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9-220호 박현준⁄ 2011.05.02 14:01:04
이한성 동국대 교수 지하철 4호선 당고개역은 출퇴근 시간을 제외하고는 한산한 편이다. 지하철 앞쪽 칸을 타면 1번 출구로 가깝게 나갈 수 있다. 길을 건너면 20여m 앞에 버스정류장이 있다. 덕릉고개 지나서 청학리 방향으로 가는 버스 노선이 여럿 있으므로 잠시 기다리면 환승이 가능하다. 환승한 버스가 덕릉(德陵)고개를 지나간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 왕릉 42기 중 어디에도 덕릉이라는 이름은 없다. 여기에는 야사(野史)에 전하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 14대 임금 선조는 본래 왕이 될 수 있는 서열에 있지 않았다. 그 아버지 덕흥군(德興君) 이초(李岧)는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동작동 국립묘지의 주인)의 둘째 아들이며 중종의 7째 아들인 종친에 불과하였다. 선조(河城君: 하성군)는 이 덕흥군의 3째 아들로 더더욱 왕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기회는 명종에게 후사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후사가 없던 명종이 하루는 종친들을 불러 사람됨을 시험하였다 한다. 임금이 쓰는 익선관(翼善冠)을 내어 주면서 ‘머리 크기를 보려고 하니 써 보라’ 하였다 한다. 모두가 써 보았건만 하성군 만은 ‘이 관은 전하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쓸 수 없는 관’이라 하면서 끝내 쓰지 않았다 한다. 이렇게 후한 점수를 얻은 하성군은 명종이 승하(昇遐)하자 왕위를 잇게 된다. 명종실록 20년(1565년) 기록에는 왕이 위태롭자 신하들이 중전께 의견을 물은 즉 하성군으로 뒤를 이으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미 많은 점수를 땄던 것이다. 임금이 될 수 없는 출신이지만 임금이 된 선조는 자신의 부친이 왕으로 추존되지 못하자 못내 아쉬워해. 그래서 민초들이 부친 묘에 ‘릉’자 붙여 부르자 고마워했다는 전설 내려와 아들 하성군이 왕위에 올랐을 때, 아버지 덕흥군은 이미 세상을 떠나 수락산 자락에 묻혀 있었다. 덕흥군은 선조 2년(1569년 11월) 덕흥대원군으로 추존되었다. 실록 기록에는 없으나 선조는 아버지가 왕으로 추존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래서 고개를 넘어오는 나무꾼들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 대원군 무덤 쪽에서 넘어 왔다 하면 나무 값을 평소대로 지불하고 덕릉고개로 넘어 왔다 하면 그 값을 후하게 쳐 주었다 한다. 그 후로는 모든 사람이 이 고개를 덕릉으로 불렀다 한다. 능(陵)이란 임금과 왕후의 무덤에만 붙일 수 있는 칭호이니 백성의 입을 통해 덕흥군은 왕 대접을 받은 것이다. 이 고개는 지금도 ‘덕릉고개’로 불리고 있으니 선조는 기뻐하시리라. 덕흥대원군 묘는 고개 넘어 왼쪽 흥국사 들어가는 길 위에 있다. 버스가 마당바위 입구에서 객을 내려 준다. 내원암 입구 표지가 있다. 이 계곡은 수락산 계곡 중 단연 으뜸이다. 예부터 이 지역을 청학리(靑鶴里), 옥류동(玉流洞)으로 불렀으니 으레 물 좋고 경치 좋은 골자기를 청학동이니 백운동이니 하던 옛분들의 가치 기준을 생각하면 이 계곡의 아름다움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너무 아쉽다. 이 지역이 국립공원도, 도립공원도, 군립공원도 아닌 개인 소유지이다 보니 골자기마다 상혼이 들끓는다. 일반인은 어디 계곡물에 가까이 가기도 어렵다. 이 계곡에는 예부터 이름난 3 개의 폭포가 있다. 아마도 수락(水落)이란 산 이름도 여기에서 나왔을 것이다. 옥류폭포(玉流瀑布), 은류폭포(銀流瀑布), 금류폭포(金流瀑布)가 그것인데 옥류폭포는 이미 장사하는 천막과 좌판으로 가득하다. 속상한 내 마음은 아랑곳없이 진달래와 산벚 꽃은 흐드러지게 피어 길손을 맞는다. 30여 분 오르자 시멘트 포장길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돌층계가 나타난다. 돌층계를 다 오를 즈음 길 좌측으로 은류폭포를 설명하는 안내판이 있다. 주등산로와 함께 가는 본계곡에서 가지를 친 좌측 계곡에 은류폭포가 있다. 나무 사이로 100여m 밖에 은류폭포가 보인다. 겨울 빙벽등반 기초 코스로 많은 이들이 도전하는 곳이다. 이곳을 들러 갈 이들은 층계 오르기 전 계곡으로 내려가 좌측 물줄기를 거슬려 올라가면 은류폭포를 감상할 수가 있다.
