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랩은 장난삼아서 해본 게 전부인데, 이렇게 랩이 많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뮤지컬 배우 오소연(26)은 요즘 랩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힙합 그룹 DJ. DOC(이하 디오씨)의 음악으로 이뤄진 뮤지컬 ‘스트릿 라이프(Street Life)’에서 여주인공 세희 역을 맡았기 때문이다. 평소 화요비와 린, 머라이어 캐리, 휘트니 휴스턴 같은 발라드 가수를 좋아하고 노래방에서도 발라드를 즐겨 부른다는 오소연이 요즘은 디오씨 음악과 랩의 매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디오씨는 특별히 좋아하는 가수는 아니었어요. 지극히 일반 팬과 같은 수위로, 노래방에 가면 그들의 히트곡을 부르는 정도였죠. 특히 ‘런 투유’와 ‘스트릿 라이프’를 즐겨 불렀어요. 생각만 해도 신이 나죠.” 오소연은 콜백(Call Back) 오디션에서 합격해 ‘스트릿 라이프’에 출연하게 됐다. 처음엔 자신에게 맞는 작품이 아니라는 생각에 오디션을 볼 마음조차 없었다는 그녀는 세희 역할에 랩 부분을 빼고 가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담 없이 오디션을 봤다. “이 작품에 잘 맞는 배우를 찾기가 힘들었던 것 같아요. 여자배우는 더더욱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막상 연습을 시작했는데, 세희의 랩 부분이 점점 많아지는 거예요. 제가 솔로 넘버를 부르는 모습을 본 분들은 ‘랩 신동’이 탄생했다며 추어올려주기도 하고요(웃음).” “디오씨의 악동 이미지, 공연 보면 잊게 될 것” 8월 3일 타임스퀘어 CGV 팝아트홀에서 초연된 ‘스트릿 라이프’는 디오씨의 음악을 모티브로 성재준이 극본과 연출을 맡아 음악을 사랑하는 세 남자의 꿈과 열정을 그려냈다. 디오씨의 이하늘이 음악 슈퍼바이저로 직접 참여한 이 작품에는 ‘DOC와 춤을’ ‘런 투 유’ ‘여름 이야기’ ‘나 이런 사람이야’ 등 디오씨의 노래 가운데 22곡이 세 남자의 이야기에 맞춰 무대를 뜨겁게 달군다. 디오씨의 히트곡 외에 잘 알려지지 않은 곡도 여럿 담았다. “‘스트릿 라이프’ 음악을 듣고 솔직히 굉장히 놀랐어요. 디오씨의 히트곡 대부분 가볍고 대중적이잖아요. 그런데 ‘I Wanna’ 같은 노래를 들으면 ‘디오씨가 힙합을 하는 가수가 맞구나’ ‘정말로 음악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구나’를 깨달아요. 여러분도 공연을 보고 나면 디오씨의 장난꾸러기 같은 악동 이미지는 잊게 될 거예요.” ‘스트릿 라이프’는 주크박스 뮤지컬(스토리보다 춤과 노래에 중점을 둔 뮤지컬)이다. 주크박스 뮤지컬을 처음 경험한다는 오소연은 “다른 주크박스 뮤지컬은 곡 선정에서 선택의 폭이 넓은 반면 이 작품은 한 가수의 노래로 한정돼 있다”며 “한 가수의 음악으로 만들다 보니 음악적인 통일성과 장르가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인 주크박스 뮤지컬보다는 더 큰 감동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스트릿 라이프’의 성공 예감을 묻는 질문에 오소연은 “일단 디오씨 음악의 힘이 크고, 그 음악을 극에 잘 녹여냈다. 극의 전환도 지루할 틈 없이 빠르고,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감동도 분명하다”고 자랑을 늘어놓는다. “남자한테 일방적으로 차인 적 없어” 오소연이 맡은 세희는 고아 출신 가라오케 가수다. 극 중 그룹 스트릿 라이프의 리더이자 래퍼 재민(이재원 분)과는 오랜 연인이다. 이후 가수로 성공한 재민에게 모질게 차이지만 결국엔 꿈인 가수도 되고, 사랑도 찾는 역할이다. “세희는 재민의 성공을 위해 깨끗하게 보내줍니다. 하지만 불쌍한 여잔 아니에요. 타의가 아니라 자기가 결정한 일이거든요. 이 작품의 최종 승자는 세희라고 생각해요.” 비록 세희의 현실은 가라오케 가수지만, 그녀는 마음속으로 ‘여긴 가라오케지만 내겐 가수로서 서는 프로무대’라고 주문을 건다. 오소연은 “가라오케 입장에서 세희를 보면 일에 충실한 직원은 아니다”면서 소리 내어 웃는다. 디오씨도 한 곡 부르면 힘들다고 하는데, 오소연은 무려 5곡의 무대를 소화한다. ‘오늘밤’은 세희의 대표적인 솔로곡으로, 디오씨가 랩을 하고, 가수 아이비가 피처링으로 참여해 여성스러운 느낌이 나는 노래다. “‘오늘밤’의 가사는 남자를 유혹하는 내용이지만 극 중 세희가 재민과 헤어진 다음 가라오케에서 부르는 곡이기 때문에 상황은 굉장히 짠해요. 저는 세희처럼 남자한테 일방적으로 차인 적은 없어서 그 마음을 표현하기가 어렵더군요(웃음).” 오소연은 ‘스트릿 라이프’ 출연 외에 11월에 개막하는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에 출연할 예정이다. 두 작품은 모두 국내 초연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배우에게 흔치 않은 기회인 초연을 1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두 작품이나 소화하는 행운을 얻은 셈이다.
