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오는 11월에 초연을 앞둔 록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Next to Normal·이하 넥스트)’은 뮤지컬 음악감독 박칼린이 20년 만에 연기자로 변신하는 작품으로 화제가 되고 있다. 그런데 박칼린에 치우친 관심 때문에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는 여배우가 있다. 우울증을 겪으며 정신적인 아픔과 싸우고 있는 아내이자 엄마인 여주인공 ‘다이애나’ 역으로 박칼린과 더블 캐스팅된 김지현이다. ‘넥스트’는 김지현에게 ‘시카고’ 이후 3년 만에 복귀한 한국 무대다. 김지현은 일본의 대형 극단 시키(四季)의 첫 한국인 배우이자 수석 배우 출신이다. 2006년 극단 시키에서 나온 그녀는 현재 솔로로 일본에서 활동 중이다. 기자가 김지현을 처음 본 무대는 3년 전 ‘시카고’에서였다. 당시 뮤지컬 스타 최정원과 중성적 매력의 ‘밸마’ 역으로 더블 캐스팅돼 무대를 누비는 김지현을 보고 그 이전까지 한국 배우에게서 느낄 수 없는 뛰어난 기량을 봤다. 그녀를 통해 시키가 궁금해지기 시작하고, 강태을, 김준현, 최현주 같은 시키 출신 배우에게도 관심이 생겼다. “박칼린 샘에게 주눅 든 건 사실이지만…” 7월 4일 오후 3시 서울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는 많은 취재진이 모인 가운데 ‘넥스트’의 제작발표회가 열렸다. 평범해 보이는 한 가정의 문제를 들여다보고 희망을 노래한 ‘넥스트’는 2010 퓰리처상, 2009년 토니어워즈 3관왕에 빛나는 브로드웨이 신작 뮤지컬이다. 이날 박칼린, 남경주, 이정열, 최재림, 오소연, 이상민 등 배우들은 ‘넥스트’의 주요 삽입곡을 불렀다. 물론 이날의 스포트라이트는 박칼린의 것이었다. 그런데 ‘So Anyway’라는 단 한 곡만을 남겨뒀을 때 낯선 얼굴의 김지현이 걸어 나왔다. 많은 사람이 ‘이 배우는 누구지?’라는 눈빛으로 경계하는 듯 보였다. 반주가 흐르고 김지현이 목청을 열었다. 감성을 가득 담아 부르는 그녀의 노래에 금세 빨려들었다. 김지현의 무대는 앞에서 여러 배우가 선보인 무대가 단번에 잊힐 만큼 강한 인상을 남겼다. 마지막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그녀의 눈에도 감격의 눈물이 살짝 맺혔다. “오늘 긴장을 조금 한 것 같아요. 오늘 박칼린 샘(김지현은 박칼린을 이렇게 호칭했다)의 인기에 주눅이 안 들었다면 거짓말이겠죠?” 제작발표회가 끝난 뒤 곧바로 분장실에서 만난 김지현은 “박칼린의 포스에 기가 죽지 않았느냐”라는 질문에 이같이 말했다. 일본에서 그녀는 인기 뮤지컬 배우지만 한국에선 무명에 가깝다. 누구든 익숙하지 않은 현실에 맞닥뜨리면 움츠러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내 김지현은 “박칼린 샘에게 가려지긴 하겠지만 그녀 덕에 ‘넥스트’가 대중에게 더 많이 알려진 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현실을 직시하는가 하면 “많은 관객이 저를 보러 오길 바라지만 구걸하진 않겠다. 나는 무대에서 승부하는 스케일이 큰 뮤지컬 배우이기 때문”이라며 자신감을 보인다. 김지현은 시원시원한 연기만큼이나 호탕한 웃음과 성격이 상대를 편안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런가 하면 일에는 열정과 자신감이 넘쳤다. 입술 끝을 살짝 올리며 미소 짓는 그녀의 모습에서 ‘두고 보세요. 