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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이야기가 있는 길 -26] 경수사(景水寺)

불암산 둘레길은 18km로 구성되어 있는 만만치 않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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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37호 박현준⁄ 2011.08.29 10:53:48

이한성 동국대 교수 지하철 4호선 당고개역은 생각보다 아주 가깝게 도착한다. 종점이라는 생각이 마음의 거리를 멀게 하기 때문이다. 1번 출구를 빠져 나오면 건널목이 있다. 비교적 한산하기에 마음도 한산해진다. 건널목을 건너면 좌측으로 버스정류장이 있다. 덕릉(德陵)고개 넘어 수락산 뒤를 돌아 청학동 방향으로 가는 버스 노선이 많은 곳이다. 이 곳을 지나 잠시 나아가면 우측으로 뻗어나간 대로, 당고개로와 만난다. 이 길을 따라 우향우. 약 1km 나아가면 비스듬히 고개마루를 넘게 되는데 길 좌측으로 ‘당고개유래비(堂고개由來碑)’가 보인다. 이 고개에 서낭당이 있었고 서낭제를 지냈다는 내용을 적었다. 서울지명설명 자료에서 당고개(堂峴)를 찾아보니 더 자세한 유래가 기록되어 있다. 미륵당(彌勒堂), 또는 서낭당이 있던 곳이라서 당고개가 되었다 한다. 사도세자를 모시던 궁인(宮人) 이씨가 있었는데 사도세자가 죽음을 맞자 식음을 전폐했다고 한다. 급기야는 가사상태(假死狀態)에 이르게 되어 내의원에 속해 있던 봉사 한 사람이 시체나 다름없는 이 궁인을 자신의 집이 있는 노원(蘆原: 현재 노원구는 이 지역 옛이름에서 비롯한 것임)으로 데려 와 보살펴 소생했다는 것이다. 이 봉사에게는 어린 남매 두 조카가 있었는데 이 어린 조카도 궁인 이씨를 어머니처럼 모셔 효성을 다했다 한다. 하루는 이 궁인이 지금의 당고개 아래에서 불한당에게 겁탈을 당할 위기에 처했는데 이 때 홀연히 사도세자가 나타나 궁인을 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사람들이 궁인을 찾으러 달려 가 보니 미륵불이 안고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고개에 미륵불을 세워 제(祭)를 지내게 되었고, 고개마루에 돌도 쌓아 가면서 서낭님도 모셨기에 서당당이 되었다고 한다. 나라에서는 효성스런 조카 남매의 효(孝)를 칭송하여 정문(旌門)도 세워 주었다 하는데 경복궁 중건 당시에 건축자재로 쓰려고 철거했다고 한다. 근래까지 상원(上元: 정월대보름)에 서낭제가 지내졌는데 그 후 당고개 공원 안에 있는 덕암정 아래에서 음력 4월에 제를 지냈다고 한다.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미륵블(彌勒佛)은 불교에서 56억 7000만년 뒤 이 땅에 내려 와 중생을 구해 줄 내세(來世)의 부처님인데, 이 땅에서는 조선 중기 이후 마을을 지켜 주고 민초(民草)들의 고단한 삶을 벗어나게 해 줄 이 땅의 메시아가 되었다. 불교적 의미는 퇴색하고 민중 신앙의 대상이 되어 이름도 ‘미륵님’이 되었다. ‘서낭님’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송(宋)나라에는 성지(城池: 성의 해자-성을 둘러친 연못)를 지키는 神이 성황신(城隍神)인데 이 신이 서낭님이 되었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조선무속연구’라는 글에서 “산왕(山王) -> 선왕 -> 서낭”이 되었다고도 한다. 필자도 산왕(山王)이 서낭으로 바뀐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사람 중에 하나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는 산골자기에 가면 아직도 ‘산왕대신(山王大神)을 새겨 놓은 바위나 비석을 많이 만난다. 옛 지리서에 나타난 국가기관에서 제를 지내던 성황당은 외국에서 수입한 성황(城隍)일 수 있어도 민초들이 넘던 고개길의 서낭님은 이 땅의 산신(山神)의 또다른 모습이 아니었을까? 보부상(褓負商)과 선질꾼들이 넘던 고개마다 지켜 보시던 그 분, 탈없이 고개 넘게 해 주세요 서낭님.

