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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를 찾아서 ③ 학봉종가]‘애국 도박’으로 재산 날리고 ‘유교 경영’으로 IT 일으키니…

500년 면면히 내려오는 안동 학봉종택의 나라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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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63호 대구 = 박정우 기자⁄ 2012.02.27 11:46:39

임진왜란 때 왜군을 맞아 장렬히 싸우다 순국한 학봉 김성일(金誠一, 1538~1593년) 집안. 이 집안의 애국정신은 그 직계 후손들과 정신적 자식인 제자들에게 어김없이 전해진다. 학봉의 퇴계 학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제자이자, 학봉의 11대 종손인 김흥락은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해 정부에서 훈장을 받은 제자만 60명이나 배출했고, 학봉의 직계 후손들 중에서도 무려 11명이 훈장을 받았다. <조용헌 저 ‘5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중에서> 드라마틱한 반전, 파락호 김용환 학봉의 13대 종손 김용환(金龍煥, 1887∼1946년)은 안동에서 악명 높은 파락호였다. 당시 학봉 집안은 사방 십리 땅을 전부 소유했을 만큼 엄청난 부를 축적했는데, 종손이 노름에 빠져 그 많은 가산을 모조리 탕진한 것이다. 김용환은 안동 일대 노름판에는 모조리 끼었다. 초저녁부터 노름을 하다가 새벽녘이 되면 판돈을 모두 걸고 마지막 베팅을 했다. 베팅에 실패하면 도박장 주변에 잠복해 있던 수하들을 시켜 판돈을 덮치는 수법까지 쓰곤 했다. 그렇게 망나니짓을 하다 결국 종갓집을 남의 손에 넘겼다. 종가 재산으로 내려온 전답 18만 평(현재 시가 200억 원)과 함께 돈 될 만한 것은 모두 팔아넘기다 사당의 신주까지 팔아치우려는 것을 문중 자손들이 뜯어말린 것도 여러 차례. 급기야 무남독녀 외동딸이 시댁에서 받은 장롱 구입비까지 가로채 노름으로 탕진했다.

딸은 빈손으로 갈 수 없어 집에서 쓰던 헌 장롱을 들고 울며 시댁에 갔다. 시댁 어른들은 “나쁜 귀신이 붙어 왔다”며 그 장롱을 부수고 태웠다. 비정한 아비는 죄지은 것도 없이 주눅 들어 살 수밖에 없던 딸의 고난도 모른 척했다. 동네에서는 “학봉 집안사람들과는 교제도 하지 말라”고 했다. 사람 둘만 모이면 사랑방에 모여서 한다는 이야기가 온통 학봉 종손 뒷담화였다. 오죽했으면 ‘양반동네 소동기’라는 책의 저자인 윤학준이 근대 한국의 3대 파락호로 흥선대원군 이하응, 1930년대 형평사(衡平社) 운동의 투사였던 김남수(金南洙), 그리고 학봉 종손 김용환을 꼽았을까. 김용환은 해방 다음 해인 1946년 세상을 떠났다. 임종 무렵 그의 오랜 친구가 “이제는 말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당연한 일을 한 것”이라며 아무런 말도 말 것을 당부하고는 비밀을 가슴에 묻은 채 눈을 감았다.

이후 여러 증언과 자료를 통해 노름빚으로 탕진한 줄만 알았던 학봉 집안의 재산이 만주 독립군 군자금으로 흘러들어간 사실이 드러났다. 파락호 노름꾼 김용환이 만주에 독립자금을 댄 독립투사였음이 사후에야 밝혀진 것이다. 그가 전 재산을 털어 남몰래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것은 할아버지 대의 굴욕 때문이다. 조부 김흥락은 사촌이기도 한 의병대장 김희락을 숨겨줬다가 발각돼 왜경에 의해 종가 마당에 꿇어앉는 치욕을 겪었다. 이를 목격한 어린 김용환은 큰 충격을 받았고 그때 이미 항일운동에 몸 바칠 것을 각오했던 것이다. 그는 독립 자금을 모으기 위해 철저하게 노름꾼으로 위장한 삶을 살았다. 그래야 일제의 눈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평생 노름꾼, 주색잡기, 파락호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산 것이다. 그리고 1995년, 사후 반세기가 흘러서야 우리 정부는 그의 이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의 외동딸은 파락호로 알고 평생을 원망했던 아버지가 건국훈장을 추서 받던 날, 존경과 회한을 담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라는 제목의 서간문을 남겼다.

