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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 ⑤] 신혈사 ~ 삼천사 ~ 원각사 ~ 부왕사

천추태후의 집요한 칼날에서 임금 지킨 ‘신의 굴’은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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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65호 박현준⁄ 2012.03.12 11:30:57

지하철 3호선 연신내역 3번 출구로 나온다. 범서쇼핑 앞으로 나오게 되는데 이 건물은 이 지역의 랜드마크 같은 건물이다. 이 건물을 우측으로 끼고 돌면 은평경찰서와 은평뉴타운 방향으로 가게 된다. 길 건너에는 연서(延曙)시장이 있는데 조선시대 연서역(延曙驛)이 이 지역에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뜻도 훌륭하다. 연서란 새벽을 맞이한다는 뜻이다. 가끔은 산행 길에 이 시장 앞을 지나게 되는데 바글대는 사람 발길, 온갖 푸성귀와 먹을거리들이 사람 사는 맛을 일깨우는 곳이다. 혹시나 살다가 애들 말로 꿀꿀한 날 있으시거든 재래시장에 들러 장도 보고 빈대떡이나 전(煎)에 목도 한 번 축여 보시기를 권한다. 쓸 만한 레스토랑에 들른 날 못지않은 즐거움,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범서쇼핑에서 모퉁이 돌아 50여m 가면 버스정류장이다. 7211번 버스를 타고 하나고등학교앞(진관사 삼천사 입구)역에 내린다. 예전에는 논밭만이 자리 잡았던 곳인데 이제는 북한산 둘레길이 지나는 곳이라서 주변을 잘 가꾸어 놓았다. 길을 따라 진관사 방향으로 향한다. 주차장 앞 오른쪽 언덕 줄기 위에는 옛 묘들이 있다. 성종의 13번째 아들인 영산군 이전(寧山君 李恮)과 그 아들 등 4대에 걸친 조선 왕가 묘역이다. 건너편 아래 쪽 100m쯤 전방에는 그의 어머니 숙용 심씨(淑容 沈氏)의 묘표(墓表)가 있다. 일본 도쿄(東京) 高橋昰淸(다카하시 고레기요)공원 한 편에 있던 것을 2001년 문중에서 찾아 왔다. 다카하시는 제국주의 시절 일본 대장상과 수상을 지낸 금융계 거물인데 1936년 암살당했다. 그의 저택 정원에 서 있던 숙용 심씨 묘표가 이 집이 공원이 되면서 공원 한 편에 남게 된 것이다. 왜 이 묘표가 이 공원에 있게 된 것일까?