근처 교회에서 나온 여신도들이 유래비 정자에서 호박전, 부추전을 지지며 한 장 드시고 가라 한다. 길 잃은 양을 인도하러 나온 것이다. ‘오늘 나는 마애불과 기도터를 보러 나선 사람인데, 이런 사탄이 한 장 먹어도 되느냐’고 너스레를 떨니 ‘다 주님의 자식’이라면서 크게 한 장 붙여 주신다. 서낭님 대신 자매님들의 가피를 입고 길을 간다. 200여m 내려 가면 좌측으로 ‘덕암초등학교’를 알리는 길 안내판이 있다. 다듬어졌으나 휘어진 골목길로 접어든다. 좌로는 불암현대 아파트가 있고 우로는 덕암초등학교가 있다. 덕암초등학교가 끝나는 뒷담 지나자 경수사, 천보사을 알리는 표지판이 우측에 붙어 있다. 이 길로 접어들면 이제는 길을 놓칠 염려는 없다. ‘불암산자연공원’이 시작된다. 아토피를 줄이는 생태학교도 열리는 곳이다. ‘불암산 둘레길’을 알리는 표지판도 붙어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불암산 둘레길은 18km로 구성되어 있는 만만치 않은 길이다. 불암산 정상을 포함하여 북서쪽 10km를 도는 하루길과 삼육대 주변을 도는 남동쪽 8km 나절길이 있다. 준족이라면 하루 반나절 길을 하루에도 걸을 수 있으니 찬바람 나는 날 배낭을 매어 봄직하다. 공원길을 따라 잠시 들어가면 경수사, 천보사로 오르는 시멘트 포장길을 만난다. 우측으로는 배드민트장 천막이 보인다. 배드민트장 앞에는 시원한 상계약수가 있다. 이곳에서 우측 숲 아래쪽 100m 되는 지점 자연암석에는 선각마애불(線刻磨崖佛)이 새겨져 있고 그 옆으로는 산왕대신(山王大神) 비석이 서 있다. 부처의 모습은 서방정토를 지키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죽은 영가(靈駕: 영혼)을 맞이하러 나오는 내영도(來迎圖)의 모습인데 손에는 약사불(藥師佛)의 약함을 들고 계시니 어느 부처의 모습인지 잘 알 수가 없다. 짐짓 장난을 걸어 본다. Who are You? (뉘시옵니까?) 답이 없으시다. 이 곳 상계약수, 용천약수 골자기는 오래 전부터 무속신앙을 따르는 이들의 기도처가 많았다. 아마도 이 선각마애불도 이 분들의 정성으로 모신 것이리라. 경수사(景水寺)로 발길을 옮긴다. 가람 좌측 골자기에는 불암산에서 가장 큰 폭포가 있다. 비라도 오는 날에는 장관을 이룬다. 또한 겨울이 오면 서울에서 제일 가까운 빙벽등반 코스로도 인기가 있는 곳이다. 절 연혁은 알 수가 없는데 규모에 비해서 한 뼘 되는 전각들이 많다.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을 비롯하여 칠성님 산신님 독성님을 모신 삼성각, 약사여래를 모신 만월전, 미륵불을 모신 미륵전, 용을 모신 용신각을 비롯하여 대웅전 옆 자연석에 마애불(磨崖佛)을 모셨다. 어느 부처님인지 알 수 없어 보살님께 여쭈었더니 아미타불이라 한다. 아무리 보아도 아미타불임을 알아 볼 수 없는데 도교적인 신선 같기도 하고 보살 같기도 하고, 잘 알 수가 없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골자기가 본래 기도터가 많았던 곳이라 민속신앙과 결합된 듯하다. 천보사에 가면 그 곳에는 산신이 크게 모셔져 있다. 민간신앙과 불교의 경계를 크게 구분하지 않는 듯하다. 이제 불암산 정상을 향해 길을 오른다. 산은 깨끗하고 비가 많았던 날이라서 골자기에 계곡수도 풍부하다. 불암산을 오르다 보면 첫 느낌부터 깨끗하다는 것이다. 수락산과는 달리 같은 쥐라기의 화강암이라고는 하지만 이 곳 화강암은 젊음이 넘치는 싱싱함을 준다. 비록 수량은 많지 않아도 그 화강암 위를 흐르는 골자기 물도 수정처럼 맑다. 30여 분 오르니 이윽고 폭포수 약수터에 도착한다. 물이 나오는 샘도 여럿 있고, 이곳을 사용하는 이들이 깨끗이 가꾸어 놓아 언제 오더라도 상쾌함을 잃지 않게 해 주는 곳이다. 이 위로는 물이 귀하니 물도 충분히 마시고 페트병에도 그득 담는다. 이정표가 서 있는데 불암산 정상까지는 1.2km를 알리고 있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능선길로 접어든다. 표지판에는 갈림길 이정표가 있는데 덕릉고개·수락산방향, 폭포약수터, 불암산 정상을 삼갈래로 표시하였다. 많은 이들이 다니는 길이라서 길 잃을 염려는 없다. 다만 서두르지 말고 급히 올려치는 길을 피해가면서 능선길을 올라 가자. 곳곳에 바위도 넘고 매어 놓은 줄도 잡으면서 넉넉히 한 시간 오르면 태극기 휘날리는 정상이 보인다. 위험한 길은 없다. 마지막 정상을 오르는 길은 나무층계를 잘 설치해 놓았다. 얼른 알아 볼 수 없는 쥐바위와 두꺼비 바위를 지난다.