이제 10여 분 비교적 편한 길을 지나니 좌측으로 큰 폭포가 나타난다. 금류폭포다. 오늘은 이른 봄이라 겨우내 쌓였던 눈이 녹아 옥 같은 물만 졸졸 흘러내린다. 여름날 비라도 내리면 이 폭포는 장관을 이룬다. 이 폭포 위쪽에 내원암(內院庵)이 있다. 길은 폭포 옆으로 가파르게 오르는 층계 길과 우측으로 휘돌아 완만하게 오르는 길이 있다. 각자 그 날의 컨디션에 따라 길을 택하면 된다. 완만하게 오르는 길을 택하면 거의 다 오른 지점에 비구니성민사공덕비(比丘尼性敏師功德碑)가 서 있다. 6.25 이후 폐사가 된 내원암을 중창해 가꾼 비구니 성민스님의 공덕을 기리는 비(碑)다. 여기에서 절로 바로 들어가지 말고 금류폭포 위 너른 바위에서 잠시 숨을 고르자. 계곡물이 졸졸 흐르는데 암반 움푹 들어간 곳에는 옥수(玉水)가 가득 고여 있고 넓은 바위에는 금류동천(金流洞天)이라고 힘찬 해서체 필치로 각자(刻字)해 놓았다. 새긴 시기를 글자 끝에 새겨 놓았는데 흐려서 판독할 수가 없다. 안내판을 보니 ‘道光 丁西五月(도광 정서오월)’이라 쓰고 1873년(헌종 3년)이라고 기록하였다. 도광(道光)이란 청나라 8대 선종(宣宗) 임금의 연호로 선종은 1820~1850년 재위했으니 1873년이 될 수가 없다. 정서(丁西)는 정유(丁酉)의 오자(誤字)일 터이고 선종 재위 기간에 해당하는 정유(丁酉)년을 찾아보니 1837년이다. 몇 글자 되지 않는 안내 글에 두 곳이나 오류가 있으니 너무 무심하다. ‘금류동천’ 유적을 소개하는 안내판에 얼마 되지도 않는 짧은 글에 결정적인 오류가 두 군데나 나타나니 이를 어쩌면 좋나 이제 내원암으로 올라간다. 탑인지 부도인지 구별하기 힘든 무너진 고졸한 석물이 길손을 맞는다. 내원(內院)이란 도솔천(兜率天)에서 석가모니불 입적한 후 56억 칠천만년 뒤 이 땅에 내려 와 중생들을 구원할 메시아(미래불)인 미륵불이 있는 곳이다. 그러니 내원암이란 미래불(미륵불)에 의해 구원을 얻을 사찰인 것이다.
