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1호 박현준⁄ 2012.02.13 10:45:57
나는 의예과 시절부터 수영 훈련을 받았다. YMCA에서 초급, 중급, 고급 인명 구조원 훈련을 받았고, 마지막에는 대한 적십자사에서 수영 강사 강습을 했고, 서울 운동장 수영장에서 수료했다. 이 당시 YMCA는 우리나라 수영의 산실이었다. 내가 지금은 고인이 된 조오련 선수를 만난 곳도 여기였고, 조 선수가 아시아의 물개로 도약하는 데도 YMCA 수영장이 기여했다. 인명구조원 동호회인 돌핀 클럽 회원이 있는데, 그는 강원도에 놀라 갔다가 여자가 물에 빠지니까 그녀의 애인인 군인이 구하러 들어갔다가 둘이 모두 익사 지경에 이른 광경을 목격했다. 이 회원이 들어가 양팔에 한 사람씩을 끼고 나오다가 큰 파도가 치는 바람에 한 명을 놓쳐 다시 들어갔지만 이미 늦어 남성이 익사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했다. 그는 “주위에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도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보기만 하고 도와주지를 않더라”고 얘기했다. 나는 본과 3학년 여름방학 때 타워 호텔에서 인명 구조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 당시 타워 호텔 수영장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수영장으로, 시내와 가까워 항상 많은 사람들이 넘쳐났다. 수영장에 세워진 사람 키 높이의 감시대에 올라가서 보면 가관이었다. 수영장은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고, 여기저기서 노란 물이 퍼져나가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수영장 안에서 오줌을 누고 있는 것이다. 남자 여자 구분도 없었다. 이 광경을 보면 수영장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싹 달아나 버렸다. 인명 구조원의 의무는 막대하다. 얕은 수영장이라도 자주 사고가 나기 때문이다. 주의 깊게 보고 있는데 한쪽에서 허우적거리는 여성을 봤다. 가끔 장난을 치는 사람도 있지만 좀 심상치가 않았다. 바로 옆에 사람들이 있고, 물 깊이가 허리 높이보다 조금 더 높은 편이지만 위에서 보니 장난과는 확연히 달랐다. 급히 내려가 그 여성을 끌고 올라와 보니 물을 많이 먹은 상태였다. 살아난 여인은 고맙다는 소리는커녕 “귀걸이가 없어졌다”고. 괘씸한 생각에 수영장 바닥을 훑었더니 이게 웬걸, 귀금속-시계가 수두룩. 거금을 들고 술집으로 직행 다행히 인공호흡 끝에 살아났는데 원인을 알아보니 콜라를 먹고 물에 들어갔다가 트림을 하면서 사래가 들리고 그 틈에 물을 많이 먹은 것이었다. 깨어나서 일어나더니 자기 귀걸이가 없어졌다고 찾아달라는 것이다. 비싼 거라나? 살려준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은 안 하고 귀걸이 걱정이라니…. 사람도 많고, 찾기가 어렵다고 하고 돌려보냈다. 믿거나 말거나 인공호흡이긴 했지만 여성과 키스한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날 폐장 뒤 물속을 한 번 훑어보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어 대형 수영장에서 가끔 사용하는 진공 흡입기를 달고 물속을 훑어나갔다. 한 30분 작업 끝에 망 속을 보니 안경, 콘택트렌즈는 물론 반지, 시계, 귀걸이 등 각종 물건이 수북이 나왔다. 우리는 이것들을 들고 청계천에 나가 팔았는데 그 당시 50만원을 받았다. 당시 전공의 봉급이 5만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큰돈이었다. 우리는 생명을 구해준 대가라고 좋아하며 밤늦게까지 회식을 했다. 다음에도 가끔씩 수입을 올린 것은 물론이었다. 왜 그때는 주인에게 돌려줄 생각은 하지 못했을까? 포경수술이 쉽다고? 잘못 자르면 찌그러지고 아프고… 나는 소아과 의사라 수술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4학년 임상 실습 시 원주 병원에 한 달 동안 임상실습을 나갔는데 당시 외과 의사가 적어 매일 밤을 새면서 조수로서 간단한 수술을 도왔다. 의과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입대했고, 공군 장교로 임관된 나는 대전에서 첫 근무를 시작했다. 몇 명 안됐지만 병원 단위였다. 학교 선배인 외과 전문의가 계셔서 가끔 수술 조수로 많은 것을 배우는 기회도 됐다. 그 당시 가장 많이 했던 수술은 포경 수술이었다. 병원을 가기엔 경제 형편이 어려운 사병들이 많았으므로 이 수술을 받으러 오는 병사가 이어졌다. 세상에 쉬운 수술이란 없다. 포경수술이 아무리 간단하다고 해도 문제가 많이 생기곤 했다. 한 쪽을 너무 짧게 해 성기가 한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고, 발기 시 통증을 느끼는 경우까지 있었다. 아니 있어야 할 맹장이 왜 없지? 맹장 수술을 간단한 수술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외과 의사들은 맹장 수술을 완벽히 하면 외과 의사로서 자격을 갖추게 된다고 말할 정도로 단순한 수술이 아니다. 평소에는 외과 군의관이 있어서 우리는 단순히 조수만 서면 됐지만, 어느 휴일엔 전공 군의관이 서울로 올라가 자리를 비웠는데 급성 맹장 환자가 발생했다. 운 나쁘게도 당일 당직은 바로 나였다. 다른 곳으로 후송시킨다 해도 멀리 떨어진 조치원 육군 병원으로 보내야 했다. 지금은 미국에 거주하는 당시 동료와 상의한 결과 우리가 해보기로 결심했다. 척추 마취를 하고, 맹장 수술을 자신있게 시작했다. 피부를 절개하고 안으로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는데 맹장이 있어야 할 자리에 맹장이 보이지를 않았다. 시간은 자꾸 지나고 맹장은 찾을 수 없어 당황스러웠다. 복부에 힘이 주어지니까 장이 외부로 삐져나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장을 다시 넣으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우리는 조치원, 육군병원에 급히 연락을 했으나 외과 군의관이 없다고 했다. 수소문 끝에 선배 군의관 집에 연락이 되고 환자의 환부에 거즈를 물에 적셔서 대고 구급차로 그야말로 눈썹을 휘날리면서 달려갔다. 맹장은 뒤로 돌아가 있었다. 수술이 끝난 뒤 선배님으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듣고 돌아왔다. 돌아와서 10시간 이상 잠을 잤으니 얼마나 긴장했었는지….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아찔하다. - 설준희 세브란스심혈관병원 심장웰네스센터장 / 운동치료클리닉 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