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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준희 교수의 메디컬 40년 에세이]“도망가라” 환자 부추긴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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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64호 박현준⁄ 2012.03.05 10:41:45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고 생각된다. 방글라데시에서 태어난 가난한 아이와 선진국의 부자로 태어난 아이는 그렇다 치고, 태어날 때부터 심장병을 가지고 고생만 하다가 걸음마도 떼기 전에 세상을 하직하는 아이들…. 이름하여 선천성 심장병. 이 병이 있다고 모두 죽거나 불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경우는 수술을 해 완쾌하는 것이 보통이며 일부 복잡한 기형들만 문제가 된다. 그런데 1980년대 초에는 의료보험이 없는 경우도 많았지만 수술 비용도 무척 비쌌다. 카터 미국 대통령이 1970년대에 한국을 방문해 심장병 어린이를 미국으로 데리고 가 수술해주고 한미재단이 한국의 심장병 어린이를 미국으로 보내 수술을 해줬다. 1980년 초 한국에도 심장재단이 발족돼 선천성 심장 환자들을 거의 무료로 치료해 주었지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당시만 해도 선천성 심장질환을 제대로 진단하고 치료하는 병원은 세브란스와 서울대병원 두 곳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따라서 지금은 정년한 서울대 윤용수 선생님과 나는 초창기 선천성 심장 환자를 보면서 자주 얼굴을 맞대고 의논했다. 그러다보니 지방의 환자들이 서울로 몰렸고, 그 중 많은 경우 제대로 진단받을 비용이 없어서 발을 굴렀다. 어떤 할아버지는 손자를 데리고 외래를 방문했는데 진단비가 모자란다고 하소연했고, 또 급히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면 입원-치료비가 부담돼 망설이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만 해도 병원의 환자 관리 체계(비용 문제)가 다소 허술한 데도 있어서 초음파 등 진단을 무료로 해주기도 했다. 그러면 나중에 계란을 몇 줄 가져와서 고마움을 표시한 보호자도 있었다. 그러나 입원하고 수술하는 경우는 조금 달랐다. 특히 시간을 요하는 환자는 심장재단의 도움을 기다릴 시간이 없는 경우도 많아 애를 태우기도 했다. 심장재단 뿐 아니라 개인조합 등 여러 단체에서 도움의 손길을 줬지만 워낙 환자가 많았다. 당시는 출산율이 높아 1년에 약 6000명의 선천성 심장 환자가 태어나는 것으로 추정됐다. 여기에다가 그때까지 수술을 받지 못해 적체된 환자까지 합하면 몇 개 병원이 감당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고, 도와주는 손길도 턱없이 부족했다. 한 번은 5살 아이의 심실중격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래서 퇴원 권고를 했는데도 환자의 아버지는 좀 더 있겠다며 퇴원을 하지 않았다. 알고 보니 퇴원 수속을 할 돈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상담사를 통해 여러 군데로 도움을 청해봤으나 이미 수술을 마친 환자에게 도움을 주는 곳은 없다는 대답뿐이었다. 회진을 돌고 외래로 돌아오다가 환자의 아버지를 만났다. 그는 미안한 표정으로 “죄송합니다. 잘 치료해주셨는데…” 하는 것이었다. 나는 “죄송하긴요. 근데 저 같으면 도망가겠는데요” 하고 무심코 한 마디 던졌다. 퇴원하래도 안 나가고 뭉그적거리는 환자가 있었다. 알고보니 수술비 낼 돈이 없다고. 지나는 길에 “나 같으면 도망간다”고 슬쩍 한 마디 던졌더니 아뿔싸 다음 날 환자와 아버지는 사라지고… 다음날 아침 회진을 도는데 환자가 없어졌다. 옷은 그대로 있는데 환자와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오후가 돼서야 환자가 환자복을 입은 채로 병원을 빠져나간 것을 알 수 있었다. “나 같으면 도망가겠는데…” 한 마디가 용기를 준 것일까? 불쾌하기보다는 왠지 기분이 좋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돈을 안 내고 줄행랑(?) 치는 환자가 꽤 있어서 당시 병원에는 도주 환자를 찾아내 병원비를 받아내는 전담 팀까지 있었다. 이 팀들이 찾아봤지만 허탕을 쳤고, 나는 “찾아도 받아낼 것이 없을 것 같으니 그대로 두면 어떠냐”고 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뒤 무교동의 술집에 갔다. 그 당시엔 큰 홀이 있고, 무대에서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 스타일의 술집이 많았다. 