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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 ② 上]김삿갓 눈물부터 양녕대군의 헛헛웃음까지

양주 회암사터, “크면 성기다”더니 이렇게 짜임새 있는 연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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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52호 박현준⁄ 2011.12.12 14:24:31

종로에서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서울 시계를 넘으면 의정부로 접어든다. 가능역이나 의정부북부역 또는 양주역에서 내려 30-1버스로 환승한다. 버스는 3번 국도를 타고 양주시청 곁을 지나 샘내고개를 넘고 우회전하여 56번 지방도로 접어드는데, 양주 회천신도시 지구를 지나간다. 아파트를 짓기 위해 상당히 광활한 택지를 조성해 놓았다. 버스를 탄 지 약 30분 지나 김삿갓교(회암교)에서 내린다. 다리에 쓰여 있는 이름은 김삿갓교인데 버스 안내방송은 회암교라 하고 있다. 종로로부터 약 1시간 30분이 걸린 셈이다. 다리를 건너지 말고 곧바로 도로를 500m 정도 직진한다. 회암2교라 쓴 돌다리가 나오면서 회암사지를 알리는 안내판이 눈에 들어온다. 이 일대 마을들이 회암리(檜巖里)다. 아마도 회암사 아랫마을이라서 이런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이곳이 방랑시인 김삿갓(김병연)의 고향이라고 한다. 문헌상 기록을 찾지 못해 100% 확신할 수는 없어도 연구자들은 그렇게 추정하고 있다. 그래서 다리 이름도 김삿갓교로 붙였을 것이다. 김삿갓 본인이 쓴 시(詩)에도 그렇게 추정할 근거가 있다. 김삿갓 본인이 스산한 일생을 뒤돌아 본 시가 ‘난고평생시(蘭皐平生詩: 난고는 김삿갓의 호)’인데 이 시의 네 번째 연(聯)에는, 初年自謂得福地(초년자위득복지) 어려서 좋은 곳에 살았다 할 만하지 漢北知吾生長鄕(한북지오생장향) 한수 북은 잊지 못할 내 낳고 자란 고향 라는 문구가 있다. 양주 사람으로 추정되는 김삿갓이 명시를 지어 장원을 했는데, 그 시를 보고 김삿갓 어머니는 눈물만 흘려. 시가 혹독하게 비판한 인물은 바로 김삿갓의 할아버지였으니… 이 시를 볼 때 김삿갓은 한강 북쪽 땅인 경기도 어디메쯤 출신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더 결정적인 또 하나의 시가 있으니…. 시건방을 떠는 시골 훈장 집에서 겨우 밥 한 그릇 얻어 자시고 조롱하듯 쓴 시(詩)가 있다. 마지막 구(句)를 훈장이 하는 말로 끝맺는다. 今年過客盡楊州(금년과객진양주: 금년의 길손들은 모두 양주 사람이구먼) 그러니 김삿갓도 양주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땅도 널찍하고 물도 풍부한 이 고장을 두고 왜 김삿갓은 일생을 떠돌며 살아간 것일까? 팔자가 역마직성(役馬直星)이라 방랑벽이 있었던 것일까? 거기에는 가슴 아픈 이야기가 숨어 있다.