“저는 초연이 너무너무 좋아요. 완전한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거든요. 보통은 초연 배우가 만들어놓은 캐릭터가 유지되는 경우가 많아요. 초연을 하면 제가 표현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을 제 캐릭터에 온전히 담을 수 있어요. 내 몸에 꼭 맞는 옷을 만들 기회죠. 롤 모델이 없기 때문에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인 데다 잘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은 있지만, 그래도 너무 즐거워요.” “뮤지컬 배우가 꿈, 이미 이뤄” 학교에서 끼가 많은 아이로 유명했던 오소연은 12살에 ‘레미제라블’ 내한공연에서 어린 코제트 역으로 뮤지컬 무대에 데뷔했다. 이때의 기억이 자신을 뮤지컬 배우의 길로 이끈 것 같다고 오소연은 말했다. “‘레미제라블’에 출연한 이후 콘서트와 음악회에서 노래할 기회는 꽤 있었어요. 하지만 집도 서울이 아닌 천안이고, 엄마도 일을 해야 했어요. 또 제 의지로 공연하겠다는 생각도 없을 때였죠. 그러던 어느 날, 엄마도 힘들었는지 ‘학업을 마친 뒤에 뮤지컬을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었고, 저도 그냥 다시 평범한 학생으로 돌아갔어요.” 대학(백제예술대학교)에서 뮤지컬을 전공하며 뮤지컬에 대한 한결 같은 사랑을 지켜온 그녀도 중학생 때는 치과의사가 되기를 꿈꾼 적이 있다. 단순히 돈을 많이 벌 것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치과의사가 됐다면 어땠을까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다”는 오소연은 “진로를 정한 건 대학에 들어갈 무렵이었다”며 “그 전까진 뮤지컬 배우가 되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고, 되겠다는 욕심도 별로 없었다. 평범한 생활에도 그럭저럭 만족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스트릿 라이프’에는 모든 것을 잃었어도 음악만을 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내일을 꿈꾼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꿈이 있느냐고 묻자 오소연은 “뮤지컬 배우가 꿈이었기 때문에 꿈을 벌써 이룬 셈”이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가 하면 그녀는 자신의 출연작인 ‘엣지스’ 대사(꿈을 이루니까 어느 순간 허무한 거예요)를 말하면서 “명사형으로 뭐가 되겠다, 어떤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은 이제 없다. 지금은 ‘이런 인간형이 되어야 겠다’ ‘어떤 마음을 먹고 어떤 식으로 해서 살아가자’ 등 꿈이 모호해졌다”고 말했다. “시련 닥쳐도 뮤지컬은 포기 안 해” 일찍 꿈을 이룬 그녀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작은 키(159cm)와 동안 외모 때문에 오디션에서 수차례 떨어졌기 때문이다. 주어진 역할도 어린 아이, 동화 속 인물, 비현실적인 이미지 등으로 한정됐다. “그런 류의 연기를 하다 보니 어느 순간에는 딜레마에 빠지기도 하고, 해가 지날수록 ‘내가 어린 나이는 아닌데, 이미지가 이대로 굳어지는 건 아닐까’하는 걱정도 되더라고요. 심지어는 도전해보고 싶은 역할이 있어도 스스로 내쳐버리게 되는 거예요. 마음이 아팠죠.” 그럼에도 뮤지컬을 포기하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는 그녀는 “이미지를 조금씩 바꿔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미지 변신을 위해 도전한 작품이 바로 ‘엣지스’”라고 말하면서 밝은 외모만큼 긍정적인 사고를 드러냈다. “어느 날 김민정 연출이 제게 ‘어른이 됐다’ ‘여자 같다’는 이야길 해줬어요. 그 말을 들으니 나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는 믿음이 생기더라고요. 시간이 흐르면 나도 나이를 먹을 거고, 관객도 제게서 마냥 어린 이미지만을 보진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게 없는 걸 굳이 억지로 꺼내서 노력할 필요는 없겠더라고요. 그러고 나서 보니 연령대가 자연스럽게 올라가더군요.” 이처럼 뮤지컬 배우로서 자부심이 대단한 오소연도 뮤지컬 연기를 하면서 회의를 느낄 때가 있다. 반복적인 무대 연기는 배우를 매너리즘에 빠트리기 쉽기 때문이다. 그녀는 “뮤지컬 외에 스크린 연기에도 도전하고 싶다”며 “최고의 감정을 화면에 담은 영상이 오랫동안 유지되는 것은 뮤지컬과 다른 영화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뮤지컬은 내 마음과 행동을 극대화해야 할 의무가 있는 반면, 스크린은 눈동자의 떨림 하나로도 감정을 전달할 수 있어서 좋아요. 로맨틱 코미디와 사극을 꼭 하고 싶은데, 잘할 수 있겠죠(웃음)?” 오소연과의 인터뷰는 강원도 펜션 매몰사고, 우면산 산사태 등 집중호우 피해로 전국이 떠들썩한 날에 이뤄졌다. 오소연은 이날 지각한 기자에게 여러 말 대신 환한 미소를 보여줬다. 인터뷰가 끝난 뒤에도 그녀는 곧바로 자리를 뜨지 않았다. 인터뷰 때보다 더 즐거운 수다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