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연출가들은 이렇게 우리 배우들이 코미디 연기와 마샬아츠(보이기 위한 무술이란 뜻으로 업계에서 통용되는 용어), 애크러배틱을 모두 잘하는 게 신기하다며 놀라워합니다.” 5월 27일 광화문 세실극장에서 개막한 넌버벌 퍼포먼스(이하 넌버벌) ‘비밥’의 전준범(33) 연출은 넌버벌 분야에서 10년이 넘는 경력을 자랑하는 베테랑이다. 그래서 그는 할 말이 많았다. 해외에서 인정받아도 정작 국내에서는 주목받지 못하는 넌버벌의 현실이 답답한 듯했다. ‘넌버벌’은 아무리 좋은 공연을 만들어도 해외에서 수입된 라이선스 공연에 가려 빛을 보기가 어렵다. 여기에 ‘넌버벌은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공연’이라는 인식도 한 몫 했다. 여행 상품에 끼워서 파는 데도 넌버벌 간의 경쟁이 치열해져서 티켓 가격만 터무니없이 낮아져버렸다. 그는 ‘악행의 순환’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비밥’은 국내 넌버벌 계를 주름잡는 스태프와 배우가 만나 만든 작품이다. ‘난타’의 최철기 연출이 총감독을 맡고, ‘점프’의 상임연출 백원길이 코미디 연출을, 그리고 ‘점프’와 ‘브레이크 아웃’을 연출한 ‘젊은 피’ 전준범이 가세했다. 2009년 한식세계화 프로젝트에서 30분짜리 공연 ‘비밥코리아’를 전신으로 하는 ‘비밥’은 60분짜리 공연으로 지난해 영국 에든버러 페스티벌에 참가해 호평을 받았다. ‘비밥’은 비빔밥(Bibimbap)과 비트박스(Beat Box), 비보이(B-Boy)를 줄인 제목으로, 들어가는 모든 재료를 섞어서 맛을 내는 비빔밥처럼 비보잉, 아카펠라, 비트박스, 코미디 연기 등이 미각과 시각, 후각을 자극하는 요리와 함께 한데 어우러지며 관객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비밥’은 재미있는 소재와 배우들의 즐거운 연기와 다채로운 퍼포먼스, 이를 뒷받침하는 세심한 연출이 가미된 신나는 공연이지만, 제작 전부터 “‘난타’를 따라했다” “‘점프’의 연출진이 장사하려고 식상한 넌버벌을 또 내놨다” 등 비난과 견제를 받아야 했다. - 비밥은 과거 연출작 ‘브레이크 아웃’ ‘점프’와 비교해 어떻게 달라졌나? “예전보다 극의 소스와 구성, 템포감이 훨씬 좋아졌다. 이전 작품들은 비보잉이면 비보잉, 마샬아츠면 마샬아츠 등 한 가지 소스가 주는 재미에 한계가 있었는데, ‘비밥’에서는 이들을 섞기 때문에 더 재미있다.” - 관객들 반응은 어떤가? “세 살부터 할아버지, 할머니, 가족, 외국인, 문화계 종사자 등 남녀노소와 계층을 가리지 않고 많이 찾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르신들은 젊은이가 펼치는 퍼포먼스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 공연은 어르신들도 함께 즐길 수 있는 것 같다.” - 식상한 넌버벌이란 지적이 있는데, 이에 대해 반박한다면? “힙합도 종류가 여러 가지인데 일반적으로는 그냥 다 똑같은 힙합으로 들릴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공연도 다른 작품들과 같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이는 퍼포먼스 형식에 제한이 있기 때문이다.” - 특히 ‘난타’와 비슷하다는 지적이 많은데 어째서라고 생각하나? “요리와 부엌을 소재로 해서인 것 같다. 또한 퍼포먼스를 잘 만드는 크리에이터가 모여서 작업한다니까 견제를 많이 하더라. 퍼포먼스 시장 간의 경쟁도 있다.” - 완성하기까지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점프’라는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5~6년이 걸렸는데, ‘비밥’은 그때의 노하우가 있어서인지 3년밖에 안 걸렸다.” - ‘비밥’은 해외에서 먼저 인정받았다. 한국 넌버벌만의 자랑거리를 꼽는다면? “코미디 연기라고 생각한다. ‘점프’가 나오기 전에는 타악에 록 밴드 음악을 MR(반주 음악)로 얹어놓은 공연이 주였다. 해외에서 유명한 블루맨 그룹이나 스텀프 등이 이에 속한다. ‘점프’는 여기에 무술을 소재로 한 데다 드라마도 간단하게 들어 있어서 호평을 받았다. 태양의 서커스단에서 몸을 제일 잘 쓰는 사람들이 놀랄 정도였다.” - 비트박스와 비보잉, 마샬아츠, 아카펠라가 한 무대에서 펼쳐지는 넌버벌은 ‘비밥’이 유일한가? “그렇다. 우리 공연은 비빔밥의 다양함을 담았다. 