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딱한 분위기일 것만 같은 의사의 연구실 벽에 불상과 사찰 사진이 걸려 있다. 컴퓨터 바탕 화면에는 은은한 향기가 묻어날 것 같은 분홍색 꽃이 피어 있다. “상사화에요. 꽃이 지고 난 다음에야 잎이 돋아 잎과 꽃이 영원히 만날 수 없다 하여 상사화라고 하죠.” 조보연 중앙대병원 내분비내과 교수는 허허 웃으며 자신의 사진을 설명했다. 조보연 교수라면 갑상선 질환에 대한 국내 1인자라고 할 수 있다. 서울대학병원에서 2011년 중앙대병원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수많은 갑상선 환자가 그를 뒤를 쫓았다는 사실에서도 그의 실력을 알 수 있다. 수많은 환자에 시달려온 조 교수가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은 주말에 카메라를 메고 시골로 나가는 것. 그가 주로 찍는 사진은 논밭에 처박힌 주인없는 불상부터, 심산유곡의 낡은 절집, 산 속의 나무 등 스스로를 앞세우지 않고 조용히 뒤로 물러나 앉아 있는 대상들이다. 그는 사진을 찍으러 나가는 자신의 일정을 ‘참배’라고 표현한다. 사찰과 그 주변을 찾아가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그 영상을 카메라에 담는 작업에 임하는 자세가 남다름을 알 수 있다. 그의 연구실에는 조 교수 자신이 찍은 사진으로 만든 달력, 불상과 사찰에 대한 사진이 곳곳에 걸려 있다. 컴퓨터에 저장된 불상과 사찰 사진들은 연구 자료로 삼아도 될 정도의 분량이다. “우리나라에는 전통 문화재가 대부분 사찰에 있어요. 사찰에 간 김에 불상도 보고 그림, 석조물 등도 많이 봤는데 집에 와선 뭘 봤는지 도통 기억이 안 나더라고요. 그래서 인터넷을 찾아보면 또 새로운 면모가 보이더군요. 그런데 그 실체가 머릿속에서 가물가물해서 사진으로 찍어서 기록하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마침 디지털 카메라 붐이 일어서 작은 카메라 하나를 가지고 전국 곳곳을 돌아다녔죠.” 그렇게 호기심으로 찍기 시작한 사진은 전통 문화재를 새로운 각도에서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조 교수는 우리나라 사찰은 건물만 위주로 하는 서양 건축방식과 차별화된 매력이 있다고 말했다.
“서양은 정원을 인위적으로 만드는 등 환경에 맞춰나가는 것보다는 인간의 손으로 독창적인 무언가를 만드는 경향이 있어요. 그러나 우리나라 사찰을 보면 있는 그대로의 자연 속에 건물이 들어가는 방식으로 해놨어요. 부산의 범어사에는 바깥에서 사찰로 들어가는 입구에 나무들이 늘어서 있는데 이를 베지 않고 건물을 마치 배경처럼 자연스럽게 지어놨어요. 이게 바로 차경, 즉 ‘경치를 빌려 쓴다’는 개념인데 동양 사찰 건축의 대표적인 특징이죠.” 조 교수의 카메라 렌즈에는 계절과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경치와 여기에 어우러지는 사찰의 모습들이 담긴다. 같은 사찰도 정면만 찍는 게 아니라 다양한 각도에서 찍으면 명암이 현저하게 달라져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사찰에선 외관 뿐 아니라 실용성에도 신경을 쓴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서양 건물은 같은 문으로 들어가고 나오지만, 한국 건축은 양옆에 들어가는 문과 나오는 문이 각기 있어 개방된 느낌을 주죠. 그리고 마당 폭이 20~25m 정도인데 마이크 없이도 대화가 가능하고, 안경 없이도 상대방의 표정을 읽을 수 있는 정도의 거리에요. 건물 사이의 모서리 각도는 20~25도 정도로 벌어져 폐쇄감 없이 아늑한 느낌을 주죠. 서울 중심가의 옛 한옥에서 살거나, 새로 한옥을 짓는 외국인이 있는 것은 한국 전통 건축의 장점을 알기 때문인 것 같아요.” “남대문 사진을 찍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언제라도 찍을 수 있다며 그냥 지나쳤죠. 