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드윅’을 처음 했을 때가 30대 초반이었는데 지금은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어요.” ‘카리스마의 여왕’ 이영미(37)가 록 뮤지컬 ‘헤드윅(5월 14일 ~ 8월 21일, KT&G 상상아트홀에서 공연)’의 무대로 돌아왔다. 2007년 공연 이후 약 5년 만이다. 그녀는 2005년 ‘헤드윅’ 초연에서 헤드윅의 남편 이츠학 역으로 한국뮤지컬대상 여자 인기상을 거머쥐며 그 인기를 입증했다. “저도 이렇게 오래 쉴 줄은 몰랐어요. 실제로는 2년 정도 쉬었다고 생각했죠. 극장도 바뀌고 같이하는 배우가 바뀌다 보니 기분이 새롭네요. 무엇보다 제가 바뀌었어요. 감성과 생각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거든요.” 이영미는 최근 MBC ‘나는 가수다’(이하 나가수)에서 임재범의 무대 피처링으로 화제를 모은 차지연과 ‘뮤지컬계의 카리스마’를 꽉 잡고 있는 여배우다. ‘헤드윅’을 비롯해 ‘지킬 앤 하이드’ ‘서편제’ ‘시카고’ ‘렌트’ 등 그녀의 출연작에서도 볼 수 있듯이 강렬하고 폭발력이 넘치는 역할은 모두 이영미를 거쳐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영미의 차례가 되면 그녀의 존재감에 압도된 듯 객석은 자연스럽게 조용해진다. 노래가 끝나면 어김없이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온다. 뮤지컬에서 그녀가 가진 파워다. “이츠학은 저와 너무 많이 닮았어요” “‘헤드윅’은 제가 출연하지 않을 때도 매 시즌 보러 왔어요. 작년에 했을 때만 해도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굳이 ‘헤드윅’ 무대에 또 서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이번에 공연을 한다니까 갑자기 하고 싶더라고요. 때마침 (출연 제의) 연락도 왔고요.” ‘헤드윅’은 동독 출신의 실패한 트랜스젠더 록 가수 헤드윅이 그의 남편 이츠학, 록 밴드 앵그리인치와 함께 펼치는 콘서트 형식의 뮤지컬이다. 영화로 먼저 인기를 끈 이 작품은 국내에서 2005년 초연된 뒤 수많은 스타를 배출하며 공연계 스테디셀러로 자리를 잡았다. 헤드윅은 여성스러운 의상과 가발을 쓴 남자 배우가, 이츠학은 허름한 가발과 두건, 의상 차림에 칙칙한 분장으로 얼굴을 가린 여배우가 연기하는 게 이 공연의 특징이다. 극 중 이츠학은 여장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헤드윅을 따라 미국으로 올 수 있었다. 이츠학은 헤드윅에 가려진 ‘불쌍한’ 인물이다. 이츠학 역의 배우는 헤드윅이 무대 중앙을 휘젓고 다니면 그의 보조 역할을 하거나, 구석에 앉아 세상에 관심 없는 듯 한 표정으로 헤드윅의 노래에 백 보컬을 넣는다. 대사는 거의 없다. 특히 이영미가 연기하는 이츠학의 눈빛에서는 질투와 증오, 슬픔이 강렬하게 느껴진다. “실제로도 무대 중앙을 보면서 ‘저 자리는 내가 서야 하는데, 헤드윅의 화장과 가발, 옷도 내게 더 잘 어울리는데, 나는 왜 안 되는 거지?’라고 속으로 생각해요. 또 이츠학을 낮게 몰아세우는 헤드윅에 대한 분노와 질투, 현실에 대한 슬픔도 느끼죠. 그러면서도 헤드윅에게 동병상련과 연민을 느끼기도 합니다. 헤드윅을 떠나려면 얼마든지 떠날 수 있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 같아요. 마치 오래 산 부부처럼요.” 이츠학은 이영미의 닮은꼴이다. 오래 전 가수로 데뷔했지만 가수로는 빛을 보지 못하고 뮤지컬 배우로 이름을 알린 점, 뮤지컬 배우를 하면서 꾸준히 가수로 활동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가요계에 우뚝 서지 못한 점 등은 헤드윅의 그늘에서 노래하는 이츠학의 모습과 비슷하다. 