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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준희 교수의 메디컬 40년 에세이 ⑨]의사 신랑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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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31호 박현준⁄ 2011.07.18 14:48:49

설준희 세브란스심혈관병원 심장웰네스센터장 / 운동치료클리닉 과장 내가 학생 시절에는 결혼 문제만큼은 정말로 순수했다. 대부분은 재산도 권력도 통하지 않았고 오직 본인들의 의사가 전부였다. 물론 특별한 제의가 들어왔던 적은 있었다. 내 친구에게 자신의 딸과 결혼을 하면 시청 앞 10층 빌딩을 주겠다는 제의도 있었는데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택했다. 그는 지금 그 부인과 행복하게(자신은 지금의 부인을 만나서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한다) 살고 있다. 우리는 가끔 농담으로 “그때 그 제안을 수락했다면 지금쯤 재벌이 됐을 텐데” 하면서 그 친구를 놀리곤 한다. 그래도 농담일 뿐 우리들 중 그 누구도 그 친구가 그때 일을 후회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또 한 가지, 그 당시에는 개인으로 중매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결혼을 중매하는 전문 회사는 없었다. 의사들 대개가 미팅에서 만나거나 지인의 소개로, 또 가까이서 일하는 여의사나 간호사들과 결혼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나 또한 내과가 전공인 아버님 병원에 다니시던 환자분의 소개로 만나 결혼을 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난관을 헤쳐 나가야 한다. 돈이나 외모만으로는 오래 못 간다고 생각한다. 살아가면서도 다 알았던 것 같지만 상대방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이렇게 세월이 가면서 부부는 서로 비슷해진다고들 하지 않는가. 요사이는 어떤가? 개인적이고, 이기적이고, 즉흥적인 시대로 변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너무 심한 듯하다. 결혼을 조건으로 과다한 혼수를 요구하는 사람, 병원 건물이나 아파트 키를 줘야 의사와 결혼할 수 있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돈다. 금품이나 권력으로 맺어진 결혼이 행복할 수 있을까? 특히 인기과의 의사가 더 인기가 있으며, 중매 회사도 아예 전국의 의사 명단을 가지고 거래를 한다니…. 그러나 나는 금품을 좇아 결혼을 하는 의사가 일부일 것이라고 믿고 싶다. 들리는 소문이(사실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결혼 중매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소개 상대로 나가기만 하고 수당을 받는) 의사들이 있다고 한다. 의사가 무슨 벼슬이라고 생각하고 위세를 떨 량이면 당장 의사 직업을 포기하라고 권하고 싶다. 인생은 길지 않다. 생명을 다루는 직업을 선택했다면 히포크라테스를 따르지는 못할지언정 직업을 팔아 금품을 챙기는 일만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내 밑에서 근무하던 전공의의 결혼식에 간 일이 있었다. 세상은 좁아 신부 집안도 내가 아는 집안이었다. 결혼식장에 가 보니 양 집안의 차이를 금세 느낄 수 있었다. 신랑 옆에는 어머니만 서 있고 하객이 별로 없는데, 신부 측에는 수많은 하객이 줄을 서 있었다. 간혹 들리는 소리. “의사 신랑을 맞게 됐다니 축하해요” 등…. 옛날엔 그래도 의대생들이 결혼만큼은 좋아하는 사람과 했다. 히포크라테스를 따르지 못할망정 의사라는 직업을 팔아 돈만 챙기려면 당장 의사 그만 둬야 한다. 한 일 년쯤 지났을까, 우연히 신부 측 아버지를 만났는데 “딸 잘 있느냐”고 물으니 이혼을 했다는 것이다. 이유가 황당하다. 결혼할 때 신랑이 혼수를 가지고 불만을 표시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시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신부에게 집안이 어떻다느니, 돈도 안 벌어오고 신랑 덕만 보고 살려고 한다고 따지더니 급기야 가구를 집안과 안 맞는다며 다 뜯어내 버렸다는 것이다. 