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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준희 교수의 메디컬 40년 에세이]평생을 괴롭힌 영어

듣고 또 듣고 용감하게 말하니 말문이 트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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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35호 박현준⁄ 2011.08.16 11:43:17

설준희 세브란스심혈관병원 심장웰네스센터장 / 운동치료클리닉 과장 고등학교 1학년까지 농구를 하다가 그만뒀다. 당시 연세대학교 체육부장이시고 농구계의 대부이신 이성구 선생님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공부는 마치 고입을 준비하는 학생처럼 중학교 3학년 과정부터 시작해야 했다.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말에 모 고등학교 입학시험까지 보았지만 떨어졌다. 입학하기 위한 건 아니었고 나를 테스트하기 위함이었지만…. 어쨌든 재수 끝에 재수가 좋아 연세대학교 의대에 합격했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 기초가 없이 입시공부만 했던 나는 기초과학 과목과 영어 능력이 엄청나게 모자랐다. 주로 원서로 공부하는 의대에서 보통 다른 친구가 10장을 읽을 때 나는 2장 정도 읽는 편이었다. 몇 번이나 학교를 그만두려고 생각했을까. 재시험이란 재시험은 다 보고, 미국 의사시험 영어 부분도 낙제였다. 졸업할 당시 내 체중이 68kg(키 180cm)이었으니…. 졸업 후 바로 군대에 가자 20일 만에 체중이 80kg으로 늘었다. 역시 운동 체질이었다. 1981년 일본에 약 1년간 연수를 갔다. 일본어를 하나도 공부하지 않고 갑자기 가게 됐는데 한국에서 가져간 회화책과 일본 TV를 보니까 5개월쯤 지났을 때부터 일본어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미국에서 온 사람들은 1년이 넘었어도 그 수준이 초보 단계를 넘지 못하고 있었다. 이유는 어순 때문이었다. 영어의 경우도 어순이 같은 스페인 사람들은 쉽게 터득한다. 1984년 미국 보스턴에서 소아 심장학을 연수했다. 연수 기간 동안 변화가 있었다면 미국인이 말을 걸 때 두려움이 없어진 정도이지, 영어 실력 자체는 크게 늘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영어 회화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7년 전 운동치료클리닉을 맡으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일상 회화가 통하지 않으면 공부가 불가능한 상황…. 처음 중학교 3학년 영어 교과서를 그대로 암기했다. 다음은 영화 보기. 미국 드라마 비디오, 즉 ‘컴뱃’ ‘맥가이버’ ‘형사 콜롬보’ 등을 무조건 보고 들었다. 그때부터 시작해 지금 내가 보유하고 있는 DVD가 3000장이나 되니…. 한 2년 지나자 들리기 시작했다. 이어서 뉴스 공부, 즉 CNN에 도전했다. 미국 산다고 무조건 영어를 잘하게 되지는 않는다. 드라마-영화를 보고 또 보고, 수집한 DVD가 3천장 정도나 되니 어느덧 귀와 입이 트이고 겁 없어져 미국에 있으면서 한 대학병원을 방문했다가 서울에서 연수차 와 있는 젊은 교수를 만났다. 그의 지도교수에게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으니 좀 자상하게 대해주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미국 의사 교수 왈 “의학에 관계된 말은 조금 알아듣는데 그 외의 말은 전혀 못 알아듣는 것 같고, 말을 거의 안 하니 어떻게 하면 좋느냐”는 하소연이었다. 어떤 의학자들은 우리말을 중요시 한다고 우리말로만 의학을 강의하는 경우를 봤다. 우리말을 사용해야 한다는 데는 나도 적극 찬성이다. 그러나 우리말로만 가르친다면 영어로 된 책을 읽는 데 많은 불편이 따른다. 영어 때문에 의대 시절 고생했던 나지만 세계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말과 영어를 함께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이제 국제화 시대다. 외국의 환자들이 한국에 치료받으러 올 정도로 우리 의학은 발전했다. 이들과 자유롭게 대화가 되어야 의사가 충분히 치료할 수 있다. 말없이 약이나 메스로만 치료하는 것이 의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어를 어려서부터 배운다고 우리말을 버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영어권 나라에 가서 연수를 받아야만 잘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잘못하면 생소한 문화에 적응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국 교재로도 어학 공부는 충분하다고 확신한다. 우리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의학계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도 국제공용어가 된 영어의 습득은 필수라고 본다. 의대생 절반이 미국으로 이민갔는데… 나는 1973년에 의과 대학을 졸업했는데 이때는 우리 의학계가 변화하는 전환기이기도 했다. 의사 부족 현상으로 미국의 외국 의사들을 받아들이던 정책이 바뀐 시점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동기 졸업생 70여 명 중 30여 명이 미국으로 이민의 길을 떠났지만, 선배들의 경우는 보통 절반 이상이 미국을 삶의 정착지로 택했었다. 따라서 우리 때만 해도 한국의 의사 국가시험은 모두 통과하는 것으로 보고 미국 의사 시험 준비에 열중했었다. 미국으로 줄지어 떠난 이유는 그 당시만 해도 삶의 질에 미국과 한국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졸업한 지 10년이 지나 내가 교수직을 받고 미국에 연수를 갔을 때 미국에 사는 동기들이 뉴욕 공항으로 마중 나왔다. 그때 처음 타본 캐딜락, 벤츠 같은 고급 차들, 그리고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숲속의 저택 등 나를 놀라게 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이 쉽게 부유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선 미국은 그들이 처음 도착했을 때 쉽게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던 곳이 아니었다. 어떤 친구는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묵을 곳도 없어 뉴욕의 센트럴 공원에서 벤치에 신문지를 깔고 잠을 자는데 자신의 신세가 처량해 눈물이 나더라는 것이다. 취직이 된 뒤에도 영어가 잘 안 들려 병원 안에서 찾는 전화가 오면 잠깐 기다리라고 해 놓고는 단숨에 뛰어가곤 했다고 한 친구는 말했다. 한번은 간호사가 전화를 해와 단숨에 10여 층을 달려서 내려갔다고 한다. 그랬더니 간호사 왈 “왜 여기까지 왔느냐. 난 그저 이제 할 일이 없으니 잠이나 한숨 자 두라고 말하려 전화했다”고 말하더란다. 한국에서 대학까지 나온 사람이 미국 사회에 적응-흡수되는 일은 보통 힘든 게 아니다. 그러다보니 고생도 하고, 다시 돌아오기도 하고 미국 사회의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미국에 간 의사 모두가 잘 된 것도 아니다. 어렵게 생활하며 살아가는 의사들도 적지 않다. 또 외로움 탓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의사들도 많다. 특히 1990년대 들어서 한국 경제가 발달하면서 귀국 의사들이 많아지고 있다. 미국이 아직까지 한국보다 생활의 질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 생활은 한국인 의사들에게 그다지 녹록치가 않다. 의사라는 신분 덕분에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대접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사회에 동화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종 차별도 있지만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한국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문화-사회적으로 미국 사회에 흡수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제는 미국으로 이민 가는 의사들이 거의 없다. 미국에 가는 일이 힘들기도 하지만 간다고 해서 놀랄만한 혜택이 기다리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내가 미국에 있을 때 지도교수가 “한 4년 정식으로 자기 밑에서 일하라”고 제의한 적이 있다. 지역 의사 면허를 주고 4년이 지나면 대학병원 교수직도 보장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때의 결정이 나의 일생을 좌우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한국에서 살아야 하는 팔자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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