다른 소스가 섞여있지만 각자의 맛도 나면서 합쳐지면 새로운 시너지를 낸다는 점을 모토로 삼았다. 특히 비빔밥에 비트박스를 가미한 이유는 비빔밥에 대한 외국인 인터뷰를 봤기 때문이다. 외국인들은 비빔밥을 비빌 때 재미있는 데다 섞거나 씹을 때 나오는 소리와 식감, 비빔밥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이 재미있다고 말한다.” - 넌버벌만 고집하는 이유가 있나? “그건 아니다. 나도 10년 동안 넌버벌만 이렇게 많이 할 줄은 몰랐다. 실험적인 작품을 좋아하고 해외공연을 많이 다니다 보니 외국인 연출가와도 교류하면서 넌버벌 공부에 빠져서 그랬나 보다(웃음).” - 넌버벌의 매력은? “새로운 시도, 특히 관객과 소통할 새로운 무대 언어를 만들 수 있다. 사물, 소품, 악기 등 넌버벌에는 앞으로 나올 게 무궁무진하다. 또한 세 살부터 노인까지 즐길 수 있도록 내용이 심플하다.” - ‘비밥’은 세계 각국의 요리 중에 비빔밥이 으뜸임을 강조한다. 그런데 요리라고 해봤자 아시아(중국, 일본)에 치중돼 있다. 서양 요리는 이탈리아가 유일한데, 이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다. “많은 요리를 상연시간(80분) 안에 모두 넣기는 어려웠다. 비빔밥이 스시, 피자, 누들이 나온 뒤에 등장하는 이유는 ‘비빔밥도 스시, 피자, 누들처럼 세계적인 음식’이라고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비빔밥이 우월하다고 말하긴 싫었다. 그저 다양한 재미가 섞인 음식이 비빔밥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비빔밥은 건강하고 유쾌하다. 박수치면서 건강과 순수함을 찾게 될 것이다.” - 넌버벌 배우가 되려면 쉽지 않을 것 같다. 넌버벌 배우에게는 어떤 각오가 있어야한다고 조언하고 싶나? “‘비밥’ 안에서만 본다면 무대와 연기에 대한 꿈과 관심이 있어야 한다. 비트박스나 비보잉을 잘하는 친구들은 그 기술을 무대에서 어떻게 활용할지, 무대 연희로 어떻게 발전시킬지를 고민해야 한다. 또 유쾌한 사람, 순수한 사람이어야 하고,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으면 한다. 여러 면을 종합해 볼 때 ‘비밥’ 배우들은 자신의 한계를 벗어난 아주 훌륭한 사람들이다.” - 요즘 유럽에 한류열풍이 불고 있다. 따지고 보면 ‘비밥’이 먼저 아닌가? “국내에서는 내가 에든버러지에 가장 많이 간 사람일 것이다. 배우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는 작품을 외국에서 사오기만 하지만, 우리는 웨스트엔드와 브로드웨이에서 장기공연을 했다. ‘비밥’도 곧 그렇게 될 거라고 믿는다. 해외 프로모터 연출가들은 이렇게 말하더라. ‘한국에서 우리 공연을 이렇게 많이 사지만, 팔러오는 곳은 너희들밖에 없다’고. 우리 크리에이티브 팀은 최고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런 대접을 받지 못한다. 우리뿐만이 아니라 지방 공연, 극단 공연, 무용, 실험적인 공연, 대학로 코미디 공연 등 훌륭한 작품이 많은데 관객을 만날 기회가 적다. 훌륭한 공연도 금방 사장되곤 한다. 많은 공연은 관객을 만나면서 업그레이드되기 마련인데, 그럴 기회조차 없으니 답답하다.” - 넌버벌 퍼포먼스에 대한 관심이 다른 언어극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우 적은 게 현실이다. “퍼포먼스 극은 관객이 가장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장르라고 생각한다. ‘캣츠’를 보러간 적이 있는데, 직접 돈을 내고 보는 관객이 몇이나 될지 궁금했다. 이들 중에는 ‘캣츠’에 공감을 해서가 아니라 그 유명한 ‘캣츠’를 보니까 박수를 치는 것 같았다. 관객 중 자던 사람이 1/3 이상이더라. 그런데 그랬던 사람들이 공연이 끝나니까 일어나서 박수를 쳤다. 이는 관객의 잘못은 아니다. 공연하는 사람이 관객을 잘못 학습시켰기 때문이다. 진짜 값어치 있고 좋은 예술이 뭔지를 보이는 대로 향유할 수 있게 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해야 하는데, 남들이 좋다고 하는 공연을 무조건 따라가고 그 외의 것들은 이상하게 보는 시각을 만들고 말았다. 거품으로 공연을 보지 말고 편안하게 배우와 즐기고 참여할 수 있는 우리 공연이 지금 시점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