그 후 신랑인 그 전공의 얼굴을 보는 것조차 싫어졌다. 지금이 농경시대인가? 혼수와 지참금을 가지고 시댁에 와 일생을 일하며 먹고 살게? 예과 시절 미팅에서 만난 그녀 눈치없는 의대생은 엇갈리기만 하고… 필자는 중-고등학교에서 운동부에 있었으므로 믿거나 말거나 여학생을 가까이서 대한 일조차 없었다. 의예과에 입학하자 여대생들과 미팅을 하게 됐다. 기대가 되는 것을 넘어서 가슴이 뛸 정도로 흥분이 됐다. 첫 미팅은 시청 앞 다방에서 있었다. 여자 의대생들과의 미팅이었다. 당시는 짝을 찾는 방법이 남자가 가슴에 번호표를 달고, 여학생들은 미리 번호를 정한 후 미팅 장소에서 자신의 번호와 같은 남학생의 자리에 가서 앉는 것이었다. 우리가 미리 다방에 가 앉아 있는데 여학생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체중이 70kg은 나갈 것 같고 얼굴도 우악스럽게 생긴 여학생이 들어서고 있었다. 옆에 있던 내 친구가 나에게 “야, 너하고 딱 맞겠다”라고 하는데 나는 속으로 “웃기고 있네” 하며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여학생이 내 앞에 오더니 “8번이시죠?” 하면서 앉는 것이었다. 어쨌든 처음 마주 앉은 여학생에게 말을 걸지 않고 애매한 성냥만 꺾다가 용기 내서 첫 마디를 던졌다. “음악 좋아하세요?” “네” 하는 대답. 잠시 시간이 흐른 후 이번에는 “영화 좋아하세요?”라고 물었다. 용기를 내서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파트너에게 말을 건넨 것인데, 그 후에 돌아오는 대답이 내게 찬물을 끼얹었다. “이상한 것만 물어 보시네요. 사람치고 음악, 영화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나요?”였다. 나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앞에서 사회를 보는 동료와 노래 부르는 사람들만 쳐다보다가 시간이 거의 되자 재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그 후 수많은 미팅에 가질 않았다.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정말 재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과 2학년 때 친구들이 이번엔 여대 졸업 기념 미팅에 가는데 한 친구가 급한 일로 빠지게 됐으니 나보고 한 번만 참석해 달라는 것이었다. 수영, 테니스가 미팅보다 더 좋아 미팅은 쳐다보지도 않던 나지만 친구들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목표 장소는 수유리였고 미리 다방에서 우리 몇 명과 상대방이 만나 함께 가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1차 만남 장소에 갔는데 한 여학생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잘 됐다고 생각하고 내가 빠지겠다고 하니 여학생 측에서 안 온 사람은 과대표인데 일을 주선하느라 늦는지도 모르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것이었다. 먼저들 떠나고 한 10여분 있으려니까 여학생이 나타났다. 아! 그런데 너무도 지성적이고 예쁘게 보였고 나는 기다리기를 잘 했다고 생각했다. 따라오는 그녀를 또 뿌리친 무뚝뚝 의대생 그리고 며칠 후 토요일 오후 대학교 기숙사에 있다는 그 여학생을 만나러 용기를 내어 기숙사를 향했다. 시간 좀 내달라고 했으나 그날도 다음날도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다음 주일은 어떠냐고 물었지만 그녀는 시험 때문에 시간이 없다고 했다. 내가 일어나 돌아서려니 그녀가 “이왕 오셨으니 나가서 차나 한 잔 하자”고 했는데도 참 눈치도 없던 나는 “됐어요. 시간도 없는데 그럴 필요 없습니다”고 하며 기숙사를 나섰다. 그리고 바로 옆에 있던 학교여서 그랬는지 며칠 후 길을 건너다가 그 여학생과 길 한가운데서 마주쳤다. 그녀는 내가 가는 방향으로 와서 “그간 잘 지냈느냐”고 물었다. 나는 “네”라는 대답과 “잘 가라”는 인사만 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 후 그 여학생 친구에게 전해들은 이야기. 필자가 연애를 해서 장가를 가면 자기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했다나? 나는 질병에 걸리는 것을 포함해 생사도 팔자소관이라는 표현을 쓴 일이 있다. 그런데 일생의 짝을 만나는 것 역시 팔자에 새겨져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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