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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구 음악 에세이]독일의 자존심을 살린 푸르트벵글러와 칼 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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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36호 박현준⁄ 2011.08.22 10:40:34

이종구 박사 (이종구심장크리닉 원장) 세계 1~2위를 다투는 베를린 필하모닉은 1882년 54명의 음악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1887년부터 1892년까지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휘자 중의 한 명으로 손꼽히는 한스폰 뵐로우가 지휘를 맡았으며 그의 뒤를 이어 아더 니키쉬,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카라얀, 아바도 등 세계 최고 지휘자들이 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였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매년 여름 베를린에서 발트뷔네 페스티벌을 개최하는데, 이 페스티벌은 숲속의 야외 공연장에서 열린다. 나무와 풀벌레 소리와 함께 세계 최고의 음악을 들으면서 색다른 여름을 보낼 수 있다. 이 공연은 모두 DVD로 제작되었는데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지휘자들이 초대된다. 베를린 필의 또 하나의 행사는 유럽의 문화유적지를 찾아다니면서 하는 유러피언 콘서트이다. 이 공연 역시 DVD로 제작되어 판매되고 있다. 2009년 여름에는 래틀의 지휘로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 스트라빈스키의 ‘러시아의 밤’이 연주되었다. 베를린 필의 전설적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그는 히틀러의 심부름꾼이었나? 아니면 독일음악의 사수였나? 푸르트벵글러는 두 번에 걸쳐 24년간이나 베를린 필을 지휘한 20세기 전반의 가장 유명한 지휘자 중 한 사람이다. 그에 앞서 한스 폰 뵐로우는 베를린 필을 1887년부터 1892년에 지휘하였는데 뛰어난 피아니스트였지만 전문 지휘자가 되어 ‘지휘의 아버지’라 불리는 거장이다. 차이코프스키는 당시 러시아 최고의 피아니스트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에게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초연을 의뢰했으나 연주 불가능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이후 1875년 푸르트벵글러는 미국 보스턴에서 차이코프스키의 지휘로 이곡을 연주해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인정받은 행운을 맛본다. 하지만 리스트의 딸인 젊은 부인 코지마를 자신의 스승 바그너에게 빼앗기는 불운을 겪기도 한다. 뵐로우가 베를린 필을 사임한 후에는 헝가리 출신의 전설적 지휘자 아서 니키쉬가 1895년부터 1922년까지 베를린 필을 지휘하였다. 니키쉬가 사망하자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푸르트벵글러가 이어받아 1922년부터 1945년까지 베를린 필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푸르트벵글러는 1886년 베를린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부친은 유명한 고고학 교수였고 어머니는 미술가였다. 그는 처음에는 작곡가로 출발했지만 작곡가로서 성공하기 힘들어지자 지휘자가 되어 독일의 거의 모든 유명 오케스트라를 두루 지휘하다 1922년에 베를린 필의 음악 감독이 되었다. 그 후 독일의 가장 중요한 페스티벌인 잘츠부르크와 바이로이트의 음악 감독이 되어 독일의 저명한 음악인이 되었다. 그는 독일음악의 거장인 베토벤, 브람스, 브루크너의 음악을 좋아하고 연주와 녹음을 많이 했지만 현대 음악에도 높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독일 현대 음악의 작곡가 힌데만의 오페라를 공연하려고 했지만 나치 정부는 힌데만의 음악을 퇴폐적이라 규정하고 금지시켰다. 1934년에 그의 음악을 연주한 후 베를린 국립 오페라에서 해고당했다. 당시 푸르트벵글러는 나치 정부에 대해 노골적으로 거부감을 표출하고 있었지만 망명을 택하지는 않았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계속 베를린 필을 지휘하였다. 1936년에 뉴욕 필의 지휘자인 토스카니니가 사임하면서 차기 지휘가로 푸르트벵글러를 후임으로 추천하였다. 푸르트벵글러는 토스카니니가 악보에만 충실하다는 이유로 그를 싫어했으며 또한 ‘박자 맞추기 지휘자’라고 평가절하 하였다. 토스카니니 좀처럼 다른 지휘자를 호평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과 평소 푸르트벵글러가 토스카니니를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푸르트벵글러를 자신의 후임지휘자로 추천한 것은 토스카니니가 그를 얼마나 존경했는지를 알려준다. 그러나 미국에서 푸르트벵글러를 친 나치 성향으로 비판했다. 