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쇄
  • 전송
  • 보관
  • 기사목록

[이종구 음악에세이]영국 음악의 공주가 된 자클린 뒤 프레

“300년래 최고 첼리스트” 평가 받았지만 아쉽게 요절

  •  

cnbnews 제221호 박현준⁄ 2011.05.09 14:18:08

이종구 박사 (이종구심장크리닉 원장) 첼로 연주자 자클린 뒤 프레는 1945년 영국 옥스퍼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회계사 출신으로 회계 잡지의 편집인이었으며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다. 자클린 뒤 프레의 선조는 11세기에 프랑스가 영국을 정복하면서 영국으로 건너온 가문으로, 수세기가 지나도 프랑스 성을 지니고 있었다. 자클린은 영국 BBC로부터 “지난 300년간 영국이 낳은 가장 뛰어난 기악가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극찬을 받으면서 유명해졌다. 그녀는 열여섯 살에 영국이 자랑하는 작곡가 엘가의 ‘첼로 협주곡’으로 데뷔하면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1967년 스물두 살에 신동으로 불렸던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바렌보임(Daniel Barenboim)과 결혼하면서 클라라 슈만과 로버트 슈만 이후 가장 뛰어난 음악인 부부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1972년 다발성경화증이라는 불치병에 걸려 연주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그녀는 마흔두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만다. 자클린의 인생과 음악은 3편의 다큐멘터리로 나와 있는데 매우 감동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자클린의 어머니에 의하면 자클린은 네 살 때 라디오에서 나오는 첼로 소리를 듣고는 “저 소리를 내는 악기를 사 달라”고 졸랐다고 한다. 다섯 살에 런던에 있는 첼로 학교에 들어갔다. 세 살 많은 그녀의 언니 힐러리는 플루트를 배웠다. 자클린이 사망한 뒤 나온 힐러리와 남동생이 쓴 ‘집안의 천재’라는 책에는 “자클린이 힐러리의 남편과 연애를 했다”는 내용이 있었으며, 그 내용이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어렸을 때부터 재능을 인정받은 자클린은 온갖 첼로 콩쿠르에서 우승을 했으며 1960년에는 스위스에서 전설적인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Pablo Carlos Salvador y Defillo)의 마스터 클래스에서 사사했다. 1962년에는 파리에서도 배웠다. 열여덟 살이던 1963년에는 런던에서 BBC 심포니와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연주하면서 하룻밤에 대스타로 떠올랐다. 1965년에는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면서 미국에 데뷔했고, 그 후 베를린 필, 필라델피아 교향악단, 이스라엘 심포니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악단과 협연했다. 유대교로 개종하면서까지 지휘자 바렌보임과 결혼하고 이어 주커만-펄먼 등과 ‘유대인 마피아 5인조’를 결성해 연주하면서 세계적 명성 자클린은 1966년 12월 31일에 바렌보임을 만났는데 이들은 함께 연습하면서 사랑에 빠지고 음악적으로도 환상적인 콤비가 되었다. 이듬해 1967년 6월 자클린은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태교로 개종한 뒤 예루살렘에서 바렌보임과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주빈메타(Zubin Mehta)와 핀커스 주커만(Pinchas Zukerman)이 들러리를 섰는데 유태교의 율법에 의하면 유태인만이 들러리를 설 수 있었지만 주빈메타가 유태인 행세를 해 의식에 참여할 수 있었다. 무사히 결혼식을 마친 자클린과 바렌보임은 1968년 주커만과 함께 3인조를 만들어 수많은 공연을 했다. 나중에는 바이올리니스트 펄먼(Itzhak Perlman)까지 합류해 4중주단을 만들어 슈베르트의 ‘송어(Trout Quintet)’를 연주했다(이 작품은 DVD로 출시되었다). 주빈메타는 더블베이스로 음악을 시작했는데 이 다섯 명에게는 유태인 마피아(Jewish Mafia)라는 별명이 붙었으며 오늘까지도 절친한 친구로서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면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출세한 음악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결혼 후에도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던 자클린은 1971년부터 손가락의 감각을 잃기 시작해 연주가 어려워졌다. 이에 바렌보임은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자클린은 다발성경화증이라는 불치병에 걸렸음을 알게 된다. 이 병은 전신의 모든 근육이 서서히 마비되는 병으로, 진단 후 평균 16년 후에 사망에 이르는 절망적인 병이다. 이런 병을 앓고 있음에도 1973년 자클린은 재기를 시도했지만 허사였고 병마저 악화돼 결국 마흔두 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자클린의 언니 힐러리가 쓴 책에 의하면 1971~1972년 바렌보임이 전 세계를 다니면서 연주에 몰두하자 외로워진 자클린은 언니의 집에 와 살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파리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던 바렌보임은 1980년대 초 러시아 출신의 피아니스트와 동거를 하면서 자클린이 사망하기 전에 두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자클린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이처럼 서로 소원해진 두 사람의 관계 때문에 불안해진 자클린이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언니 힐러리를 찾은 것이다. 그녀의 사후 언니가 내놓은 책에는 자클린과 형부의 불륜이 묘사돼 큰 파문을 일으켰으며, 결국 관련 내용은 ‘힐러리와 재키’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져 힐러리의 남편은 작곡가의 아들로, 지휘자였으며 도시 생활을 포기하고 시골에 사면서 보헤미안처럼 살았다. 또한 천하의 바람둥이였으며 자클린과 불륜은 저지르기도 했다. 이 책에서 힐러리는 신경쇠약에 걸린 자클린에게 정신적 안정감을 주기 위해 남편의 외도를 외면했다고 썼는데, 어쩌면 그때 이미 자클린과 바렌보임의 사이는 멀어진 것 같다. 자클린의 팬들은 이러한 힐러리의 이야기를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힐러리는 “누구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좋은 것은 좋은 대로, 안 좋은 것은 안 좋은 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라고 대답했다. 영국에서는 그 책을 바탕으로 1995년에 ‘힐러리와 재키’라는 영화가 만들어졌으며 이 영화 또한 큰 논란을 빚었다. 자클린을 죽음으로 몰고 간 다발성경화증은 말 그대로 무서운 병이다. 예전에 캐나다에서 필자가 내과 레지던트를 하면서 여러 명의 다발성경화증 환자를 보았다. 이 병은 북유럽의 젊은 여성에게 많이 발병하지만 열대 지방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 병에 걸리면 환자들이 절망감에 빠지기 시작하고 정서적으로 불안해질 수 있다. 내가 근무하던 대학병원의 한 금발 미인 병리기사가 다발성경화증 환자였는데 같이 공부하던 레지던트 사이에서 그녀가 바람둥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아마 결혼 생활도 행복하지 못했던 자클린이 심각한 병에 걸리고 극도로 불안한 상태에서 바람둥이였던 형부의 유혹에 빠지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로 생각된다. 사랑과 음악가로서의 명성, 그리고 병마에 이르기까지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자클린. 그녀의 음악 인생은 짧았지만 당대 최고의 여류 첼리스트가 되어 영국의 자존심을 되살렸다. 또한 영국의 국영 방송사인 BBC는 자클린을 세계적인 음악의 여왕으로 만들면서 오래 전에 죽은 엘가까지 되살려 영국의 위대한 음악가로 재조명하는 데 성공했다.

배너
배너

많이 읽은 기사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