최근 그녀는 자신의 자작곡을 담은 1집 앨범 ‘Love Universe’도 발표했다. 화제성이 없어 금세 묻히긴 했지만 그녀의 노래하고자 하는 욕망은 이 앨범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모든 면에서 이츠학은 20대부터의 제 모습과 닮았어요. ‘헤드윅’ 영화를 봤을 때부터 ‘만일 ‘헤드윅’이 한국에서 뮤지컬로 공연된다면 이츠학은 내꺼다’라고 생각했죠. 저 역시 메인이 되고 싶어 했고, 앨범을 내서 잘 되고 싶었어요. 뮤지컬에서도 항상 톱이 되고 싶었죠. 하지만 인정받지 못한 시절이 꽤 오랫동안 지속됐습니다. 또 성격도 비슷해요. 할 말을 잘 못하고, 겉으로 강해보이지만 실제로는 여리고, 한 번 폭발하면 두 번 다시 보지 않는 냉정함도 이츠학과 닮았죠. 다음 생에는 재능 없이 ‘쭉빵’ 미녀로 태어나고 싶어요(웃음).” 이츠학은 헤드윅이 무대에서 사라질 때면 어김없이 중앙으로 걸어가 헤드윅의 스탠딩 마이크를 잡고 노래한다. 가슴속 응어리를 짧은 시간에 분출해내는 이츠학의 모습에 객석은 숨을 죽인다. 노래가 끝나면 박수칠 틈도 없이 헤드윅이 이츠학을 노려보면서 나타나고, 관객은 이츠학의 편이 된 듯 침묵을 지킨다. “설 무대가 생기면 답답함을 못 느끼는데, 3~4개월 정도 할 일 없이 쉬면 저 역시 노래방에 자주 가서 노래합니다. 술 마시는 거, 사람 만나서 ‘헤헤 호호’ 떠드는 거, 집에서 기타나 피아노 치고 음악 만드는 일이 저를 기분 좋게 해요. 음주가무 없이 어떻게 사나 몰라요(웃음).” “가장 잘 맞는 헤드윅은 송용진·조승우” ‘헤드윅’ 이번 시즌에는 김동완(그룹 신화 멤버), 조정석, 최재웅, 김재욱 네 명의 헤드윅과 이영미, 전혜선, 최우리 세 명의 이츠학이 무대에 번갈아 오른다. 이들 중 이영미가 나이도 뮤지컬 경력도 가장 많다. 그래서일까? 이영미는 ‘헤드윅’ 배우들을 동료가 아니라 연출의 눈으로 보게 된다고 한다. 헤드윅 배우 각자의 매력을 꼽아달라고 했더니 평소에도 생각한 듯 술술 나온다. “조정석 씨는 헤드윅을 가장 정석으로 표현하는 배우예요. 연기와 음악 모두 불안하지 않죠. 정석 씨가 이번 무대에서 가장 신경을 쓰는 부분은 나이를 들어 보이게 하는 거였어요. 워낙 어려보이는 얼굴에다 애교도 많은데 그런 부분을 안 보이려고 노력했죠. 그런 면에서 상당부분 근사치에 올라간 것 같아요. 김재욱 씨는 정말 트랜스젠더 같아요. 그래서 리얼하죠. 재욱 씨를 보면서 헤드윅이 정말로 저런 모습이 아니었을까하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헤드윅을 한 분들 중 가장 예쁜 헤드윅이에요. 그동안 헤드윅 배우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남성호르몬이 강한 사람들이었어요. 그래서 제 마음에는 들지 않았는데 그런 부분을 재욱 씨가 많이 채워줬습니다. 특히 클라이맥스에서 여성적인 감성을 잘 표현해요. 절정에 다다르면서 뒷부분의 감동이 있는 배우입니다. 김동완 씨는 워낙 밝아요. 그래서 지루하지 않죠. 천성이 밝아서 그런지 템포감이 있고 애드리브도 뛰어납니다. 자신감이 있고, 무대를 잘 갖고 노는 배우랄까요? 최재웅 씨는 영화 촬영 중이어서 개인연습을 하고 있어요. 아직 같이 연습해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말하기가 어렵네요.” 그렇다면 이영미가 생각하는 가장 호흡이 잘 맞는 헤드윅 배우는 누구일까? ‘난감한 질문’이라며 한참을 고민한 그녀는 “송용진 씨와는 음악적인 궁합이 잘 맞고, 조승우 씨와는 연기적인 궁합이 잘 맞았던 것 같다”고 답한다. 시원스러운 대답에서 이영미의 호탕한 성격이 엿보였다.