김병연이 23세 되던 해 영월 동헌(東軒)에서 백일장이 열렸는데 여기에서 그는 장원을 했다. 그 때 지은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曰爾世臣金益淳(왈이세신김익순: 그대 대대로 잘 산 김익순에게 이르노라). 그러면서 그는 홍경래의 난에 항복한 명분가 출신의 김익순을 꾸짖기 시작한다. 급기야는 ‘死地寧爲二心子(사지영위이심자: 사지에서 어찌 반역의 마음을 먹는단 말이냐?)’로 몰아붙이고 ‘이 일을 이 나라 역사에 길이 전하겠다(此事流傳東國史)’고 하면서 춘추필법(春秋筆法: 노나라 역사를 기록한 공자의 칼날 같은 필법)을 들이대 서릿발 같은 심판을 내린다. 이렇게 장원을 한 김병연, 어머니께 빨리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달려갔는데…. 자초지종을 다 들은 어머니는 묵묵부답 눈물만 흘리셨으니…. 김익순은 김병연 자신의 할아버지였던 것이다. 선천부사였던 김익순은 홍경래의 난에 항복했는데 난이 평정된 후 처형되고 집안은 몰락하였다. 그 날 이후 김병연은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술 한 잔에 시(詩) 한 수로’ 일생을 살아갔던 것이다. 이름도 버리고 김삿갓으로. 광대하면서도 잘 자리를 잡은 건물터와 초석들…이성계의 정신적 멘토였던 무학대사가 머문 회암사지의 모든 것은 어찌 이리도 빈틈 하나없이 잘 어울리나 회암2교를 건너 속세의 경계를 넘어간다. 좌로는 그 동안 발굴한 회암사지(檜巖寺址) 출토품을 전시하기 위한 박물관이 세워지고 있다. 내년(2012년) 5월 개관할 예정이라 한다. 회암사터에 이르는 길은 1km 남짓, 좌우로 숲이 가지런한 아담한 길이다. 우측에 패널 가건물이 있는데 절터를 발굴한 기와들이 광주리마다 가득 담겨 있다. 출토품을 가려서 연구와 전시에 쓸 모양이다. 잠시 후 가로수길이 끝나면 절터가 나타나는데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광대함. 격자(格子)모양으로 정렬한 그 많은 건물터와 초석들, 당간지주(幢竿支柱), 부도(浮屠: 사리탑)와 뒤로 보이는 천보산의 앉음새까지…. 크면 허술한 법인데 무엇 하나 어울리지 않음이 없다. 노자는 이런 말씀을 하였다. ‘天網恢恢 疎而不漏(천망회회 소이불루)’, 즉 하늘이란 그물은 넓고 넓어서 엉성해 보이지만 물 샐 틈이 없다네’란 의미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회암사터는 이 말에 덧붙여 엉성해 보이지도 않으니 눈길을 거둘 수가 없다. 6년간 발굴을 하고 일반인들이 관람하게 오픈했는데 탐방객 기준으로 좌측 언덕에 전망대를 설치하였다. 이곳에는 문화재 해설사가 계셔 많은 궁금증을 풀 수 있다. 필자도 양주시청 문화관광과(031-820-2121)에 전화를 걸어 해설사가 계신 시간을 확인하고 방문하였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고려 충숙왕 15년(1328) 때 인도 승려 지공화상(指空和尙)이 원나라를 거쳐 이곳에 왔는데 이곳 지형이 인도 나란다 사원의 아란타사(阿蘭陀寺)와 유사하여 절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회암사는 그 후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중창하고 그 제자 각전(覺田) 등이 공사를 마쳐 대찰이 되었다고 한다. 이 때 중창한 절의 규모는 목은(牧隱) 이색(李穡) 선생이 기록한 ‘천보산 회암사 수조기(修造記)’에 있는데 262간(間) 규모에 승려도 3000명에 이르렀다 하니 그 때의 흔적이 지금 절터에 잘 남아 있다. 그러나 이 절터가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것은 조선시대에 산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태조 이성계와 자초(自超) 무학대사다. 요새 말로 하면 무학대사는 태조의 멘토(mentor)인 셈이다. 삼봉 정도전이 이성계의 정치 파트너로서 조선 건국을 기획했다면 자초 무학은 정신적 스승, 멘토로서 이성계의 의지처가 되었던 것이다. 회암사와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관계에 대해서는 야사도 많지만, 조선왕조실록 곳곳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그 중 하나를 보자면,

