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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 ③]사대부의 도끼질부터 미군정의 포크레인질까지

시대는 바뀌어도 원각사 수난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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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56-257호 박현준⁄ 2012.01.16 14:44:14

조선은 성리학(性理學)의 나라였다. 공맹(孔孟)의 가르침보다도 더 이상을 꿈꾸는 주자(朱子)의 가르침에 철저한 나라였다. 따라서 이 가르침과 다른 어떤 사상도 용납될 수 없었다. 이 가르침 아래에서 다른 가르침은 모두 사문난적(斯文亂賊: 유교의 가르침을 어지럽게 하는 무리)이었다. 가장 먼저 핍박을 받은 가르침이 佛氏(석가: 조선시대에 성리학자들이 부른 호칭)의 가르침인 불교였으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신봉한 서학쟁이(西學쟁이, 그리스도교도)들도 줄줄이 순교해야 했다. 동학(東學, 천도교)도 예외는 아니어서 믿음의 길로 가기 위해서는 피의 발걸음을 면할 수 없었다. 돌아보면 더욱 안타까운 것은 실학 또는 청(淸)으로부터 들어오는 새로운 물결도 모두 핍박 받았다는 점이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한 당대의 브레인 삼봉 정도전은 불교의 가르침을 철저히 비판한 ‘불씨잡변(佛氏雜辯)’이란 글을 남겼다. 남을 비판하려면 남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충분히 공부한 후 해야 하는데 요즈음이나 그 때나 큰 차이가 없었는지 정도전이 피상적으로 목소리만 높였는데도 영향력은 컸다. 이러한 분위기 아래서 그나마 왕권(王權)이 강했던 태조, 태종, 세조 때에는 서울 도성 4대문 안에 3개의 사찰이 세워졌다. 동부 연희방 흥덕사(東部 燕喜坊 興德寺), 서부 황화방 흥천사(西部 皇華坊 興天寺), 중부 경행방 원각사(中部 慶幸坊 圓覺寺)였다. 흥덕사와 흥천사는 이름으로만 남고, 그나마 원각사는 훌륭한 탑(塔) 덕분에 그 터는 살아남았다. 종로 2가 탑골공원. 이곳이 세조가 다시 세운 원각사(圓覺寺) 옛터다. 오늘 방문지다. 공부 않고 욕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지하철 종로3가역 1번 출구로 나선다. 종로2가 방향으로 걷기를 5분이 안 되어 삼일문이라고 한글 편액이 걸린 대문이 보인다. 본래는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이 쓴 편액(扁額)이 걸려 있었는데, 2000년대 들어 민족단체가 뜯어내고 독립선언문 글자를 집자(集子)하여 새로 걸었다 한다. 문의 규모나 편액의 규모나 다 왜소하게 느껴진다.

새해를 맞아 찾아온 공원 안은 영하의 날씨에 썰렁하다. 어찌나 추운지 카메라도 얼었다. 몇 년 전 가을 이곳을 두 번 찾았었다. 탑골공원에 대해 어르신들의 집결지, 홈리스들의 쉼터라는 선입견이 있었기 때문에 꺼림칙한 마음으로 이곳을 찾았지만 의외로 시내 여느 공원과 차이가 없었다. 술 먹는 이들도 없고, 고성방가 하는 이들도 없어 편안한 마음으로 공원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나와 같은 선입견을 가진 주변 지인들과 함께 다시 한 번 찾았었다. 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마주치는 것이 팔각정이다. 조선말에 세운 건물인데 서울시 유형문화재 73호다. 옆에는 ‘고종 때 총세무사(總稅務士)로 우리나라에 와서 일한 Brown. J. M의 건의에 의해 최초로 근대적 공원이 설립되었다(1905 또는 1906년)’는 내용과 함께 1919년 이곳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됐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1919년 기미년(己未年) 3월 1일, 이곳에서 기미독립선언서(己未獨立宣言書)가 낭독됐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이는 해주 출신의 젊은 학도 정재용이었다. 그렇다면 33인은 당시 어디에 계셨는가? 많은 이들이 파고다공원에 모여 독립을 선언하면 사상자가 속출할 것을 걱정해 33인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때에 일에 대해 훗날 정재용은 백운대 정상 바위에 글자를 새겨 놓았다. 