내 무대를 보고 나면 당신도 내 매력에 빠지고 말 거예요’라는 말이 텔레파시처럼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 ‘넥스트’의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 어땠나? “다이애나는 조울증인 데다 10대 중반의 아들과 딸이 있는 역할이라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란 걱정이 먼저 들었다. 그러다 일본에 아는 프로듀서와 상담을 했다. 그리고 대본을 읽고 마음이 확 바뀌었다. 현실적인 내용이어서 끝이 안 좋을 줄 알았는데, 슬프게 끝나지 않는 작품이라는 게 마음에 들었다. 내가 이 작품에 관심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인들은 외국에 연락해서 CD와 팸플릿 등을 보내줬다. 음악을 들었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빠져들었다. ‘넥스트’는 관객을 사로잡는 힘이 있는 작품인 것 같다. 본 공연은 아직 보지 못했다. 스케줄 때문에 자신은 없지만 연습이 시작하기 전에는 꼭 해외에 가서 공연을 볼 예정이다.” - ‘시카고’의 음악감독 박칼린과 같은 역할에 더블 캐스팅됐다. 느낌이 새롭겠다. “‘시카고’ 공연 당시 나는 외국 스태프와 접촉이 많고, 박칼린 샘과는 접촉이 많지 않았다. 물론 그녀의 카리스마가 대단했던 기억은 있다. 이후 나는 일본에 있으니까 그녀에 대해서 잘 몰랐다. 나중에 칼린 샘이 스타덤에 올랐다는 소문을 듣게 됐다. 그녀와 더블 캐스팅이어도 나한테 나쁠 건 없다. 나는 배우는 데 욕심이 많다. 그래서 그녀의 음악적인 센스를 배울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다. 또 칼린 샘은 마인드도 독특하다. 그런 부분이 나와 잘 맞을 것 같다.” - 다이애나는 표현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캐릭터 분석은 어떻게 하고 있나? “대본만 봐서 잘은 모르지만, 대본의 구성이 굉장히 재미있고 매력적이다. 다이애나는 정신분열 환자지만 미치광이를 연기할 필요는 없다. 평범하고 정상적으로 보이다가 갑자기 어떤 신에서 이 사람이 정상이 아니라는 (극적) 전환을 많이 보여주는 공연인 것 같다. 다이애나의 미친 감정은 주로 음악적인 요소로 표현한다. 배우가 오버하지 않아도 관객이 계산해서 이해할 수 있는 역할이다.”
- 다이애나와 자신의 닮은 점이 있다면? “많이 닮았다. 특히 극 중 다이애나의 남편 댄과 내 진짜 남편은 정말 비슷하다. 나는 그냥 있는 그대로 행동해도 될 것 같다(웃음). 그리고 예술 하는 사람 대부분이 예민하다. 한 가지에 빠지면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하는 면도 많이 있다. 그래도 성격이 낙천적이어서 좋게 생각하려고 하기 때문에 다이애나처럼 하진 않는다. 그래도 일단 너무 몰입하면 예민한 성격이 더 예민해지는 건 아닐까 우려돼서 출연을 고민하긴 했다. 하지만 포기하기엔 작품이 너무 좋았다.” - 극 중 다이애나가 자살하고 싶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살고 싶지 않을 만큼 인생에서 가장 괴로웠던 순간은 언젠가? “하하. 많이 괴로운 적은 있지만 그래도 죽고 싶을 만큼은 아니었다. 이 작품을 연기하기 위해 가장 힘들었던 순간들을 떠올려봐야겠다.” - 힘들 때 극복하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나? “나는 기도를 한다. 특히 가스펠을 좋아해서 일본에서는 가스펠을 가르치고 있다. 가스펠을 들으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 ‘넥스트’는 록 뮤지컬이다. 평소 록을 좋아하나? “안 좋아한다. 록은 많이 접해보지 않은 장르이기 때문이다. 평소엔 휘트니 휴스턴이나 머라이어 캐리를 좋아한다. 