이영미의 솔직한 성격은 ‘헤드윅’의 이지나 연출에 대한 생각에서도 드러난다. 이지나 연출을 존경하는 배우가 상당히 많은데, 옆에서 본 이 연출은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에 그녀는 “이지나 선생님과 성격이 맞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라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선생님은 까다롭고 천재들이 가진 ‘똘기’를 갖고 있어요. 막말도 많이 하거든요. 그런 선생님의 성격을 감내하면서 같이하는 이유는 배울 점이 있고, 그분의 머릿속에서 나오는 생각과 말에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면이 있기 때문일 거예요. 배우를 하면서 연출이란 사람에 대해 느낀 건 성격이 좋고 나랑 잘 통하고 나한테 잘해주는 연출은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좋은 연출은 나를 무대에서 빛나게 해주고, 나를 부끄럽게 만들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연출은 배우보다 나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생각보다 많지 않아서 아쉬워요.” “‘나가수’ 가수들과 노래 실력 겨뤄보고 싶어요” 솔직하고 호탕한 성격 때문에 이영미의 주위에는 늘 사람이 있다. 특히 ‘지킬 앤 하이드’와 ‘헤드윅’에서 호흡하고, 올해 말에 개막하는 대작 뮤지컬 ‘조로’에 함께 출연하는 뮤지컬 톱스타 조승우와의 친분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이영미의 앨범에 조승우가 피처링을 한 사실은 기사화되면서 주목을 끈 바 있다. “제가 유독 남자 배우들과 친하다고요? 아니에요. 여배우와도 친한데 화제성이 있는 사람이 없어서 덜 알려진 거죠. 구원영, 백주희와는 ‘절친(절친한 친구)’이고, 김선영, 정영주, 김영주, 윤공주와도 친한 걸요. 남자 배우도 조승우, 송용진보다는 조정석, 정상훈, 정성화와 더 친해요. 대부분 술을 좋아하는 사람과 친하죠. 정성화 씨와는 작품이 아니라 술을 먹다가 친해졌어요(웃음). 아, 조승우·송용진 씨는 술을 좋아하지 않으니 오해하지 마시고요.” 기자나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는 상상과 시대적인 상황이 맞물리면서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지만, 이영미의 꿈은 원래부터 노래하는 사람이 되는 일이었다고 한다. 뮤지컬 배우로 활동하면서도 곡을 쓰는 일을 멈추지 않은 그녀다. 최근 한 인터뷰에서 이영미가 ‘나가수’에 출연하고 싶다는 발언을 한 일이 기억에 남아 물었다. “출연하고 싶다는 말은 아니었어요. 그 인터뷰에서도 ‘나가수’에 나가고 싶다는 말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싱어로서 그들과 겨뤄보고 싶다는 의미였거든요. 왜 나에게는 그런 곳에 나갈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걸까 하면서 안타까웠단 거죠.” 과거에는 가수에 대한 욕구가 더 강했다는 그녀는 “지금은 노래를 잘하는 것보다 연기를 잘하고 싶은 욕심이 더 많다”면 연기 욕심을 보인다. “달달한 소극장 로맨틱 코미디를 꼭 해보고 싶어요. 저를 아는 사람들은 저의 귀여운 연기를 보고 싶다고 하는데 아무도 제게 출연을 제안하지 않더라고요. 이젠 나이도 들어서 더 힘들어졌어요. 또한 ‘헤드윅’에 나오는 저에 대한 환상을 가진 사람은 싫어할 수도 있고요. 하지만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꼭 하고 싶어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