술집의 화장실에 가면 남자들이 소변을 보는 뒤에서 향수를 뿌려주고 팁을 받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매우 싫어했다. 소변을 보는데 뒤에서 건드리는 것도 그렇고 향수 냄새 또한 역겨웠으니까. 그런데 내가 화장실에 갔는데 웬일인지 내게 서비스(?)를 해주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싫어하는 것을 미리 알 리도 없는데…. 싫어하는 일도 나만 안 해주니 다소 서운(?)하기도 했다. 그런데 자리로 돌아오니 시키지도 않은 안주 1개와 술 1병을 웨이터가 가져다주었다. 어느 사람이 서비스로 보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몇 년 전 소리 없이 병원에서 사라진 아이의 아버지를 만났다. 그는 “죄송하다”며 “그동안 신촌 근처를 지나가기만 해도 무서웠고 외래에도 갈 수 없었다”고 했다. 나는 “이제 당신을 알아보는 사람도 없고, 아이의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봐야 하니까 걱정말고 병원에 오라”고 했다. 그 아이는 지금 30세가 넘어서도 가끔 나를 찾는다. 자신의 부인, 아들과 함께…. 일본 병원 로비에서 만난 한국말 “어쩌나” 내 나이 37살 연세대 조교수 시절, 소아 심장학 연수 차 일본을 찾았다. 일본 심장혈압 연구소. 도쿄여자의대 소속으로 당시 일본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이름을 날리던 심장 센터였다. 나는 병원에서 마련해준 직원 숙소에 묵었다. 1983년 이때만 해도 일본은 한국을 저개발 국가쯤으로 생각했다. 일본이 한국을 점령했던 역사를 생각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지금의 동남아 사람들이나 중국 사람들이 결사적으로 한국으로 입국하려 들 듯 당시는 한국 사람들이 일본을 동경하고 있던 때였기 때문이다. 이미 1970년대부터 많은 노동자와 여종업원들이 불법입국 등을 포함한 여러 방법으로 일본에 들어가 살고 있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 사람들 중 대부분이 의료 보험이 없어 그렇지 않아도 비싼 물가의 일본에서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가는 것은 생각도 못했다고 한다. 도쿄여자의대는 3류 병원이었다가 심장병원, 신경병원, 위장관 병원을 세우고 육성하면서 1류 병원으로 올라선 곳이었다. 따라서 많은 중환자들이 이 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았다. 어느 날 심장혈압센터 로비를 지나고 있는데 옆에서 한숨 소리와 함께 “이를 어쩌지”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지나다가 “아! 우리나라 말이구나” 하며 뒤를 돌아다보니 50대 아주머니였다. 일본에 살다 보면 멀리서도 인파 중에 한국 사람을 구별해낼 수가 있다. 우리나라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외모가 뛰어나다는 점이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신주쿠에서 한식을 팔아 고국의 가족을 부양하던 그 식당 아줌마 나는 일본 입국 3개월 만에 처음 만나는 우리나라 사람에게 다가가서 “한국분이시군요” 하고 말을 건넸다. 그 아주머니는 심장 판막 질환을 갖고 있었다. 젊어서 일본에 와서 살다가 10년 전부터 신주쿠에서 한식집을 운영하고 있는데, 2, 3년 전부터 숨이 찼지만 병원에 올 생각을 못했었단다. 그런데 너무 숨이 차서 근처의 이 병원을 찾았는데 수술을 해야 된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보험이 없으면 가게와 전 재산을 내놔도 안 되고, 지금 고국으로 돌아가도 뾰족한 수가 없으니 신세가 한탄스러워 진찰 뒤 로비 의자에 앉아 한숨만 쉬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당시 심장병원 원장은 다카오 선생으로, 나를 일본에 보내주신 지금은 고인이 된 홍필훈 교수님과 가까운 분이었다. 참으로 인자하고 인정이 많은 분이었다. 나는 다카오 선생님에게 상의를 드렸고 그분은 흔쾌히 받아들여 한 후원 단체의 도움으로 수술을 해줄 수 있었다. 일본에 혼자 살면서 한국의 가족에게 돈을 보내주며 힘들게 산다는 그 아주머니가 퇴원하던 날 내 손을 잡고 흘리던 눈물을 나는 지금도 못 잊는다. 나는 그 후 가끔 그 아주머니의 가게에 들르곤 했는데 갈 때마다 은인이라며 음식 값을 안 받았다. 귀국 후 한 5년 지나서 학회 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찾아보니 그 아주머니의 가게는 없어졌다. 나는 일본에 들를 때마다 그때 일이 생각나는데 그 아주머니, 어디서든 건강하게 잘 사시면 좋겠다. - 설준희 세브란스심혈관병원 심장웰네스센터장 / 운동치료클리닉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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