백운대 정상 태극기 바로 앞 바위 바닥에 있으니 꼭 눈여겨보시라. 기미독립선언의 일을 적음: 기미년 2월 10일 조선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이는 경성부 청진정 육당 최남선임 경인생, 기미년 3월 1일 탑동공원에서 독립선언 만세를 선도하여 외친 이는 해주 수양산 사람 정재용임 병술생 (獨立宣言記事 己未年 二月十日 朝鮮獨立宣言書 作成 京城府淸進町 六堂崔南善也 庚寅生. 己未年 三月一日 塔洞公園 獨立宣言書 萬歲導唱 海州首陽山人 鄭在鎔也 丙戌生.) 효녕에 나타난 기적으로 부활했더니 연산군의 흥청망청 기생잔치로 치욕 팔각정 뒤로는 원각사탑이 눈부시게 서 있다. 국보(國寶) 2호다. 이 탑은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일까? 지금은 국립문화재연구소에 보관돼 있는 개풍군 경천사 10층탑과 형제처럼 닮은 탑이다. 경천사탑은 고려 충숙왕 때 원나라 라마교 양식으로 세워진(1348년) 탑인데 이 탑을 모델로 해 원각사를 세울 때 세웠을 것이다. 국내에서는 드물게 대리석 탑이다. 그러다 보니 풍우에도 약하고 새들의 배설물에도 쉽게 풍화돼 유리 케이스 속으로 들어가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 언젠가 눈에 거슬리지 않는 차단 기술이 나와 가까이 대할 수 있으면 좋겠다. 본래 탑은 짝수로 세우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탑은 10층이다. 자세히 보면 아래 3층과 위의 7층은 분리된 모습의 탑임을 알 수 있다. 3+7 홀수의 결합인 것이다. 그런데 이 탑의 위 3층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땅바닥에 내려져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임진란 때 일본인들이 훔쳐가려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개연성(蓋然性)이 있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경천사 10층탑도 일제에게 우리의 국권을 잃은 그 다음해에 일본인들이 무단으로 훔쳐 갔던 아픈 내력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왔지만 그 때 파손 상태가 너무 심해 아직도 후유증이 심하다. 이렇게 내려져 있던 위 3층을 올린 이들이 미군정 때 미 해군 공병대였다. 1995년 초 신문기사를 보면 미국인 크네즈(Eugene I Knez)박사에게 은관문화훈장을 수여한다는 내용이 있다. 이 사람은 미 군정청 교화국의 교육문화 담당관이었는데 해군 공병대 라이언 소위를 움직여 땅바닥에 있던 원각사탑 3개 층을 크레인을 동원해 올려 줬다는 것이다. 또 6.25때는 국립박물관 수장품을 피난시켜 준 공로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안타까운 것은 이 탑에 대해 아무 지식도 없는 사람들이 토목공사 하듯 얹어 놓았다는 점이다. 그것을 지켜보았던 학자나 문화재 관계자들도 그때는 고맙기만 했을 것이다. 몇 년에 걸쳐 발굴했어야 할 무녕왕릉을 한 나절도 안 되는 시간에 발굴한 수준보다도 훨씬 이전의 일이었으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조선왕조실록에 원각사에 대한 기사는 무수히 많다. 그러나 다른 많은 기록은 모두 버리고 생겨남과 사라짐만 보려고 한다. 왜 원각사이며 왜 세웠는가는 세조실록 10년(1464년) 5월 2일조에 기록돼 있다. “근일에 효령대군(孝寧大君)이 회암사(檜巖寺)에서 원각 법회(圓覺法會)를 베푸는데, 여래(부처)가 보이고 단 비가 내렸다. 노란 승복의 승려 3인이 탑을 돌며 정근(精勤)하는데 그 빛이 번개와 같고, 대낮과 같이 뻗었으며 채색 안개가 공중에 가득 찼다. 사리 분신(舍利分身)이 수백 개였는데, 곧 그 사리(舍利)를 함원전(含元殿)에 모시니, 또 분신(分身)이 수십 매(枚)였다. 이 같이 기이(奇異)한 상서로움은 실로 만나기 어려운 일이므로, 다시 흥복사(興福寺)를 재건하여 원각사라 하고자 한다.” 세종의 작은 형이며 세조 자신의 큰 아버지인 효령대군은 출가해 승려가 됐는데 양주 회암사에 주석하면서 원각경으로 법회를 열었다는 내용이다. 그 결과 신묘한 일이 일어나니 세조가 옛 고려 적 절 흥복사를 다시 일으켜 원각사를 세웠던 것이다. 