때문에 푸르트벵글러는 “음악과 정치는 분리되어야하며 그런 날이 올 때까지 나는 미국으로 갈 의사가 없다”는 내용의 편지를 뉴욕 필로 보냈다. 히틀러의 군대가 파리를 점령하자 푸르트벵글러는 베를린 필을 이끌고 파리에 가서 연주를 하였으며 히틀러의 생일에도 히틀러와 나치 간부들이 있는 자리에서 베토벤 ‘심포니9번’을 연주하고 무기 공장 직원과 군인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열심히 연주를 다녔다. 이에 대해 유태인 피아니스트 호로비츠와 루빈스타인은 푸르트벵글러가 히틀러의 심부름꾼이라 평하기도 했다. 20세기 초반의 가장 유명한 지휘자 토스카니니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심하게 다루는 폭군적인 지휘자로 유명하였으며 그의 지휘는 악보에 가장 충실한 ‘리터라리(Literary)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푸르트벵글러는 서정적이고 매혹적인 스타일로 유명했으며 유명 피아니스트 지휘자인 크리스토프 아이젠바흐는 푸르트벵글러가 단원들을 황홀한 무아지경에 빠뜨리게 한다며 호평하기도 했다. 비첨과 토스카니니가 ‘지휘대 위의 폭군’이었다면 푸르트벵글러는 ‘지휘대의 서정적인 선군’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푸르트벵글러의 부인은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그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 원동력이 되어 평생 음악을 하였다고 진술하였다. 결과적으로 히틀러는 푸르트벵글러의 능력과 인기를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했으며 푸르트벵글러는 독일의 히틀러 통치와 제2차 세계대전의 비운 중에도 독일 음악이 쇠퇴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푸르트벵글러는 음악은 정치와 무관하다는 주장으로 히틀러에 항의하여 망명을 택하거나 음악을 중단하지는 않았으며 누이 좋고 매부 좋은 타협의 길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오스트리아의 가장 유명한 지휘자 칼 뵘 20세기를 대표하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지휘자는 카라얀과 칼 뵘이다. 그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법학을 공부했으나 나중에 그라즈 음악원에서 음악을 공부했으며 1921년에 바바리아 국립 오페라에서 말러의 제자인 브루노 발터의 보조 지휘자가 되었다. 담스타트와 함께 부르크에서 부지휘자가 되었다가 1934년에 드레즈덴 오페라의 수석 지휘자가 되었으며 1943년에는 비엔나 국립 오페라의 수석 지휘자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카라얀이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지휘자가 되었지만 오스트리아에서는 뵘이 가장 권위 있는 지휘자가 되었다. 그는 비엔나 필과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도 최고의 지휘자가 되었으며 드레즈덴과 비엔나 구립 오페라에서도 계속 지휘를 하였다. 뵘은 1975년에 뉴욕 메트로폴리탄에 데뷔했는데 오스트리아 출신의 루돌프 빙이 사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메트로폴리탄에서 총262회나 지휘를 하였다. 그리고 1966년과 1967년에는 바이로이트에서 바그너의 ‘링 사이클’을 지휘하였다. 일흔다섯 살이던 1973년에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LSO)의 객원 지휘자가 되어 잘츠부르크에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였으며 그가 사망할 때까지 LSO의 회장이라는 직위를 받았다. 1960년대에 그는 베를린 필과 모차르트의 ‘심포니 사이클’을 녹음하여 모차르트의 전문가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1971년에는 비엔나 필하모니와 베토벤 심포니 전부를 녹음했다. 그리고 알반 베르크의 오페라 보체크와 루루를 유명하게 만드는 데도 공을 세웠다. 1964년 그는 오스트리아의 총 음악감독이 되었다. 대부분이 오스트리아 사람들이 그렇듯이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했을 때 뵘은 히틀러를 환영했다고 하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망명하지 않고 독일에서 계속 연주를 하였다. 그러나 그는 나치가 싫어하는 현대적 음악인과 감독들과도 일을 했으며 예술적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는 평가도 받았다. 전쟁이 끝나자 연합군은 뵘에게도 2년간의 공연 중지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칼 뵘은 카라얀과 더불어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 음악의 전통을 이어갔으며 전후 패전국 독일의 자존심을 살리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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