그러다 이번에 ‘넥스트’ 음악을 들으면서 록을 좋아하게 됐다. 록의 세계에 이런 매력이 있구나 싶더라. 록을 잘 모르더라도 음악이 알아서 록 분위기를 만들어주기 때문에 굳이 록 가수처럼 연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배우는 리듬만 살리면 되지 않을까 싶다.” - 2006년 극단 시키에서 독립해서 솔로로 활동 중인데, 우여곡절이 많았을 것 같다. “시키는 굉장히 규모가 큰 극단이지만 배우에겐 나름대로 벽이 있다. 시키 안에 있을 때도 많이 괴로웠다. 배우로서 좀 더 많은 걸 표현하고 싶은데, ‘이 부분은 표현하지 마라’라고 할 때가 꽤 있었다. 솔직히 딱 나오고 싶을 때 나온 거다. 주위 모든 분이 말렸고, 시키 쪽에서도 내가 나간 바로 다음 날 다시 오라고 했지만 마음의 결정을 마친 상태였다. 그만두고 나와서 힘들었지만 얻은 것도 많다. 더 많은 세계를 배우고 있다.” - 일본 엔터테인먼트에서 뮤지컬 배우가 차지하는 입지가 궁금하다. “한국하고 비슷하다. 일본 뮤지컬에도 스타 캐스팅이 있다. 시키는 큰 극단이고 유명한 작품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시키에 있을 때는 많은 분이 작품을 통해 배우를 알게 되는데, 시키 이외의 장소에서는 배우를 보고 작품을 보는 경우가 많다.” - ‘시카고’ 이후 3년 만인데, 한국 뮤지컬의 수준이 달라졌다고 느끼나? “자세하게 느낄 시간적인 여유는 없지만 그런 것 같다. 뮤지컬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져서인지 재능이 있는 배우가 많이 모였더라. 그들이 좋은 스태프를 만나 제 기량을 발휘하길 바란다.” - 일본 극단에서 원하는 배우의 역량과 한국 극단에서 바라는 역량에는 어떤 차이가 있나? “한국은 개성이 강하고, 일본은 개성보다는 전체적인 분위기를 좋게 하고 밸런스를 맞추는 데 심혈을 더 기울인다. 한국적인 개성과 일본적인 화합이 하나가 되면 좋은 작품이 나올 것 같다.” - 한국에서 활동하는 극단 시키 출신의 한국배우가 부쩍 늘고 있는 것 같다. 한국인이기 때문에 가해지는 차등대우 같은 게 있어서 시키를 나오는 건가? “오히려 그 반대다. 한국인이기 때문에 받는 특혜가 있다. 물론 나는 첫 한국인 배우여서 특혜가 없었다. 하지만 나 이후로 들어오는 후배들은 비자 문제, 맨션, 생활까지 많이 베풀어줬다. 시키에서 받는 훈련이 혹독해서 그런지 능력 있는 후배들은 한국에서도 자리를 잡더라. 시키 출신 배우 중 김준현, 강태을, 최현주 등이 한국에서 활약하고 있다. 차지연은 ‘라이온킹’ 한국 공연에서 내가 하차한 역할을 맡았는데 그녀도 승승장구하고 있다.” - ‘넥스트’의 공연은 약 3달 동안이다. 한국에서 생활은 어떻게 하며, 가정은 어떻게 돌볼 생각인가(김지현은 일본에서 한국인 사업가와 결혼했다)? “부모가 용인에 살기 때문에 매일 오가는 건 힘들 것 같아서 맨션을 하나 구해서 지내야 할 것 같다. 가정은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싶다(웃음).” - 한국에서 꼭 출연하고 싶은 작품이 있나? “워낙 많은 작품을 했기 때문에 특별히 하고 싶은 역할은 없다. 하나 꼽는다면 ‘맨 오브 라만차’의 ‘알돈자’ 역할을 해보고 싶다.” - 앞으로 어떤 활동을 펼칠 생각인가? “일본에서 했던 작품에서 쌓은 경험을 한국에서 표현할 수 있다면 많은 분에게 뮤지컬에 대한 매력, 뮤지컬 배우로서의 매력을 보여 드리고 싶다. 나를 통해 배우가 되고 싶다는 분이 많이 생겨서 뮤지컬 장르가 확고하게 안착이 되고 정립되면 좋겠다. 그런 모습으로 꾸준히 발전하고, 노력하는 배우, 뮤지컬 배우다운 배우, 세계관이 큰 배우, 스케일이 있는 배우로 보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