그런데 성종 이후로는 불교 탄압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승려에겐 4대문 안 출입도 금지됐던 시대였는데 드디어 연산군 때에 이르러 일이 벌어졌다. “장악원(掌樂院)을 원각사에 옮기어, 가흥청(假興淸) 2백, 운평(運平) 1천, 광희(廣熙) 1천을 여기에 상사케 하고, 총률(摠律) 40인으로 하여금 날마다 가르치게 하라.” (移掌樂院于圓覺寺, 假興淸二百、運平一千、廣熙一千常仕於此, 令摠律四十人, 逐日敎之) 원각사를 풍악과 기생 양성소로 만든 것이다. 기생들을 흥청, 운평, 광희로 나누고 그들의 신상을 장화록(藏花錄: 꽃을 보관한 책이라 할까)에 기록했다. 그때의 ‘흥청’에 짝을 맞춘 표현이 지금도 남아 있으니 ‘흥청망청’이 그것이다. 연산군은 우리 국어에 자랑스럽지 못한 족적(足跡)을 남긴 것이다. 중종이 슬쩍 비켜서자 유생들이 불지르고 이런 무도한 사람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그 뒤를 이었다. 그는 중종이었다. 그가 왕노릇 하던 시기에 흥천사, 흥덕사, 원각사는 자취도 없어졌다. 유생들이 불을 지르고 나라에서 부순 것이다. 원각사를 없애기 전 잠시 한성부 관청 건물로 사용한 적이 있는데 우두머리가 이유 없이 급사(急死)하는 바람에 백성들의 인심이 흉흉해 다른 곳으로 옮기기도 했다. 원각사가 쓰러지는 때의 정황이 중종실록에 기록돼 있다. 원각사를 부수자는 간언에 ‘어찌 꼭 전교를 받아야 하느냐(此何必待傳敎)’며 책임을 피한다. 그 뒤 세 절터는 사대부들에게 나눠진 채 사라져 갔다. 그나마 원각사는 우뚝한 탑과 비석 덕분에 먼 뒷날 공원으로 살아날 수 있었으나 교종과 선종의 본산이었던 흥천사, 흥덕사는 위치만 짐작할 뿐 주춧돌 하나 찾기 어렵게 됐다. 옆 전각에는 보물 3호 원각사비(圓覺寺碑)가 서 있다. 성종 2년(1471년)에 세운 원각사 내력을 적은 비석이다. 귀부, 비신, 이수가 걸출한 비석이다. 아쉬운 점은 글이 마모되었다는 점이다. 전면 비문(碑文)은 김수온이 짓고 성임이 썼으며 뒷면 음기(陰記)는 서거정이 짓고 정난종이 썼는데, 다행히 속동문선(續東文選)에 그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강희맹이 전서(篆書)로 쓴 머리글씨(碑額)는 글씨가 굵은 관계로 마모되지 않았다. 서예(書藝) 하는 이들에게는 전서체의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이제 울타리를 돌면서 독립선언문도 읽고, 일중 김충현 선생의 글씨도 눈여겨보면서 서쪽 측문으로 탑골공원을 나선다. 어디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 곳 원각사 옆 대사동(큰 절골, 탑골)에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선생이 22세 이후부터 터를 잡고 살았다. 이후 연암을 중심으로 찬란한 정신세계가 펼쳐졌으니, 시와 글과 음악과 풍류를 알며, 이 땅에 새로운 실사구시 이용후생(實事求是 利用厚生)의 물결을 일으킨 실학파(實學派)가 탄생한 것이다. 그들은 희게 보이는 원각사탑을 본받아 백탑시사(白塔詩社)를 결성해 시와 사상을 가르치고 나누면서 정조(正祖) 시대를 살찌워 갔다. 박지원, 홍대용, 정철조, 서상수, 유금, 이덕무, 박제도, 이희경, 유득공, 박제가, 원유진, 이서구, 서유본, 서유구 등이었는데 이들과 이들의 문인, 후손들이 끼친 조선 후기 문화와 사상의 꽃밭은 이 시대의 우리들에게도 참으로 고마운 선물이다. 여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으니 최근 TV극의 소재가 된 협객 백동수(白東脩)이다. 그는 당대의 남아였으며, 정조의 명을 받아 이덕무, 박제가와 함께 조선 무예를 집대성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완성한 사람이다. 이 책에 실린 무예 시범은 백동수의 시범으로 이뤄진 것이다. 이덕무는 백동수의 누이와 결혼했으며, 박지원의 호 연암은 백동수가 알려 준 황해도 금천(金川)의 연암협(燕巖峽)에서 따온 것이니, 백동수는 백탑파에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다. 왕좌의 뒷그림 ‘일월오봉도’의 뜻은? 이제부터 인사동 안내지도를 따라 가보려 한다. 공원 측문에서 나와 길을 건너면 새로 꾸민 남인사(南仁寺) 마당이 있다. 가끔 남미 인디오들이 흥겨운 음악을 연주하는 곳이다. 무대 배경은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이다. 이 그림은 궁중에서 임금이 자리하는 뒷배경으로 쓰는 그림이다. 1만 원권 지폐 앞면 세종대왕님의 배경 그림도 일월오봉도이다.