“… 그럭저럭 나이 차서 십육세에 시집가니 청송 마평서씨문에 혼인은 하였으나 신행날 받았어도 갈 수 없는 딱한 사정. 신행 때 농 사오라 시댁에서 맡긴 돈, 그 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다 쓰셨는지? 우리 아배 기다리며 신행날 늦추다가 큰어매 쓰던 헌농 신행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귀신붙어 왔다 하여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시 오만간장 그 광경 어떠할고. 이 모든 것 우리 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보니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군 자금 위해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뿐인 외동딸 시댁에서 보낸 농값 그것마저 다 바쳤구나. 그러면 그렇지 우리 아배 참봉나으리. 내 생각한대로 절대 남들이 말하는 파락호 아닐진대. 우리 아배 참봉나으리….” 갓쟁이 인터넷 사업가, 학봉 13대 종손 김용환 “돈을 아끼고 절약하여 쓸 곳에 써야 한다.” 학봉 13대 종손 김용환이 실천으로 보여준 이 말은 후손들에게 가훈처럼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경제적 관념이 남다른 탓일까. 지금 학봉종택을 지키고 있는 15대 종손 김종길(72) 씨는 성공한 CEO로도 유명하다. 삼보컴퓨터 사장, 나래이동통신 사장, 두루넷 사장을 거쳐 정보통신 업계에서는 최고의 CEO로 꼽힌 인물이다. 10여 년 전 미국인이 갖고 있던 ‘코리아닷컴’ 도메인을 한국인의 자존심을 지키겠노라며 거금을 들여 사들인 장본인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 유교 철학을 경영에 접목해 ‘갓쟁이 인터넷 사업가’라는 별명을 얻으며 덕망 있는 기업인으로 명성을 떨쳤고, 현재는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원장으로 일하면서 자신만의 경영 노하우를 유교 사업 중흥을 위해 쏟고 있다.

▲김종길 종손이 조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유교에서 강조하는 인화단결과 책임의식을 바탕으로 가족주의 경영 원칙을 내세워 노사화합에 치중했더니 직원들이 주인의식을 갖고 열심히 일하더군요. 특별한 건 없습니다. 직원 700여 명의 생일을 챙겼고 노사협의회를 만들어 노동자 입장에서 배려하려 노력했습니다. 기죽지 말라고 보너스 좀 더 챙겨줬고요.” 성공한 CEO로 반평생을 살았고 노년에 이르러 명문 종가를 지키며 후세들에게 선비 문화를 전파하는 그의 삶이야말로 첨단과 전통의 적절한 융합이 아닐까.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인생을 ‘자승자박’이란 좋지 않은 의미의 고사성어에 빗대 표현했다. 자신이 주도한 컴퓨터 정보화 사회가 황금만능주의와 이기주의를 부추기면서 결국 부도덕하고 반인륜적인 세태를 조장했다는 것이다. 그는 “단순한 뿌리로서의 개념을 넘어 올바른 도덕을 깨우쳐 사회질서를 바로잡는 역할을 하는 것이 종가 종손이었는데, 서양문물을 들여와 도덕이 무너지는 역할을 내가 한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도 됐다”고 말했다. 이것을 바로잡기 위해 그는 도산서원선비문화원에서 한국정신문화의 계승과 도덕성 함양을 위해 애쓰는 한편 박약회의 일원으로 유학 문화를 연구·계승·보급하고 이를 현대화·생활화하는 데 자신의 전력을 쏟고 있다. 특히 복잡한 격식 때문에 외면당하는 유교문화를 현실에 맞게 간소화하고 재정립해야 하는 사회적 과제를 CEO로서의 경험을 바탕삼아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다. 그는 “모두가 즐겁게 참여할 수 있도록 바꾸는 것이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를 지키는 길”이라며 “여러 종가를 모아서 이 문제를 확고하게 매듭지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안동이 양반동네라는 말을 듣는 것은 그에 합당하는 사회적 책임,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했기 때문이라는 역사학자들의 주장에 공감이 가는 대목이다. 학봉 종택 학봉종택(鶴峯宗宅)은 안동 서후면 금계리 856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 건물은 학봉 김성일(金誠一) 선생의 종택으로 당호(堂號)는 풍뢰헌(風雷軒)이다. 원래는 현 위치에 지어졌으나, 지대가 낮고 침수가 잦아 선생의 팔대손인 김광찬 공이 영조 38년(1762년)에 현 위치에서 100m 가량 떨어진 현재의 소계서당이 있던 자리에 새로 종택을 건립하고 종택의 자리에는 소계서당을 지었다. 그 후 200여년이 지난 갑진년(1964)에 원래의 자리인 현 위치로 이건했다. 정침은 입구자(口) 형의 평면을 취하고 있으나 좌측으로 아래채를 달아내어 전체적으로 보면 일(日) 자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의 가구는 모두 5량가(도리 5개)의 간결한 구조다. 정침의 우측 후면에는 3칸 규모의 사당(祠堂)이 있다. 학봉선생의 유물을 보관한 운장각(雲章閣)을 비롯해 풍뢰헌, 문간채 등이 있으며 주위에는 토석 담장을 둘러 별도의 공간을 형성했다. 사당의 묘우(廟宇)에는 학봉선생의 위패(位牌)가 봉안됐다. 학봉종택은 경상북도 기념물 제112호(1995.12.1)로 지정됐다. - 글·박정우 기자 / 사진·김락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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