“직접 자초 무학대사가 있는 회암사에 거둥하기도 하고, 내관을 보내어 자초 무학에게 문안드리게 하고, 곡식을 수시로 내리고, 화재가 나거나 역질이 돌면 재빨리 다른 절로 옮기게 하지를 않나, 용문사로 가겠다 하니 끝내 못 가게 잡아 놓지를 않나, 경기도민을 동원하여 무학대사의 부도를 미리 만들게 하지 않나….” 샘나서 보아 주기 힘들 정도로 정사(正史)에 기록되어 있으니 미처 기록 안 된 태조 이성계의 무학대사에 대한 사랑은 얼마나 끔직한 것이었으랴. 아들 방원에게 화난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 눌러앉아 서울로 돌아가지 않으니 태종 이방원이 조알하려 오고…절터의 건물배치가 궁궐식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방원에 의한 왕자의 난으로 왕위를 내준 뒤 태조는 함흥과 함께 이곳 회암사에 거처를 정하였다. 함흥차사(咸興差使: 진노하여 함흥으로 귀향한 태조에게 태종 방원이 보낸 사신이 가는 족족 돌아오지 못했다는 야사에서 나온 사자성어)란 말도 이 때 생긴 것이며 의정부(議政府)란 지명도 이 때 생긴 말이다. 태종실록에는 회암사에 대한 기록이 더 많다. 왕위를 물리고 태상왕(太上王)이 된 태조 이성계의 기록이 태종실록(2년 1402년 6월)에 실려 있는데, ‘태상왕이 소요산에서 회암사(檜巖寺)로 행차하였다. 태상왕이 회암사를 중수(重修)하고, 또 궁실(宮室)을 지어 머물러 살려고 하니(太上王自逍遙山幸檜巖寺. 太上欲重修檜巖寺, 且營宮室而留居)’. 발굴된 회암사터의 북쪽 지역은 사찰건축 배치가 아닌 궁궐건물 배치를 따르고 있다. 이 기록이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준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저 배치가 바로 이때의 일이겠구나, 이런 상념에 젖으니 600년의 시간이 어제인 듯하다. 같은 해(1402년) 8월 실록 기록은 ‘임금이 회암사(檜巖寺)로 가서 태상왕을 조알(朝謁)하였다.(上朝太上王于檜巖寺)’라고 썼다. 태조가 회암사에 거처하니 태종이 조알하러 온 것이다. 임금이 이리했으니 의정부(議政府: 지금의 국무회의 격인 국가최고의결기구의 명칭)도 자주 양주 땅에 와서 열렸으리라. 그 곳이 지금의 의정부 땅이다. 한편 회암사에는 양녕대군의 동생이며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도 중수하고 수도하였다(세종실록 17년). 양녕대군의 객기랄까, 허허로움이랄까 하는 점도 세종실록에 기록돼 있다. 동생 효령이 수도하는 회암사에서 사냥한 새와 짐승을 구워 먹는 일이 발생했다. 아우 효령이 말리자 양녕이 한 마디 한다. “부처가 만일 영험이 있다면 그대의 5, 6월 귀에 낀 테는 왜 벗기지 못하는가. 나는 살아서는 국왕(國王)의 형이 되어 부귀를 누리고, 죽어서는 또한 불자의 형이 되어 보리(菩提)에 오를 터이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佛如有靈, 君之五六月耳掩, 何不爲脫之乎? 我則生爲國王之兄, 享有富貴, 死亦爲佛者之兄, 誕登菩提, 不亦樂乎?)” 이제는 옛 흔적만 남은 회암사터를 내려다보면서 ‘범생이 아우’와 ‘망나니(아니면 통큰) 형’의 모습이 떠올라 미소가 지어진다. 그들도 모두 시간 속으로 사라져 갔구나. 세종의 형 양녕대군이 허허롭게 웃던 들판에선 명승 보우를 시샘한 유생들의 소행이었던 듯, 목 잘린 불상과 불탄 흔적만 나오니 이념의 횡포란 참으로… 해설사께서 회암사는 명종과 선조 간(間)에 불타서 사라졌다고 했다. 불탄 흔적이 지금도 초석 여기저기에 검게 남아 있다. 너무 가슴 아픈 일이다. 설명에 의하면 국내에서 경주 황룡사 다음으로 큰 절이었다고 한다. 왜 불에 탔을까? 해설사는 말을 아낀다. 명종실록과 발굴 결과를 보면 그 원인을 짐작할 수 있다.