그 그림을 이곳에 그려 놓은 것을 보면 그림 앞에 앉아 잠시라도 임금의 마음을 가져 보라는 배려인가 보다. 그림 뜻이나 유래는 분명치가 않다. 한자 문화권 어디에도 없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그림이다. 기법도 다분히 민화(民畵) 같다. 전문가들의 해석 중에는 ‘시경의 내용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시경(詩經) 소아(小雅)에는 천보(天保)라는 부(賦)가 실려 있다. 마지막 구(句)를 보면 일월오봉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如月之恒(여월지긍) : 달의 상현달 같고 如日之升(여일지승) : 해의 떠오름과 같습니다. 如南山之壽(여남산지수) : 남산처럼 영원하시어 不騫不崩(불건불붕) : 이지러지지 않고 무너지지도 않습니다 如松伯之茂(여송백지무) : 소나무와 잣나무의 무성함처럼 無不爾或承(무불이혹승) : 임금님의 이어짐은 끝이 없을 것입니다 이제 인사동(仁寺洞)으로 올라간다. 남인사 마당에서 잠시 오르면 좌측에 환전소가 있고 이어서 작은 골목이 있는데 골목 안쪽으로 교회가 보인다. 110년 역사를 가진 서울시 유형문화재 130호 승동교회(勝洞敎會; 인사동 137)다. 초기에는 고달픈 하층민들이 많아 ‘백정(白丁)교회’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3.1운동에 이 교회 학생들이 적극 가담해 독립운동의 현장이기도 하다. 청련면려회장 김원벽을 비롯해 서울 시내 주요 학생 대표들이 이곳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나눠 갖고 배포해 다음날 만세를 불렀던 터전이었다. 그 날의 독립선언서 인쇄본은 우이동 도선사 오르는 길 입구에 있는 천도교 봉황각 앞 건물에서 볼 수 있다. 이 선언문이 배포되기까지는 우여곡절도 있었다. 인쇄 중에 조선인 순사 신철에게 발각됐던 것이다. 천도교 측 대표 최린 선생이 어쨌는지 무마해 3월 1일 선언문은 빛을 보게 됐다. 3월 12일에는 담임 차상전 목사가 문일평 선생 등과 함께 보신각에서 12인등의 장서(12人等의 狀書)를 발표해 독립정신을 키웠다. 100년 된 붉은 벽돌의 본당 건물도 운치가 있으며, 가꾸어 놓은 앞마당에는 대나무를 심은 쉼터도 있으니 테이크아웃 커피 한 잔 들고 들려보시기를 권한다. 정겹게 보이는 목욕탕 굴뚝을 보면서 뒷문으로 나서면 오랜 인사동 골목길이다. 음식점들이 많은데 이문(里門)이라는 상호가 보인다. 옛 화신백화점 자리에 세워진 종로타워 뒤에도 이문설렁탕집이 있다. 흔히 사람들이 이문동에 있는 설렁탕집 분점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문은 그런 뜻이 아니다. 옛 서울 한성부에는 경찰서에 해당하는 포도청과 지구대에 해당하는 경수소가 있었는데, 세조 때 양승지의 건의에 따라 중국의 이문 제도를 본받아 마을입구를 스스로 지키는 이문(里門)을 설치하게 된 것이다. 그 흔적이 남은 것이 이문동(里門洞), 쌍문동이며, 이곳도 종로 운종가로부터 대사동 마을을 지키려했던 이문(里門)이 있던 곳이기에 이문이라는 추억의 이름이 상호에 남은 것이다. 골목을 빠져 나와 공평동(인사동 4거리에서 종로구청 쪽) 길로 나온다. 공평빌딩 옆에 씨티은행 빌딩이 있는데 1층에 하나투어가 있다. 이 빌딩 앞마당에 조그마한 기념물이 서 있다. 충정공 민영환 선생 자결터이다. 자필로 쓰신 ‘이천만 동포에게 고하는 글’이 조그맣게 새겨져 있다.