임진왜란 당시 왜적들이 탐하여 가져갔던 것인데 실로 400여 년 만에 귀환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귀환은 했지만 돌아갈 곳이 없었다. 숙용 심씨의 묘가 어디에 있었는지 아무도 알지를 못하였으니 이처럼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묘표가 없어지면서 묘의 위치가 잊힌 것이다. 큰 아들 이성군(利城君)의 묘는 대자동에(옛절터길 시리즈의 ‘대자사 편’ 참조), 둘째 아들 영산군(寧山君)의 묘는 이렇게 번듯하게 내려오건만…. 필자는 우리 땅 산줄기를 다니면서 마루금(주능선) 능선 길에서 잊힌 채 사람들 발길에 밟히고 잡목들 밑에 깔린 무수히 많은 무덤과 만난다. 가까이는 도봉산 보문능선에 있던 얼마나 많은 무덤들이 등산객의 발길에 밟혔던가. 3호선 수서역에서 대모산 길을 오르면서 조금만 살피면 발밑에, 길가에 잊혀 알아볼 수도 없는 많은 무덤들을 만난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것이 무덤인 줄 눈치 채지 못하고 지나간다. 필자는 이 땅 떠나면 묻히지 않으려 한다. 한 줄기 연기 되어 바람 타고 가려 한다. 왕가의 무덤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민간에 있어서랴. 잠시 하나 짚고 가야 할 일이 있다. 묘표(墓表), 묘비(墓碑), 묘갈(墓碣)이다. 전문가가 아닌 필자로서는 언제나 혼동되는 단어들이다. 모두 무덤 곁에 있는 표지물(標識物)인데 사실은 ‘죽은 이에 대해 어떻게 기록해야 하는가?’라는 글의 표현 양식이라 한다. 그러나 간단히 생각 하려 한다. 모두 비석의 일종이라고. 조카(대량원군)가 왕위 계승자로 꼽히자 ‘철의 여인’ 천추태후는 쉬지 않고 암살을 시도. 대량원군은 부처 밑에 숨어 칼날을 피했고, 그가 숨었던 ‘신의 굴’ 자리에 신혈사를 세웠지만… 묘표(墓表)는 긴 말(銘) 빼고 화려하거나 군말 없이 누구의 묘인가를 알리려고 간단명료하게 세운 석물(石物)이라고. 비(碑)와 갈(碣)은 긴 말(銘)을 붙이되 옛 한나라나 당나라 구분대로 4품(品) 이상은 거북 등에 비신(碑身)을 얹고 용머리(龜趺螭首)를 장식한 것이며, 갈(碣)은 5품 이하 벼슬아치에게 허용된, 아래는 네모지고 위는 둥글게 한 것(方蚨圓首)이라고. 숙용 심씨의 묘표에는 ‘淑容沈氏之墓’ 이렇게 6자만 기록되어 있기에 묘표라 한다. 옛무덤 앞에 서 있는 ‘OO公 OO之墓’가 묘표이며 묘 옆이나 길 입구에 그 이의 행장을 기록한 것이 碑(주로 신도비)이다. 이 기록의 형태를 이수(螭首) 없이 둥글게 해서 세웠다면 갈(碣)이라 부르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요즈음 무덤 앞에 덜렁 ‘누구 묘’라고 세운 돌은 옛 기준으로 보면 묘비(墓碑)라 하기보다는 묘표(墓表)라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이제 북한산 둘레길(마실길)을 가로질러 진관사(津寬寺) 방향으로 올라간다. 빈대떡도 팔고 장작 삼겹살도 구워 팔던 상가들도 정비되었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일주문을 바라보며 방향을 좌로 틀어 고갯길 방향으로 간다. 안내판은 삼천사와 사모바위 방향임을 알리고 있다. 문득 1000년 전 이 부근에서 일어난 일이 떠오른다. 때는 고려 목종 연간이었다. 목종의 어머니는 그 유명한 천추태후(千秋太后)이다. 그녀와 동생 헌정왕후는 고종4촌간인 5대 경종의 제3비(妃)와 제4비(妃)가 되었는데 경종과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었다. 경종 사후(死後) 오빠가 6대 성종에 즉위하고, 이어서 그녀의 아들이 19세에 7대 목종(穆宗)이 되었다. 그녀는 큰 권력을 휘둘렀으며 외척 김치양과의 사이에 아들을 하나 두었다. 조선의 유교 윤리관이나 요즈음의 윤리관으로 보면 홀로 된 왕비가 외척과 통(通)하여 사생아를 낳은 것이니 큰 흠이 되겠으나 근친혼이 일반화된 고려 초기 사회관으로서는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아들 목종이 후사(後嗣)가 없었다. 그녀의 욕심이 이에 발동하기 시작했다. 여동생 헌정왕후가 삼촌인 왕욱(추존 안종)과의 사이에서 아들(대량원군)을 두었는데 대량원군이 왕위 계승자였다. 천추태후는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 왕위를 잇고 싶었다. 방법은 하나, 대량원군의 제거였다. 대량원군은 12살에 머리 깎고 송도 남쪽 숭교사(崇敎寺)로 갔다가 삼각산 서쪽 여철(如哲) 스님이 창건한 유가종(瑜伽宗)의 조그마한 절로 옮겨 갔다. 천추태후의 살해 음모는 집요했다. 그 때마다 이 절의 진관대사(津寬大師)는 자객의 눈을 피해 불단 밑에 굴을 파고 대량원군을 피신시켰다. 언제나 목숨이 풍전등화 같았다. 그래도 그의 기개는 원대했다. 그 때 남긴 시가 성능(聖能)의 북한지(北漢誌)에 전한다. 일조유출백운봉(一條流出白雲峰: 한 가닥 물줄기 백운봉에서 흘러 나와) 만리창명로자통(萬里滄溟路自通: 만 리 먼 바다 길로 절로 통하네) 막도잔원암하재(莫道潺湲岩下在: 작은 물줄기 바위 아래 머문다 마소) 부다시일도왕궁(不多時日到王宮: 머지않아 왕궁에 이를지이니) 강조의 정변(政變)으로 드디어 대량원궁은 본인의 시구(詩句)처럼 왕위에 등극하였다. 8대 현종(顯宗)이다. 진관대사의 고마움을 보답해 진관사를 지었다. 자신이 숨었던 그 굴은 신혈(神穴)이라 하였다. 그 때 숨어 있던 절은 신혈사(神穴寺)라 불렸는데 아마도 둘레길에서 진관사 오는 길이거나, 이제 진관사 입구에서 삼천사로 넘어 가는 고갯길 근처 어디인가에 그 터가 있을 것이다. 신혈사 그대는 어디에 숨어 계시오? 나직한 고개를 넘어간다. 고갯마루는 응봉능선 지나 사모(紗帽)바위로 오르는 갈림길이다. 잠시 고갯길을 넘으면 삼천사 계곡이 나타나고 막아 놓은 시멘트 둑을 건너게 되는데 ‘청솔집’이라는 계곡 옆 백숙집 안내판이 서 있다. 이곳을 지나면 삼천사로 오르는 길이다. 좌측으로 ‘三角山 寂滅寶宮 三千寺’를 알리는 석주(石柱)가 서 있다. 적멸보궁은 석가모니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 석가모니의 다비/화장 후에 나온 사리)를 모신 곳을 말하는데 그 원류는 삼국유사 탑상(塔像) 조에 실려 있다. 선덕여왕 17년(643년)에 자장법사가 중국 양나라에서 부처의 두골과 어금니 사리 100낱을 가져와 왕룡사와 태화탑과 통도사에 두었다는 것이다(慈藏法師所將 佛頭骨 佛牙 佛舍利百粒 其舍利 分爲三 一分在黃龍寺 一分在太和塔 一分在通度寺戒壇 其餘未詳所在). 이렇게 나눠서 4대(5대) 적멸보궁이 되었는데 근래에는 적멸보궁이 많이 생겼다. 미얀마나 스리랑카에서 불사리를 들여와 봉안한 까닭이다.