500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중종의 첫째 아들 인종은 후사 없이 즉위 7개월 만에 승하했다. 이에 중종의 둘째 아들 경원대군이 13대 임금(명종)으로 즉위하니 때는 1545년 나이 12세였다. 할 수 없이 중종의 계비인 어머니 문정왕후가 이 후 8년간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된다. 이 일이 결과적으로 회암사의 빛과 그림자가 되었다. 문정왕후는 당대의 명승 허응당 보우(虛應堂 普雨)를 모시고 불교에 심취한다. 회암사를 중창하고 승려의 도첩제(度牒制: 승려 신분을 인증하는 제도)를 부활하고, 승과(僧科: 승려 과거시험)를 부활하여 지금의 코엑스 봉은사 앞마당에서 실시했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같은 시대의 걸출한 인물을 배출한 통로였다. 그 당시 문정왕후 발원으로 그려진 16세기 조선불화가 400여 점 되는데 조선시대 불교미술의 걸작이라 할 만 하다. 아쉽게도 대부분 일실되어 손에 꼽을 정도만 남아 있다. 이러하니 성리학을 국시로 하는 조선의 유생들이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사방에서 소(疏)가 올라오고 여간 소란스러운 게 아니었는데 문정왕후는 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1565년(명종 20년) 문정왕후가 급서(急逝)한 것이다.

때를 만난 유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요승(妖僧) 보우를 처단하라는 것이었다. 여기에 앞장 선 이가 누구였을까? 율곡 이이(李珥)였다. 율곡은 그 자신이 19세 때 금강산으로 출가하여 승려 생활을 하다가 환속한 유학자였다. 그러함에도 ‘논요승보우소(論妖僧普雨疏)’를 올려 보우를 탄핵한 것이다. 역사를 보면 사람은 다면체(多面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보우가 발탁한 휴정과 유정, 그리고 그가 남긴 저서들을 통해 보우의 본 얼굴을 보려는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다. 역사는 모두 승자들의 기록이다. 이렇게 하여 보우는 1565년 제주도로 귀양가게 되고 거기에서 제주목사 변협에게 주살(誅殺)되었음을 명종실록에서 사관은 전한다. 보우가 남긴 서적도 모두 불살라 없어졌지만 다행히 그중 하나가 일본학자에게 발견돼. 너무 많은 숨결 만날 수 있는 회암사 터엔 정적만 감돌고… 그가 남긴 저서도 모두 사라졌다. 다행히 그가 죽은 지 8년 후 사명당의 발문이 담겨 있는 허응당집(虛應堂集)이 일본 학자 다까하시도루(高橋亨)에 의해 발견(1959년)된 것은 정말 행운이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명종실록 21년(1566년) 4월 20일 기록에 보면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 한다(欲焚蕩檜巖)’는 기록이 있다. 그 뒤 회암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다음 기록은 선조28년(1595년) 선조실록에 실려 있다. 회암사 옛터에 종루가 있는데 그 아래 큰 종이 묻혀 있으니 그것으로 화포를 제조하자는 것이다. 회암사는 불타 없어졌지만 한 가지 위안을 삼는 이들이 있었다. 회암사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을 것이라고. 그런데 이런 마음의 위안도 산산이 깨어져 버렸다. 6년에 걸친 발굴 결과 회암사의 불상은 모두 목이 부러지고 산산이 깨진 채로 출토됐다. 제기(祭器)로 쓰던 백자도 모두 철저히 깨진 파편뿐이었다. 아, 회암사. 모진 사람의 손길에도 그 터는 따듯한 햇살 아래 고요했다. (다음 회에 계속) - 이한성 동국대 교수

교통편 1호선 전철(가능역, 의정부북부역, 양주역) ~ 30-1번 버스 환승 ~ 회암교(김삿갓교) 하차 또는 1호산 전철 덕정역 하차 ~ 78번 마을버스 ~ 회암2교 하차 수유로, 도봉로, 의정부 간선도로에서 902 좌석버스를 타고 천보3거리에서 내려 걸어가도 되지만 걷는 거리가 길다. 답사코스 김사갓교 ~ 회암2교 ~ 회암사지 ~ 회암사 ~ 천보산 ~ 해룡산 갈림길 ~ 장림고개 ~ (짧은 코스를 택하려면 여기서 ~ 회암동 하산 ~ 30-1버스 종점) ~ 송전탑 ~ 칠봉산 ~ 대도사 갈림길 ~ 봉양4거리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마애불과 문화유적지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갑니다.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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