쥐바위 아래에는 갈림길 이정표가 있다. 석장봉·덕릉고개, 불암산 정상, 청암능선길·상계역. 이윽고 정상에 오른다. 표지석에는 508m, 어느 산악회의 돌표지석에는 507m라고 쓰여 있다. 좌로는 남양주 별내면이 손에 잡힐 듯하고, 우로는 상계동이, 남으로는 태릉지구가 눈 아래 펼쳐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불암산은 재주남사십리(在州南四十里: 불곡산 아래 양주읍치에서 남쪽 40리에 있다)라고 했다. 지금은 노원구와 남양주시 별내면에 걸쳐 있다. 불암산(佛岩山)이라는 이름의 어원은 분명치 않은데 ‘민족문화대백과’에는 정상의 모습이 ‘송낙을 쓴 부처의 형상’ 같아서 불암산이라 했다고 한다. 송낙이란 송라립(松蘿笠: 소나무에 기생하는 겨우살이(松蘿)로 만든 사갓(笠))의 일상적 표현어로 여승들이 주로 쓴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불암산 정상바위는 송라립과 많이 닮았다. 옛사람들에게는 흔히 보던 일상의 물건이었으니 쉽게 그런 이름을 떠올렸으리라. 이제 정상에서 남쪽 능선길로 내려간다. 나무층계가 잘 놓여 있어 어려움이 없다. 탤런트 최불암씨가 적어 놓은 ‘불암산이여’라는 고백문이 걸려 있다. 염치없이 너무 큰 이름 불암(佛岩)을 사용했다고 용서를 비는 글이다. 노원구에서는 최불암씨를 이 산의 명예 산주(山主)로 위촉했다 한다. 한편 불암산 공원에는 이와 비슷한 목판에 ‘불암산의 전설’을 적어 놓았다. 전부터 서울을 등지고 돌아 앉아 반역산으로 불린다는 수락산의 전설과 맥을 같이 하는 이야기이다. 필자의 눈에는 별로 돌아앉지도 않았건만 보는 이들의 느낌은 각자 다른가 보다. 나무판에 적힌 내용을 그대로 옮긴다. 불암산의 전설 전설에 의하면 불암산은 원래 금강산에 있던 산이라고 한다.

