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만화 ‘고바우 영감’으로 잘 알려진 김성환(79) 화백이 11월 9~24일 소공동 롯데갤러리 본점에서 자신의 소장품 전을 연다. 우표 수집가로 유명한 김 화백이 모은 수집품은 '까세(cachet)'. 우표와 관련된 그림을 봉투 한 모퉁이에 그려 넣은 작품들이다. 그의 수집품이 주목받는 이유는 우체국에서 새 우표를 판매 개시하는 날, 편지봉투에 그 우표를 붙이고 그 날짜 소인을 찍은 뒤 화가들에게 그림을 그려받았기 때문이다. 일명 '초일봉피(初日封皮)'다. 박수근 화백과의 인연에서 시작된 김 화백의 작은 컬렉션은 1960년대부터 50년 동안 천경자, 장욱진, 김창렬, 이왈종, 황주리 등 미술작가들과 만화가 박수동, 신문수, 허영만, 영화감독 임권택 등 문화 예술인 161명의 작품으로 이어졌다. 오랜 기간 특별한 작품을 모은 것에 대해 그는 "다른 이가 모으지 못하는 것을 내가 하고 싶었어. 유명 작가가 아니라도 새로운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게 매력적이었지. 내가 우표 수집을 하면서 구한국 시대에 집중하다 보니 체신박물관에도 없는 우표를 가지게 됐어. 남이 없는 것을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이 생기더라고"라며 허허 웃었다.
‘고바우 화백’의 이번 컬렉션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예술의 궁극적인 목적이 감동 또는 위안이라면 작품이 반드시 커야 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오케스트라의 합주만 감동을 주는 게 아니라 피아노 한 대나 바이올린 한 대로 하는 짧은 곡이라도 커다란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엽서 한 장, 봉투 한 장에 그려진 한 폭 그림에도 삼라만상과 아름다움이 담겨 있고 감동이 와 닿는다. 새 우표가 나오면 고바우 영감은 우체국을 찾아 우표를 사 봉투에 붙이고 우체국 직인까지 찍는다. 이어 화가를 만나 “이 봉투에 그려달라”고 부탁하고… 이번에 공개된 유명화가들의 까세를 ‘귀한 손님이 오면 내놓으려고 오래오래 묵혀둔 장맛 같다’고 하면 지나친 비유일까. 뜨거운 햇빛과 끊임없이 돌보는 주인의 정성에 비례해 장맛이 좋아지듯, 이 '작은 봉투 위에 그려진 대작' 컬렉션은 김 화백의 노력과 손때를 그대로 드러낸다. 6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화가들과 인연을 맺으면서 한 두 점씩 받아 모은 까세들. 작고 조악한 편지봉투는 화가들의 손길이 닿으면서 어느새 멋진 예술로 재탄생됐다. 까세 컬렉션을 완성하기 위해 김 화백은 인맥을 이용하기도 했고, 찾아가 설득도 했고, 고바우 영감 원화를 선물로 주면서 교환하기도 했단다. 술 한 잔 사주고 받아오기도 했다.
아무리 천하에 유명한 시사만화가 김성환이라 할지라도 화가에게 까세를 맡긴 뒤 운 좋게 곧 결과물을 받는 경우도 있었지만, 몇 달씩이나 설득, 회유, 강요의 작업이 필요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까세를 50년 간 모으면서 160여 화가와 맺은 회고담은 그의 컬렉션에 더욱 가치를 더한다. 수집이란 목표를 위해서는 자존심을 버려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 까세 수집을 통해 김 화백은 ‘어렵게 모은 수집품이야말로 가장 오래 사랑을 받는다’는 이치를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울적하거나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이 수집품을 들여다보면서 시름을 잊었다고 한다. 커다란 캔버스 위에 그려진 그림, 분위기 좋은 미술관에서 조명을 받으면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화려한 작품을 감상하는 일은 물론 즐겁다. 그러나 김성환 화백과의 인연을 끈으로 상업성을 배제한 채 그려진, 화가 각자의 개성이 그대로 반영된 까세를 보는 재미도 나름 쏠쏠하다. 이번 전시에 작가들의 대표작품은 없다. 하지만 화가 160여 명에게 받은 까세 550여 점 중 엄선한 작은 그림들에서는 각 작가들의 개성 넘치는 세상, 그리고 그림에 대한 고바우의 열정 50여 년을 돌아보는 감동이 있다. 전시 문의 02-726-4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