삼천사로 오른다. 보물 657호 ‘삼천사 마애불’을 뵙는다. 언제 보아도 품위가 있다.(삼천사에 대해서는 拙稿 ‘이야기가 있는 길 ?’에 소개했으니 줄인다) 선인들의 발자취에 인사드리고 산길을 오른다. 이 길에는 3곳의 삼천사지와 부속 암자터가 있다. 현 삼천사에서 1km 남짓 오르면 좌측으로 허물어진 돌계단과 미처 다듬지 못한 장대석들이 있다. 안 쪽 오르막에는 무수히 많은 석축, 기와편, 돌층계의 잔해, 장대석, 초석들이 증취봉 아래 넓은 터에 자리하고 있다. 저녁 햇빛 찬란히 부서지는 날, 증취봉을 뒤로 하고 서 있었을 삼천사를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이처럼 좋은 절터가 어디 흔하랴. 북한지의 기록을 보자. ‘소남문 밖에 있다. 지금은 폐사되었다. 고려 이영간이 지은 비가 있다. 원효화상과 진관조사가 이 절 및 진관사를 세웠다. 각기 큰 석조가 있다. 이는 당시 목욕하던 그릇이라 한다.(在小南門外今廢 有高麗李靈幹所撰碑 元曉和尙與眞寬祖師建此寺及津寬寺 … 皆各有大石槽一 是其時沐浴之器云) 이제 이영간이 지었다는 비(碑)를 찾아 나선다. 증취봉 아래 이곳 넓은 터에는 비의 흔적이 없다. 절터를 내려 와 등산로로 다시 1km 정도 오르면 좌로 그다지 크지 않은 또 하나의 절터를 만난다. 건물지의 초석이 완연하고 연화문양(蓮花紋樣)이 선명한 받침돌도 남아 있다. 기록이 없어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삼천사의 부속 암자였을 것이다. 사세가 커서 3000명의 승려가 수도했기에 이 골을 삼천동천(三千僧洞)이라 하지 않았겠는가. 큰 절이 넘쳐나는 이 나라에서 마음 붙일 작은 절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절에서 들리는 삽질 소리에 가슴 덜컹 내려앉은지 벌써 오래 비의 흔적을 찾으러 다시 오른다. 약 500m 오르면 등산로 좌측 50여m 되는 곳으로 석축이 보인다. 이곳이다. 비신(碑身: 비 몸돌)은 간 곳이 없고, 받침돌(龜趺:귀부)과 덮개돌(螭首)만 남았다.

