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구 박사 (이종구심장크리닉 원장) 랄프 본 윌리엄스 작곡가이자 유명한 지휘자였던 랄프 본 윌리엄스는 도자기의 명가 웨지우드 가문, 그리고 진화론을 창시한 찰스 다윈의 먼 친척이었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역사와 철학을 공부하고 영국 왕립 음악원에서 작곡을 배웠다. 이후 영국 왕립 음악원에서 수학하다 미국으로 건너가 유명해진 지휘자 스토코프스키와도 친분을 쌓았다. 후일 스토코프스키는 윌리엄스의 음악을 많이 공연했다. 그리고 영국 왕립 음악원에서 영국의 유명 작곡가가 된 구스타브 홀스트와도 친구가 되었다. 1897년에는 베를린에서 막스 부르흐(Max Bruch)를 사사하기도 했다. 윌리엄스는 1905년부터 1953년까지 리스 힐 음악 페스티벌의 초야를 지휘하였으며, 1909년과 1914년에 ‘환상곡(Fantasia on a Theme)’ ‘바다 심포니1번(A Sea Symphony)’ ‘런던 심포니 2번(A London Symphony)’을 발표해 유명해졌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마흔한 살 나이에 위생병으로 지원해 공을 세웠으며 전쟁이 끝난 뒤 ‘심포니 3번’을 작곡했다. 그는 오페라 5편, 발레 2편, ‘심포니 7-8-9번’과 10편의 피아노, 바이올린, 비올라, 오보에, 튜바 협주곡, 합창곡 19곡 등 수많은 음악을 작곡했고 여든여섯 살에 타계했다. 구스타브 홀스트 ‘행성(The Planets)’의 작곡가로 유명한 구스타브 홀스트(Gustav Holst)는 음악 200여 편을 작곡했으며 영국을 대표하는 작곡가다. 그는 바그너, 리하르트 스트라우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열정적인 음악 교사였다. 1905년에 런던의 성 베드로 여자 학교의 음악감독이 됐고 1907년에는 몰리 대학에서도 음악감독으로 근무했다. 홀스트의 할아버지는 유명한 하프 음악의 작곡가이자 교사였으며, 그의 아버지도 오르가니스트, 피아니스트, 합창단의 지휘자였다. 그는 문인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H. G. 웰스(Herbert George Wells),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와 동시대에 살면서 그들의 음악에 심취했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 사실 홀스트 본인은 ‘행성’을 가장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대중적으로 가장 인기가 높았다. 1914~1916년에 만들어져 1920년에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초연해 큰 인기를 얻었다. ‘행성’은 흔히 말하는 천문학의 행성이 아니라 점성학에서 이야기하는 행성을 주제로 한 것이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처럼 오보에와 바순을 많이 사용했다. 또한 쇤베르크의 음악에서처럼 모든 음표를 사용하는 12음표법(12 tone music)을 사용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영국에서는 거의 모든 독일 음악이 금지됐으며 그의 음악은 엘가와 윌리엄스의 음악과 더불어 애국 음악으로 연주됐다. 홀스트 최후의 작품 ‘브룩 그린 모음곡(Brook Green Suite)’이 발표된 후 1934년에 위장 질환으로 수술을 받고 사망했다.
벤자민 브리튼 브리튼(Benjamin Britten)은 어려서부터 음악을 많이 작곡했으며, 정식으로 음악이 출판되기 이전에 이미 800곡의 짧은 곡들을 만들었다. 그는 작곡 개인지도를 받았으며 런던의 왕립음악대학에서 공부했는데 거기서 랄프 본 윌리엄스를 알게 되었다. 그가 처음으로 주목 받기 시작한 것은 1930년 ‘신포니에타(Sinfonietta) 작품 1번’ ‘성모마리아를 위한 찬송가(A Hymn to the Virgin)’와 1934년 BBC 합창단을 위해 작곡한 ‘예수가 태어났다(A Boy was Born)’를 발표하면서부터다. 1935년에는 영화 음악 ‘국왕의 우표(The King's Stamp)’를 작곡했으며 1937년에는 테너 피터 피어스(Peter Neville Luard Pears)를 만났는데 이들은 평생을 같이 살면서 음악적으로도 함께하게 되었다. 1930년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브리튼은 피어스를 위해 ‘미켈란젤로의 7가지 노래’를 작곡했으며 그 후 피어스를 위해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미국에서는 애런 코플랜드(Aron Copland)와 친해졌으며 그의 음악인 ‘Billy the Kid’ ‘An Outdoor Overture’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참이던 1942년 그들은 영국으로 돌아가 입대를 해야 했지만 양심적 반전론자로 등록하고 입대를 거부해 잠시 투옥되기도 했다. 이후 진정한 반전론자로 인정받아 군대에는 가지 않았지만 영국 사회의 따가운 눈총은 피할 수 없었다. 이후 벤자민 브리튼은 수많은 오페라를 작곡하기 시작했는데 ‘알버트 헤링(Albert Herring)’을 작곡했으며 ‘빌리 버드(Billy Budd)’ ‘한여름 밤의 꿈(A Midsummer Night Dream)’ 등이 유명하다. 보수적인 영국 사회에서 입대를 거부하면서 결혼도 안하고 평생을 남자친구와 함께 살았기에 종종 세상의 벽과 마주하기도 했다. 때문에 그의 음악세계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1960년대 브리튼은 러시아의 쇼스타코비치와 로스트로포비치와도 친해졌으며 그들을 위해 ‘첼로 모음곡(Cello Suite)’ ‘첼로 심포니(Cello Symphony)’ ‘첼로 소나타(Cello Sonata)’를 작곡했고 쇼스타코비치가 초연했다. 쇼스타코비치도 브리튼의 음악을 높이 평가했으며, 그의 ‘심포니 14번’을 브리튼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1970년대에 그의 건강이 쇠약해지기 시작해 작곡도 뜸해졌지만 ‘베네치아에서의 죽음(Death in Venice)’ ‘옛날에(A Time There was)’ ‘현악 3중주(Third String Quartet)’ ‘극적인 칸타타(Paedra)’ 등 작곡을 계속했다. 영국 정부는 그에게 작위를 주려고 했지만 브리튼이 거절했다. 1976년에는 남작 작위를 받았다. 작위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심부전증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파트너 피터도 작위를 받았으며, 두 사람이 30년간 함께 살면서 일했던 집은 브리튼 퍼스(Britten-Pearce) 재단이 운영하고 있다. 이들은 영국 사회의 주류에서 벗어나 살기는 했지만 영국과 세계의 음악사에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