내원암(內院庵)은 언제 누가 세웠는지 분명치는 않다. 아마도 조선조 초기에 세워진 것 같다. 숙종 때 사세를 확장했다 하고 정조 때에는 묘향산에 있던 16나한을 모셔 와 정조가 성사(聖寺)라 불렀다 한다. 사실 내원암과 정조는 인연이 깊다. 이야기가 있는 길 12편(구기동 길)에서 이미 소개했지만, 대구 파계사에서 수도하던 용파화상(龍波和尙)이 내원암으로 들어 와 삼각산 금선사 농산화상(聾山和尙)과 함께 정조의 원자 탄생 기도를 드렸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결과는 농산화상이 입적하여 원자로 환생하니 이 분이 순조임금이라는 것이다. 내원암 경내로 들어서면 두 가지 눈에 띄는 것이 있다. 실물은 볼 수 없으나 경기도 유형문화재 197호로 지정된 괘불(掛佛)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그 하나이다. 이 괘불은 대한제국 시절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로 중앙에 석가모니불과 그 아래 관세음보살, 좌우로는 아난과 가섭을 그렸다. 지난 번 탐방 때 노스님께 볼 수 있느냐 여쭈었더니 큰 행사에만 내어 건다고 한다. 이 번 초파일에는 걸 것이라고 그 때 와서 보라고 하신다. 금년에는 5월 10일이 초파일이니 관심 있는 이들은 이때를 놓치지 마시라. 또 하나는 대웅전과 영산전 사이에 서 있는 마애불(磨崖佛)이다. 약간은 고졸한데 갸름한 얼굴과 오똑한 코, 입고리가 살짝 올라간 작은 입…. 현대의 미인상을 이처럼 잘 표현한 마애불도 없을 것이다. 이 마애불을 만날 때마다 너무 예뻐서 할 수만 있다면 러브레터 한 통씩 보내고 싶다. 비구니 노스님 말씀으로는 6.25에 폐허가 된 절을 중건할 때 땅 속에 묻혀 있던 부처를 찾아 세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들 낳고자 하는 이 나라 어머니들로부터 그 코를 온전히 보전할 수 있었다. 땅에 묻히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다른 부처상처럼 그 코가 갈려 이미 어머니들 뱃속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공식 역사는 한명회를 ‘젊어서 나라 돕고 늙어서 편히 쉬네’라고 썼지만 김시습은 ‘젊어서 나라 망치고, 늙어서 자연 더럽혀’로 고쳐 제작 시기는 정확치 않은데 표현 형식으로 보아 조선조 초기라고도 하고, 고려 때라고도 하고, 조선 말기라고도 하니 분명치는 않다. 스님 말씀으로는 고려 때 작품이라는데 전문가들의 견해가 있으니 조선시대 작품일 것이다. 시기에 관계없이 필자에게는 민초들의 소박한 조각 솜씨가 정겨울 뿐이다. 내원암은 잊을 수 없는 역사 속 인물 한 사람과 깊은 연관이 있다. 그 이름,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금류폭포 안내문에는 매월당과 관련된 글귀가 적혀 있다. 즉 “매월당집(梅月堂集)에 따르면 매월당은 10년간 이곳에 머물렀다 하고, 남용익의 간폭정기(看瀑亭記)에 따르면 옥류폭포 옆 간폭정에서 5리 오르면 김시습 구지(舊址)가 있다”는 내용이니 김시습이 10년간 내원암(근처)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김시습은 그 이름부터가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 논어(論語)의 첫 구절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않은가?)에서 시습(時習)이란 이름을 얻었다. 일찍이 다섯 살 나이에 세종으로부터 신임을 받아 오세신동(五歲神童)이란 찬탄을 받고 20살 전후 삼각산 중흥사에 들어가 공부에 매진했다. 이때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고 단종을 죽음으로 몰았다는 소식을 듣고 책을 덮고 방랑길에 올랐다가 머리를 깎았다.
한 때는 경주 금오산(金鰲山, 남산)에 칩거했으나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올라와 수락산 내원암에 머물렀다. 이 수락산 은거 시기를 매월당 연구가들은 대체로 1472~1480년으로 보고 있다. 이 때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완성했으니 우리 문학사에 빛나는 업적을 이룬 곳이다. 수락산 칩거 기간에 읊었을 그의 시 한 수를 읽어 본다. 水落殘照 (수락의 저녁 햇살) 一點二點落霞外(일점이점낙하외) 한점 두점 지는 노을 밖으로 三个四个孤騖歸(삼개사개고무기) 서너 마리 외로운 따오기 돌아오네 峰高剩見半山影(봉고잉견반산영) 봉이 높아 산허리 그림자 너끈히 보고 水落欲露靑苔磯(수락욕노청태기) 수락은 이끼 낀 바위 드러내려 하네 去雁低回不能度(거안저회불능도) 가는 기러기 낮게 맴돌며 건너지 못하고 寒鴉欲樓還警飛(한아욕루환경비) 겨울가마귀 깃들려다 놀라 다시 난다 天涯極目意何限(천애극목의하한) 하늘은 한없이 넓은데 뜻에 끝이 있나 斂紅倒景搖晴暉(염홍도경요청휘) 붉은 빛 그림자는 밝은 빛에 흔들리네 이렇게 살다간 김시습의 부도(浮屠)는 부여 무량사에 있다. 그는 세조의 왕위 찬탈과 세조 밑에서 권력을 누린 이들을 싫어했다. 그 중에서도 한명회를 싫어했는데 어느 날 압구정(狎鷗亭: 압구정동에 있던 한명회가 세운 정자) 기둥에 걸려 있던 한명회가 지은 주련(柱聯)을 읽고는 고쳐 버렸다고 한다. 한명회 : 靑春扶社稷(청춘부사직) 젊어서는 나라를 돕고 白首臥江湖(백수와강호) 늙어서는 강호에서 편히 쉬네 김시습은 이 시에서 부(扶)를 망(亡)으로, 와(臥)를 오(汚)고쳐서 ‘젊어서는 나라를 망하게 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히네’로 고쳤다고 한다. 이제 수락 정상을 향한다. 길은 가파르다. 500여m 오르니 수락산장에 도착한다. 별 쓸모없이 방치되다시피 한 산장을 다시 수리하는 것 같다. 다시 가파르게 200여m 올라 정상부에 도착한다. 태극기가 휘날린다.