어느날 불암산은 조선왕조가 도읍을 정하는데 한양에 남산이 없어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가 남산이 되고 싶어 금강산을 떠나 한양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지금의 불암산 자리에 도착하여 보니 한양에는 이미 남산이 들어서서 자리잡고 있었다. 불암산은 한양의 남산이 될 수 없었기에 금강산으로 되돌아갈 작정으로 뒤돌아서서 갈 준비를 했다. 하지만 한번 떠난 금강산에는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 돌아선 채로 그 자리에 머물고 말았다. 이 때문에 불암산은 현재 보는 것과 같이 서울을 등지고 있는 형세이다. 나무층계를 내려와 남쪽으로 가는 주능선을 버리고 좌측 샛길로 접어든다. 10여m 되는 비스듬한 바위에 밧줄이 매달려 있다. 모처럼 산행에 아기자기한 맛을 돋운다. 바위를 내려 와 좌측으로 이어지는 길을 택하면 정상 큰 바위가 아래로 난 길을 가게 되는데 ‘호랑이굴’이란 안내판 앞으로 큰 바위틈이 보인다. 6.25 전쟁 때, 불암산유격대의 은거지 중 하나인 것이다. 6.25가 발발하자, 미처 퇴각하지 못한 육사1기생 10명, 입교한지 20여일밖에 안된 2기생 3명, 7사단 90연대 하사관 및 사병 7명 등 20명이 불암산에 들어와 유격대를 결성하였다. 이들의 근거지는 석천암, 불암사와 3곳의 바위틈 동굴이었다. 절의 스님들과 마을 주민들의 보급지원을 받아 이들은 신출귀몰 유격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20세 전후 이들은 끝내 19명이 전사하고 총상을 입은 강원기 대원마저 3년 후 사망하였으니 불꽃처럼 타오른 꽃들이었다. 이들을 도운 불암사 윤용문 주지도 끌려 간 후 영영 소식이 없게 되었다. 이제는 이 산길에서 한 번은 옷깃을 여며 보자. 어제 없는 오늘이 과연 있는 것인지. 석천암으로 내려 간다. 절마당에 들어서니 순박하기 이를데 없는 마애미륵불(磨崖彌勒佛)이 길손을 맞는다. 1966년 설봉스님이 발원하여 모셨다 한다. 석천암은 불암산 정상 큰 바위가 절 뒤로 펼쳐져 내려 온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새긴 불상마다 모두 마애불이 되었다. 이 마애불들은 자연 불암산 정상을 등에 지고 계시니 백(back)으로 치면 이보다 더 큰 백 그라운드가 없을 것이요, 고행으로 치면 산을 온통 등에 지고 계시니 고행도 큰 고행을 하고 계신 중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는 옛분의 시 한 수를 읽으면 석천암을 알 수 있다. 천불산고취첩중(千佛山高翠疊重: 천불산 높아 푸르름은 더욱 짙고) 반라보보활행종(攀蘿步步滑行 : 걸음걸음 미끄러워 넝쿨을 잡누나) 운매노수위소골(雲埋老樹危巢 : 구름은 큰 나무 송골매 둥지 가리고) 수활징천은와룡(水活澄泉隱臥龍: 물은 콸콸 샘은 맑아 와룡이 숨었구나) 석천암에 들리면 여기서 그치지 말고 뒤로 난 층계를 오르자. 위 쪽에는 마애약사불(磨崖藥師佛)과 북두칠성암각(北斗七星岩刻)이 자리잡고 있다. 특히 불두칠성암각은 부처로 표현한 치성광여래 대신 민간신앙의 칠성 별자리를 그대로 그린 것으로 흥미를 자아낸다.

‘이야기가 있는 길-15 삼막사’ 편에서 칠성신앙을 소개했듯이 우리 땅에서 칠성은 각별한 신앙의 대상이었다. 운주사의 칠성바위, 삼척 죽서루의 7개 구멍을 판 칠성바위, 삼국유사에서 만나는 김유신 장군의 일곱 개의 점(点), 응칠(應七)이라는 아명이 뜻하듯 북두칠성 점을 지니고 계시던 안중근 의사. 수도 없이 많은 칠성이 이 땅 선배들의 삶 속에 있었다. 쓸쓸한 저녁 날씨에 내려 갈 길손이 안타까웠는지 보살님이 커피 한 잔 타 주신다. 어둡기 전에 돌 길을 내려 온다. 10여 분 뒤 불암사 일주문에 닿는다. 해도 떨어질 시간이 되어 가니 천년고찰 불암사는 다음 차에 들리기로 한다. 15분 걸어 불암동 3거리로 나온다. 별내 쪽에서 나오는 버스가 지나가는 길이다. 후암동까지 한 번에 가고 싶으면 시내 방향으로 5분 정도 걸으면 202번 버스 종점이 있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버스 타고 나가서 화랑대역에서 6호선 타는 것이 가장 편리한 길이다. 지나온 불암산을 바라 보니 석천암에 저녁불이 켜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절 뒤 바위에 7개의 큰 북두칠성이 반짝인다. 세상을 향해 칠성님의 가피를 전하고 있는 것 아닌가.

교통편 지하철 4호선 당고개역 1번 출구 걷기 코스 당고개역 1번 출구 ~ 길건너 ~ 당고개로 ~ 당고개유래비 ~ 덕암초 ~ 상계약수 마애불 ~ 경수사 마애불 ~ 불암산~호랑이굴 ~ 석천암 ~ 불암사 ~ 불암동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마애불과 문화유적지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갑니다.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본지 Art In 편집주간)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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