는 오솔길이 있다. 이 동네를 예부터 북바위(鼓岩)골이라 불렀는데 북바위를 일명 종암(鐘岩)이라 했다 한다. 종암동이란 지명은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한경지략에 의하면 북바위밭(鼓岩田)은 예부터 기름지고 소출이 많았다고 한다. 조선조 초에 우의정 박은(朴訔)이 북바위골에 살았는데 청빈하였다고 한다. 하루는 왕(태종)이 미행 나왔다가 박은의 집에 들렀는데 조밥을 먹고 있던 박은은 급히 씹던 밥을 삼키려다가 목에 걸려 기침하느라 임금을 한참 기다리게 했다고 한다. 화가 치민 태종이 그 연유를 묻자 아뢰니 그제야 태종은 박은의 청빈함을 알아보고 북바위골 농토를 하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북바위골 뒷산 개운산은 잘 가꾸어져 있어 걷기 좋은 둘레길이 있다. 정상에는 주민들 체육시설도 여러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 분들은 굳이 헬스클럽 안 가도 충분히 운동할 수 있을 것 같다. 고대 한국학연구소 앞을 지나 기숙사 건물들 사잇길로 내려오면 우측으로 큰 절 개운사(開運寺)가 있다. 운(運)을 열어 준다(開)니 기분이 좋구나. 일제 때 중앙불교전문학교가 이곳에 세워져 서정주, 조지훈, 김달진 등 문인을 키워낸 터전이기도 하다. 지방문화재인 탱화도 여러 점 있고, 목조 아미타상은 시대성이나 예술성도 뛰어난 불상으로 가치가 높다. 불교도가 아니더라도 들려 볼만하다. 고려시대 목조불상은 희귀성만으로도 볼 가치가 충분하다. 개운사 건너 골목길로 들어서면 개운사의 부속암자 보타사(普陀寺)가 있다. 서울 한복판이라는 느낌을 한 순간에 떨칠 수 있는 고즈넉한 암자다. 법당 뒤 암벽에는 고려시대 관세음보살을 새긴 대형 마애불이 있는데 세검정 옥천암 마애불과 거의 유사하다. 같은 작가이거나 연관이 매우 깊은 작가군(作家群)에서 만든 작품인 것 같다. 상부가 튀어 나와 눈비를 가려 주는 자연석 바위에 박력 있고 뜻이 분명한 모습을 하고 계시는 마애불이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89호로 지정되어 있다. 절 마당 우측 한옥 가옥 안마당에는 벽봉당(碧峰堂) 선사의 부도가 있다. 탄생년도가 단기 4206년(1873년)인데 81세 되던 해(1954년) 남북통일을 기원하며 소신공양(燒身供養: 자신의 몸을 태워 발원하는 일)했다는 비석이 서 있다. 언젠가 선사의 발원이 이루어지리라. 보살님께 눈인사 드리고 차 한 잔 마다 않고 마시고는 절 층계를 내려온다. 마음 스산한 날 전철 한 번 타고 와 들리면 편해지는 암자다. 이제 속세로 가자. 1km 밖에 6호선 안암역이 있다. 교통편 지하철 1호선 청량리역 3번 출구 걷기 코스 청량사 ~ 영휘원, 숭의원 ~ 세종대왕기념관 ~ 국립산림원(홍릉수목원) ~ 개운산 둘레길(고려대 뒷산) ~ 개운사 ~ 보타사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마애불과 문화유적지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갑니다.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본지 Art In 편집주간)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