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8호 대구 = 이재춘 기자⁄ 2012.02.06 10:29:27
종부(宗婦)의 삶에는 책임과 의무만큼 명예도 뒤따른다. 1년에 무려 한 달가량 제사를 지내야 하는 고단한 삶이지만 조상을 모시는 중책을 맡다보니 웃어른도 그들을 대할 때는 예우를 다한다. 안동 하회마을 양진당의 이정숙(60) 씨는 스물넷에 풍산 류씨 대종가의 맏며느리가 됐다. 막중한 책임감을 지고 새 종부가 들어왔다는 인사를 드리며 마을을 돌던 때였다. 연세가 아흔이 넘은데다 병환까지 있던 집안의 한 어른이 종부를 향해 무릎을 꿇고 반갑게 맞았다. 장차 종가를 지키고 조상을 모실 종부에 대한 예의였다. “또 다른 어르신은 다른 사람에게 저를 칭할 때 ‘저 어른’이라고 하는 겁니다. 황송한 일들이었지만 무겁기만 했던 부담감이 명예로운 책임감으로 바뀐 계기가 됐죠.” 종부는 결혼 후 몇 달만 시집살이를 한 뒤 풍산금속에 취업한 남편 류상붕(62) 씨를 따라 아들 둘과 함께 줄곧 울산에서 살았다. 그리고 남편의 퇴직과 함께 2006년 안동으로 돌아와 본격적인 종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종부는 1년에 불천위(不遷位)와 4대 봉사 등을 모두 합해 20차례가 넘는 제사를 모신다. 제사에 참여하는 제관(祭官)만 100명에 이르니 장만하는 음식 양이 엄청나다. 고단한 일이지만 줄일 생각은 없다.
“번거롭다는 이유로 격식을 줄인다면 조상이 물려준 소중한 정신문화가 결국엔 단절되고 말겁니다. 누군가 이것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내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종부는 진성 이씨, 퇴계 선생의 15대손이다. 이만도 선생과 김락 여사 등 20명이 넘는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집안에서 났다. 전통의 계승을 이처럼 중시하는 까닭은 출중한 집안 배경과도 관계가 있다. “힘든 일 맡길 며느리 맞아야 하는데…” 혼기 찬 아들이 둘 있으니 걱정은 자연스레 다음 종부에게로 옮겨간다. 종부는 자신의 며느리가 ‘그저 우리 문화를 이해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고된 일을 맡기는 만큼 세속의 욕심은 내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며느리 욕심은 없지만 가문의 부흥에 대한 욕심은 크다. 하회마을에서 가장 먼저 터를 잡았고 역사의 중심에서 전통을 자랑하며 수많은 귀빈을 영접한 이곳 양진당을 명품 고택으로 가꾸는 것이 종부의 숙원이다. 하회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조상 제사를 모셔온 양진당 대청은 그 역사적인 가치는 물론 건축학적으로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곳을 조화롭게 가꿔서 국빈이 묵고 갈 수 있는 특별한 공간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전통 유산을 온전히 지켜낸다는 의미를 넘어 세계만방에 과시할 자랑스러운 문화공간으로 승화시키자는 이야기다. 독립투사 집안에서 태어나 하회마을 대종가를 지키며 살아온 종부의 당찬 기상이 느껴지는 포부다. “문화유산 찾을 땐 기초예절부터” 풍산 류씨 대종가 16대 종손 류상붕 씨 “이리 오너라, 여기가 유원지인줄 아시오?” 안동 하회마을을 대표하는 풍산 류씨 대종가의 16대 종손 류상붕(62) 씨가 혀를 차며 말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고 관광객이 많이 몰리더니 마을의 기초질서가 무너졌다는 것이다. 하는 자자손손 대대로 조상이 물려준 소중한 옛 것을 지키며 살아가는 곳이다. 방문객들이 ‘문화재로서의 가치’와 함께 ‘사람이 살고 있는 집’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존중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종손은 풍산 류씨 대종가를 지키는 자부심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마을의 질서를 깨뜨리는 일부 몰지각한 관광객의 행태를 먼저 꼬집었다. 하소연이 계속되는 사이 “이리 오너라” 하는 호통소리가 대문 밖에서 집안으로 울려 퍼졌다. 60대로 보이는 한 노신사가 양반 흉내를 내는 듯 했다. 고택 앞에서 누구나 한번쯤 해봄직한 장난이지만 소리가 커도 너무 컸다. “저것 보세요. 낯선 사람이 자기 집 앞에서 이리 오라고 고함을 지른다면 좋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제 이야기는 저렇게 기본도 안 된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겁니다.” ‘마루에 올라서지 말라’는 경고 문구가 버젓이 있는데도 마구 올라서는가 하면 신발도 벗지 않고 막무가내로 집안에 들어서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제사를 지내는 대청마루에서 단체로 잠을 자는 외국인 관광객도 있었다고 한다. 종손은 “이 모든 것이 전통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관람하는 법을 몰라서 그런 것”이라며 “마을 곳곳에 안내원을 두거나 입구에서 기초 예절 교육이라도 한 다음 관광객을 들여보내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마을 입구에서 입장료를 냈다는 이유로 이곳을 하나의 유원지쯤으로 여기는 것이 가슴 아픈 현실”이라며 “하회마을은 엄연히 전통 문화를 지키는 사람들이 대를 이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600년 22대 내려온 유서깊은 집 하회마을 양진당의 역사
하회마을 풍산 류씨 대종택은 600여년에 걸쳐 22대나 내려온 유서 깊은 집이다. 조선시대 대유학자인 겸암 류운룡(柳雲龍, 1539∼1601)의 종택이다. 류운룡의 아버지 입암 류중영(柳仲??, 1515∼1573)과 함께 불천위를 모시는 명문가다. 입암 선생의 둘째 아들이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이며 분가해 오늘날의 충효당(忠孝堂) 종가가 됐고 불천위로 제향되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한 집에서 세 명의 불천위가 난 것이다. 보물로 지정된 이 집 안내 표지판에는 양진당(養眞堂)이라고 적혀 있다. 양진당은 ‘자신의 본성을 잘 기른다’는 의미이며, 겸암 선생의 6대손인 류영(柳泳, 1687∼1761)의 아호다. 그것을 하회 풍산 류씨 대종택의 당호로 쓰고 있다. 하회 북촌택을 대표하는 가옥으로, 앞면 4칸, 옆면 3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집이다. 비교적 높은 축대 위에 세워졌고 건물 둘레에는 쪽마루와 난간이 설치됐으며, 대청 정면 3칸에는 4분합 여닫이문이 달렸다. 하회마을 하회마을(중요민속자료 제122호)은 풍산 류씨가 600여 년간 대대로 살아온 한국의 대표적인 동성마을이며, 기와집과 초가(草家)가 오랜 역사 속에서도 잘 보존된 곳이다. 마을 이름을 하회(河回)라 한 것은 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 안고 흐르는 데서 유래됐다. 하회마을은 풍수지리적으로 태극형·연화부수형·행주형으로, 이미 조선시대부터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 유명했다. 하회마을에는 서민들이 놀았던 ‘하회 별신굿 탈놀이’와 선비들의 풍류놀이였던 ‘선유줄불놀이’가 현재까지도 전승되고 있고, 우리나라의 전통 생활문화와 고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는 문화유산들이 잘 보존돼 있다. 하회마을은 지금도 주민이 살고 있는 자연마을이다. 한말까지 350여 호가 살았으나 현재는 150여 호가 남아 있다. 마을은 총 127개 가옥과 437개 동으로 이뤄져 있으며, 127개 가옥 중 12개 가옥이 보물 및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