그런데 이제 불타 없어져 버렸어요. 우리 주변에 흔히 있는 대상은 이렇게 지나치기 쉽고, 없어져야 그 귀중함을 압니다. 그런 대상이 아직도 많지 않을까요?” 집중해서 사진을 찍다가 생긴 위험천만한 에피소드들도 있다. 2003년과 2005년에 강화도의 전등사 대웅전 처마 밑의 ‘나부상’을 다시 한 번 찍기 위해 갔는데, 거리를 맞추려고 뒷걸음질 치다가 바위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얼굴을 다치고 시계가 뜯어져 날아갈 정도로 크게 넘어졌는데 카메라와 렌즈가 망가질까봐 감싸 안았어요. 결국 카메라는 멀쩡하고 저는 엉망이 됐죠. 허허.” 경상남도에서 관룡사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을 찍을 때는 안전망이 설치돼 있는데도 낙상해서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 사진을 찍을 때 그가 얼마나 집중하는지를 알 수 있는 일화들이다. “사진을 찍는 그 순간에는 피사체와 저밖에 없는 것 같아요. 전 우주와 제가 하나가 돼버리는 거죠. 다른 사람의 말도 안 들리고 주변 상황도 안 보여요. 불교 수행의 한 방법인 삼매에 이르는 것 같은 상태죠. 잡념이 없어져 마음공부도 되고요. 사진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육안으로 보지 못했던 부분이 사진에는 나와 신기할 때도 있고요.”
대중교통을 이용해 전국 방방곳곳의 사찰을 돌아다니는 조 교수는 앞으로도 전통 사찰과 불상 등 문화재 사진을 찍을 생각이다. 또 새로 찍고 싶은 대상도 생겼다. “요즘은 꽃이 찍고 싶더라고요. 꽃이나 경치는 사찰처럼 계절과 시간, 보는 각도에 따라서 다 다르고 멋있더군요. 그런데 비가 오거나 어두워지면 사진을 찍기가 힘들어요. 멋들어지게 찍고 싶은데 실력이 부족하네요. 물론 제가 전문가나 예술인도 아니고 그저 취미로 찍을 뿐이지만…. 그래도 앞으로는 전문적으로 사진 찍는 방법을 배워보고 싶어요. 허허.” “절 사진을 찍으며 프레임을 잡기 위해 뒷걸음질 치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는데, 카메라를 부둥켜안고 넘어져 카메라는 멀쩡하고 저만 다쳤더라고요. 이런 게 사진 찍는 사람 마음인가 봐요. 허허” 본인은 아마추어라고 손을 내두르지만 그가 찍은 사진들은 책을 출간하거나 전시를 열어도 될 정도로 풍부했다. 실제로 2011년 초 사진전도 한 번 열었다. 그러나 조 교수는 전시에는 큰 뜻이 없다고 했다. “분당 지역 병원에 있을 때 퇴임을 앞두고 제자들이 전시를 열자고 해서 사찰 사진들로 전시를 연 적이 있지만, 앞으로 딱히 전시를 열 생각은 없어요. 대신 제가 찍은 사진들로 문화 특강을 해달라는 요청이 있어서 사찰에 대한 강연을 병원 직원들 상대로 열곤 해요.”
자신의 사진보다는 전통 사찰 그 자체를 봐달라는 게 조 교수의 뜻이다. 너무 익숙하기에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사찰들의 모습이 사라지기 전에 꾸준히 기록해 두고 보여주고 싶다는 게 그의 소망이다. “예전에 남대문 사진을 찍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언제든 찍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냥 지나쳤어요. 그런데 불타버렸어요. 이제 다시는 옛 모습을 담을 수 없죠. 그 일이 있고 저는 전문가는 아니지만 기회가 있을 때 부지런히 문화재를 기록해 놔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제 자료가 필요한 사람들도 어딘가에는 있을 테니 원한다면 줄 생각도 있어요. 우리나라 전통 문화재의 현 모습을 후세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조금이나마 저도 노력하고 싶네요.”
