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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구 음악에세이]‘음악의 독재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35년 동안 베를린 필 지배…아름답고 완벽한 음향 만들기 위해 단원을 혹독하게 다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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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42호 박현준⁄ 2011.10.04 13:33:52

이종구 박사(이종구심장크리닉 원장) 1945년 독일은 세계 2차 대전에서 패전한 후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으며 독일에 주둔한 미국-영국-소련 연합군은 나치 동조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그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히틀러의 문화장관 괴벨스는 나치당원이였던 지휘자 카라얀을 ‘기적의 젊은이’로 칭찬했는데, 제2차 세계대전 후 연합군은 카라얀을 나치 협력자로 간주하고 그를 수배했다. 이때 카라얀은 이탈리아에서 숨어 살다가 수배령이 끝나고 비엔나로 돌아왔지만 공연은 할 수 없었다. 이때 그를 구해준 것은 영국의 음반사인 EMI였다. EMI는 음반을 팔기 위해 오케스트라(The Philharmonia)를 만들고 카라얀을 영입했다. 그 당시 카라얀은 연주가 금지된 상태였지만 녹음까지는 금지되지 않았다. 연주 금지가 풀리자 그는 오스트리아로 돌아가 다시 공연을 시작해 승승장구했다. 그는 비엔나 국립오페라의 음악감독이 됐고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하자 베를린 필이 상임지휘자가 됐다. 그리고 상임지휘자가 없는 비엔나 필하모니도 가끔 지휘했으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잘츠부르크 하기 페스티벌’도 장악했다. 물론 나치당에 가입한 경력이 있어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지만 그의 명성은 전 세계로 퍼졌으며 독일 클래식 음악은 물론 전 유럽의 음악계를 좌지우지했다. 그의 승인이 없이는 아무도 잘츠부르크 축제에 출연할 수 없었고 카라얀이 초청해 연주를 한 번 하면 일약 대스타가 되는 일도 벌어졌다. 말 그대로 그는 ‘유럽 음악의 독재자’, 나아가서는 화제의 중심이 된 것이다. 사람들은 ‘음악의 황제’ 하면 흔히 베토벤을 떠올린다. 많은 사람들이 베토벤을 황제로 생각하는 이유는 그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였으며 세상을 떠난 후 거의 모든 낭만주의 시대의 작곡가들이 베토벤을 존경하고 그와 같은 음악을 창조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토벤은 황제가 아니었다. 황제란 절대적 권력과 권위 그리고 부와 명예를 누리는 사람이다. 이런 시각으로 볼 때 그는 최고의 음악인이었지만 황제가 될 수 없었다.

반면 카라얀은 독일과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전 유럽의 음악계를 확실히 장악해 좌지우지했으며, 세계에서 가장 많은 CD와 비디오 영화를 제작, 막대한 부를 누렸기 때문에 음악계의 독재자 또는 황제라는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았다. 카라얀은 개인 비행기와 가장 빠르고 고가의 페라리 자동차, 그리고 77피트짜리 요트를 프랑스 리비에라에 정박시키고 살았다. 그의 세 번째 부인(프랑스의 모델)은 피카소와 르누아르의 그림을 수집했으며 가장 아름다운 보석의 주인이 됐다. 이러한 씀씀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3000억 원 이상의 유산을 남겼다. 1955년 그는 ‘나는 독재자가 될 것이다’라고 선언한 적이 있었는데 그의 예언은 현실이 됐다. 카라얀은 1908년에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선조는 1769년에 그리스로부터 이민 온 집안이다.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1916년부터 1926년까지 모차르트 음악원에서 지휘 공부를 하고 스물한 살이던 1929년부터 1934년까지 독일 우름 시에서 음악 감독을 지냈다. 또한 그는 1933년에 잘츠부르크 음악 축제로 데뷔하고 비엔나 필하모니를 처음으로 지휘했다. 카라얀은 나치당의 신봉자는 아니었지만 히틀러가 집권한 지 두 달 만에 스물다섯 젊은 나이로 나치당에 자진 입당했다. 후일 그는 유태인과 결혼을 해서 나치 수뇌부의 신임을 일기도 했지만 나치당의 입당이 그의 출세에 큰 힘이 된 것은 사실이며, 1935년 카라얀은 독일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에 독일의 총 음악감독이 됐다. 카라얀은 그때까지 이류 오케스트라였던 ‘The Philharmonia’를 일류 오케스트라로 만드는 데 성공했으며 1954년에는 베를린 필하모니커의 지휘자로 자리를 옮겨 1989년까지 무려 35년간 베를린 필하모니커에 군림했다. 한편, 카라얀은 전임자 푸르트벵글러가 만들어내지 못한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음향을 만들기 위해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혹독하게 연습시켰다. 카라얀이 그들을 혹사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탁월한 능력과 카리스마도 있지만 그가 순회공연과 레코딩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자금을 단원들에게 후하게 주었던 것도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를 통해 황제적 독재자의 권위는 언젠가는 추락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카라얀의 권위에 대한 도전은 1982년에 시작됐다. 카라얀은 한 유능한 여성 클라리넷 연주자인 자비네 마이어를 영입시키려 했지만 단원들은 그가 여자이고 카라얀이 추천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언론은 카라얀을 여성 옹호자로 호평했지만 그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84년에는 오케스트라의 지배인이 물러난 후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화합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카라얀이 실력이 부족한 한 연주자를 해고하려 하자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소송을 제기했으며 카라얀이 패소했다. 그러자 카라얀은 베를린시 750주년 기념 해에 1년 동안 단 6번만 연주를 하고 모든 순회공연과 녹음 계획을 취소하기도 했다. 그 결과 단원들의 수입이 감소했다. 또한 어느 나라의 원수가 방문했을 때 배탈이 났다는 이유로 연주장에 나타나지 않았다가 그 다음날 건재한 모습으로 일본으로 떠나는 해프닝까지 연출해 비난을 사기도 했다.

카라얀이 가장 중요시했던 것은 푸르트벵글러처럼 지휘자의 명칭뿐만 아니라 예술 감독이 돼 단원들을 선발하는 권리와 자신의 후계자를 지명하는 특권이었다. 그러나 베를린 필은 모든 단원들이 주인인 민주적 전통을 고수하면서 이를 거절하자 카라얀은 1989년 사망하기 얼마 전, 베를린 필에 사표를 던졌다. 카라얀은 자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출연하면서 알게 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유태계 미국인 제임스 레바인을 자신의 후계자로 만들고 싶었지만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미국의 유태인 출신 음악가들은 카라얀을 냉대했으며 줄리아드 음대의 이사장이었던 유태인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삭 스턴과 이스라엘 출신의 아이삭 펄만은 카라얀과의 협연을 거부했다. 이런 상황에서 유태계의 미국인 레바인을 자신의 후계자로 만드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예측컨대 21세기에는 카라얀 같은 황제적 지휘자를 다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강해진 음악인들의 노조는 그것을 거부할 것이며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필라델피아 교향악단의 오르만디는 42년을, 베를린 필의 카라얀은 35년을, 시카고 심포니의 솔티는 22년을 지휘했다. 그러나 이는 옛날이야기다. 피츠버그 심포니를 세계의 지도에 올린 얀손스는 7년 후 다시 자리를 옮겼다. 러시아의 게르기예프는 2007년부터 런던 필의 상임지휘자가 됐지만 이외에도 2개의 오케스트라를 계속 지휘하고 있다. 마에스트로와 오케스트라는 결혼을 하는 것과 같다는 말은 옛날의 전설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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