이제 길을 당고개 방향으로 잡는다. 길은 남쪽 주능선을 타야 한다. 철모바위, 코끼리바위, 하강바위, 치마바위…. 화강암이 풍화돼 기묘한 바위 형태를 이루었다. 서울의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은 모두 쥐라기 때 마그마가 뿜어 나와 생성된 화강암 지역이라 한다. 나이는 비슷한데 수락산은 다른 산에 비해 풍화도 심하고 바위가 부서진 왕모래도 많다. 그래서 그런지 실록에 나타난 수락산에선 붕괴 사고와 호환(虎患)이 많다. 세종, 세조, 명종, 인조 때 무너져 내려 인명사고가 났던 기록들이 전한다. 세조 9년에는 녹양목장에 범이 들어 말 4필을 잡아먹으니 범을 몰아 수락산에서 잡은(水落山獲虎)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 아마 수락산에는 호랑이가 창궐했던 것 같다. 불암산-용마산-아차산 구릉에는 고구려가 만든 보루가 20여기나 남아 있는데 이 길을 지나는 등산객들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 지나는 능선은 불암산 → 구릉산 → 망우산 → 용마산 → 아차산으로 이어지는데 이 능선에는 고구려의 방어 기지인 보루가 20여기나 자리하고 있다. 고구려 장수왕은 남하정책을 펴서 한강 유역을 확보했는데 그 방어를 위해 도락산, 불곡산을 비롯해 이 곳 수락지맥 위에 보루(堡壘)를 설치했으니 약 40여기의 보루가 발견되었다. 기회 되면 연천의 호로고루에서 시작하여 고구려의 보루를 잇는 산줄기 답사 길에 오르면 호연지기가 살아날 것 같다. 수락산에도 상계초등학교 뒤 봉우리에 고구려 보루가 있다.
이제 오늘의 답사 마무리를 위해 수암사(水岩寺)로 향한다. 길이 복잡하니 도솔봉 직전에서 곰바위 방향으로 직진해야 한다. 좌로 가면 흥국사 방향으로 덕릉고개를 넘는 길이 되며, 우로 가면 탱크바위를 지나 수락산역으로 가게 된다. 수암사로 직접 가는 길은 암릉 길이어서 위험하니 도암사, 송암사를 지나 갈림길에서 계곡을 끼고 다시 수암사 방향으로 가자. 아름다운 길이다. 그 길 끝에 수암사가 있는데 큰 바위에 용(龍) 암각화가 길손을 기다린다. 군살 하나 없고 매우 힘이 넘치는 용의 모습이다. 어디에도 없는 특이한 암각으로 불법을 수호하고, 중생들을 피안으로 인도하는 반야용선(般若龍船)을 이끌 용이다. 이제 오른 길을 내려 와 동막골에서 버스로 당고개역으로 간다. 교통편 -지하철 4호선 당고개역 1번 출구 → 환승 버스 10, 17, 33, 33-1 → 마당바위 하차 -지하철 6호선 화랑대역 1번 출구 → 환승 버스 1155, 1225 → 청학리 하차 → 걷거나(15분) 버스 환승(10, 33번) → 마당바위 걷기 코스 -마당바위 입구 → 은류폭포 조망지점 → 금류폭포 아래 → 내원암 → 수락산장 → 수락산 정상 → (남쪽 당고개 방향 능선) → 철모바위 / 치마바위 / 코끼리바위 → 도솔봉 → 곰바위 → 도안사 / 송암사 → 수암사 → 동막골 → 당고개역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마애불과 문화유적지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갑니다.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본지 Art In 편집주간)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