‘영환은 죽어도 죽지 아니하고 구천 아래에서 여러 분을 돕겠다(泳煥 死而不死 其助諸君於九天地下)’는 선생의 목소리가 찬 바람 속에 서릿발처럼 들려온다. 이 앞길을 지나는 사람 중 이곳이 을사늑약(乙巳勒約)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충절을 보이신 선생의 마지막 자리였음을 아는 이 몇이나 될까? 너무 가까워서 잊고 사는 우리들 좌측 골목으로 들어가는 길 하나 사이에 두고 태화빌딩이 있다. 이곳은 이문안(里門內)이라 부르던 지역인데 본래 중종반정의 2등공신 구수영의 집터였다. 마당에 태화정(太華亭)과 부용당을 지었다 한다. 그 후 100여년 뒤 인조의 잠저(潛邸: 왕위에 오르기 전 거처)였으며 안동 김씨 김흥근(金興根)이 살다가 헌종의 후궁 경빈 김 씨가 세상을 떠나자 위패를 모시는 순화궁(順和宮)이 됐다. 순화궁이 미동(渼洞)으로 옮긴 후에는 매국노 이완용이 살았다고 한다. 그 후 명월관 별관인 태화관이 이곳에서 영업을 시작했다. 기미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은 이 곳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것이다. 건물 앞에는 순화궁터를 알리는 표지석과 독립선언의 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필자가 고등학생 때에는 태화빌딩이 신축되기 전이었는데 학생들 모임의 장소로 제공되기도 했다. 그 때 독서모임을 같이 하던 예쁜 여학생들은 모두 어디에 있을까? 태화빌딩 좌측에는 기업은행이 자리한 하나로빌딩이 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1896년(建陽 元年)에 세운 서울 중심점 표지석이 있다. 태조 때 서울 도성을 쌓고 이곳을 그 중심점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서울도성 답사길에 오르는 이들은 모름지기 한 번 다녀가시기를 권한다. 이제 인사동 사거리 쪽으로 잠시 내려오면 좌측에 ‘일마레’라는 이탈리아 음식점이 있고 그 골목으로 들어가면 백상빌딩이 있다. 그 화단에 율곡 선생의 집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는데 심지어 정원수 하나 남은 것이 없어 황량하다. 골목길을 빠져 나와 인사사거리에서 안국동 방향으로 향한다. 예전 이 길의 남쪽은 대사동(大寺洞), 북쪽은 관인방(寬仁坊)이었다. 1914년 일제는 우리나라 행정구역을 재편하면서 인(仁)자와 사(寺)자를 뜻 없이 결합해 인사동이라는 지명을 만들었다. 애석하다. 5분 정도 걸으면 우측으로 수도약국이 나타나고 여기에서 우회전하면 잠시 후 좌측 골목에 경인미술관이 있다. 조선말 박영효 대감의 집터다. 건물은 남산 한옥마을로 옮겨가고 미술관과 찻집으로 바뀌었다. 20m쯤 나아가면 민가다헌(閔家茶軒)이라는 고풍스런 한옥이 좌측에 나타난다. 민속자료 15호인 1930년대 집인데 찻집과 음식점으로 활용되고 있다. 화신백화점을 설계한 우리나라 최초의 건축가 박길룡의 작품이다.

바로 앞으로는 붉은 벽돌로 지은 천도교 중앙 대교당 건물이 있다. 1921년에 완공된 서울시 유형문화재 36호다. 3.1운동 거사를 도모했던 구본당(덕성여중 자리)에서 옮겨온 그 시대를 대표하는 건물이다. 앞마당에는 손병희 선생의 사위 방정환 선생이 1923년 5월 1일 어린이날을 선포한 ‘세계 어린이 운동 발상지’ 기념비가 서 있다. 어느 날 어떤 선배님과 함께 인사동 나들이에 나섰는데 이곳 천도교 대교당에 오니 그는 감회에 젖었다. 40년 전 자신이 결혼식을 올린 곳인데 그 후 한 번도 이곳에 와 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런 게 사람인 듯 싶다. 코앞에 두고도 마음을 내지 못하면 먼 곳에 있는 곳보다 더 멀다. 사람 사이도 그런 게 아닐는지. 이제 대교당 정문을 나와 큰 길로 나선다. 낙원아파트에서 가회동 방향으로 가는 길이다. 길 건너에는 운현궁(雲峴宮)이 있다. 흥선대원군의 집, 고종이 자란 그 곳이다. - 이한성 동국대 교수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마애불과 문화유적지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갑니다.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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