“캐논 줌렌즈 삼총사 들고 택시로 절까지” 대중교통만으로 전국 누비는 조 교수의 카메라 사랑 조보연 교수와 사진 얘기를 하다 보면 그의 실력이 준프로급에 올라 있음을 알 수 있다. 프로급 장비를 사용하면서도 운전을 할 줄 몰라 대중교통과 택시를 갈아타며 사진을 찍으러 다니는 조 교수와 사진과 장비에 대한 얘기를 나눠 봤다. - 그간 촬영한 대상 중 “딱 한 곳만 마지막으로 갈 수 있다”고 한다면 가고 싶은 곳은? “영주 부석사다.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바라보는 소백산맥 능선을 촬영하기 위해 석양이 지는 저녁 무렵에 또 가고 싶다. 계절까지 고를 수 있다면 10월말~11월 초 늦은 가을에, 일주문에서 절 입구까지 길 양옆에 길게 늘어선 은행나무의 황금빛을 촬영하고 싶다.” - 사찰-불상 사진을 찍을 때 특별한 주의사항이나 요령이 있다면? “유명 사찰에는 관광객이 많으므로 관광객을 피해 촬영하는 게 좋다. 사찰 촬영은 일종의 기록이므로 하루 중 아무 시간대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개인적으로 흐린 날보다는 밝은 날 촬영을 더 좋아한다.” - 사찰이나 불상 같은 고정물을 촬영할 때는 반드시 삼각대를 쓰라고 권장하는 사진가들이 있다. 삼각대 등 촬영 보조물을 이용하는지? “카메라를 손으로 잡고 주로 촬영하며, 필요한 경우에 한해 삼각대를 사용하다. 특히 망원렌즈를 사용할 때는 카메라의 떨림을 막기 위해 삼각대를 사용한다.” - 사용하는 카메라 기종과 렌즈 종류는? “카메라 바디는 캐논 EOS 5D Mark II이며, 렌즈는 광각 줌은 EF 16~35mm f/2.8 II USM, 표준 줌은 EF 24~70mm f/2.8L USM, 망원 줌은 EF 70~200mm f/2.8L IS II USM 렌즈를 사용한다. 절에 갈 때는 위 세 종류 렌즈를 다 갖고 가지만, 이 중 가장 많이 쓰는 것은 표준 줌 렌즈(24-70 mm f/2.8)이다. 필요에 따라 근접촬영을 위해 매크로 렌즈로 캐논 EF 100mm f/2.8 Macro USM을, 실내 인물 촬영을 위해서는 준망원 단렌즈로 EF 85mm f/1.8 USM 렌즈를 간혹 사용한다.” - 현재 기종을 선택한 이유는? “초기에는 콤팩트 카메라를 사용했고, 이어 캐논 450D 디지털 카메라로 바꿨었다. 450D는 크롭 효과(디지털 카메라의 센서 크기에 따라 렌즈의 실제 화각보다 더 크게 사진이 찍히는 현상)가 있기 때문에, 2007년부터 크롭 효과가 없는 풀 프레임 캐논 5D Mark II를 사용하고 있다. 위의 세 렌즈는 모두 손떨림 방지 기능을 갖고 있어 삼각대 없이 촬영할 수 있다는 점이 편리하다.” - 앞으로 장만하고픈 카메라-렌즈가 있다면? “당장 계획은 없지만 앞으로 가능하다면 300mm급 망원 단초점 렌즈를 구입했으면 한다.” - 대중교통을 이용해 사찰 등을 찾아간다고 했다. 불편하지는 않은지? “불행히도 운전을 못해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운전면허증도 없음). 다행히 우리나라는 대중교통이 잘 발달해 큰 불편이 없다. 버스나 기차로 현지에 도착해 절까지 택시를 이용하거나, 또는 필요할 경우 간혹 택시를 하루 대절해 이용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