고려 전기 고승 대지국사 법경(大智國師 法鏡)의 탑비인데 비신은 누군가에 의해 산산이 깨어졌다. 조선시대에 믿음을 달리하는 이들의 행위일 가능성이 높다. 2005년부터 3년에 걸쳐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이 터를 발굴했다. 그동안 전시회도 있었고 최근에는 발굴 보고서도 나왔다 한다. 다행히 조선조 숙조 때 낭선군 이우가 이 비문을 수집, 정리하여 대동금속서에 기록했기에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이제 등산로를 따라 부왕동암문(扶旺洞暗門)으로 오른다. 중간에 길은 사모바위, 문수봉 오르는 길과 갈라져 좌측으로 가야 한다. 고도가 어느 만큼은 되기에 한나절 산행코스로 적당하다. 1시간여 지나 이윽고 암문에 닿는다. 부왕동암문이라 쓴 나무판이 붙어 있고 눈여겨보면 희미하게 소남(小南)이란 글자가 보인다. 북한지에 삼천사가 소남문 밖에 있다 했듯이 이 문이 문루(門樓)를 갖추었던 소남문(小南門)인 것이다. 의상봉 능선에 있는 의상봉 ~ 용출봉 ~ 용혈봉 ~ 증취봉 ~ 나월봉 ~ 나한봉 ~ 문수봉 사이 한 가운데에 있는 암문으로 많은 산객들이 쉬어 가는 곳이다. 문안으로 들면 평평한 터에 돌축대가 보인다. 원각사(圓覺寺) 터이다. 북한지에는 소략하게 ‘증취봉 근처 동쪽, 74간(間)이다. 승려 회수(懷秀)가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북한산성을 쌓을 때 생긴 절인데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무너진 축대야, 너는 알겠구나.

여기서부터는 다시 내려가는 골자기이다. 부왕동문 또는 청하동문(靑霞洞門)이라 부르던 골짜기다. 30여분 내려가 비교적 평평한 곳에 이르면 등산로 우측 옆으로 부왕사 터를 알리는 안내판이 있다. 잠시 오른 곳에 부왕사 터가 있다. 나란히 정렬한 초석들이 이 절의 규모를 말해준다. 북한산성 축성 시에 1717년에 지은 절로 승군(僧軍)이 머물던 곳이다. 북한지의 기록은 너무도 소략하다. ‘휴암봉 아래 있다. 111간이다. 불승 심운(尋雲)이 세웠다’. 조선 후기 선비 홍세태(洪世泰)의 시(詩)가 소개돼 있다. 이덕무도 이 절에 이르러 시를 남겼고, 추사(秋史)도 시를 남겼다. ‘산구경은 어디가 좋을까? 옛절 부왕사라네(看山何處好 扶旺古禪林)’ 추사의 시구(詩句)처럼 이 길에 오면 자주 부왕사 터에 오른다. 요즈음에는 옛 절을 중건하려고 어느 스님이 천막집을 짓고 노력하고 계신다. 부처님도 들일 곳이 없어 밖에 비만 피할 수 있게 모셔 놓았다. 어느 여름 날 들러 공양간에 있는 샘에서 물 한 사발 얻어 마셨다. 감로수(甘露水). 정말 시원한 물이다. 그 보답으로 북한지의 홍세태 시를 읽어 드렸다. 그 스님이 이 절터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고 알려 달라 했다. 오랜만에 다시 방문하니 다른 스님이 계셨다. 하도 젊어 세속에 연륜이나 법랍(法臘: 출가한 햇수)이 일천하리라 생각했더니 출가한 지 오래된 분이셨다. 마음 공부를 잘 한 분일 것이다. 이제 다시 이 터에 절을 지으면 작고 소담했으면 좋겠다. 큰 절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마음 붙일 수 있는 작은 절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절에 들렀는데 톱 소리, 대패 소리가 들리면 털컹 가슴이 내려앉은 지 오래 되었다.

이 절터에 서서 앞을 바라보면 마치 거북의 형상과 같다. 금당(金堂)이 자리할 곳은 거북 등 같고 여기서부터 길게 뻗어나간 앞 언덕은 마치 거북머리 같이 보인다. 절터 마당에는 부황사(부皇寺)라 각자(刻字)한 비가 서 있는데 부(扶)자를 좌우 바꾸어서 부(夫쭕)로 써 놓았다. 아마도 무슨 풍수의 조화를 따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절 이름도 어느 때부터인가 부황사(扶皇寺)가 되었는데 그것도 부담스럽다. 가지런히 정렬한 옛터의 초석을 뒤로 하고 절터를 내려온다. 앞 산 능선 아래로는 북한산 산신당이 보인다. 북한동 마을 주민들이 예부터 안녕을 빌어 동제(洞祭)를 지내던 곳이다. 이제 북한동 마을도 산 속에 없으니 동제도 사라지지 않겠는지…. 골짜기 아래 부왕동구(扶旺洞口)로 내려온다. 옛 기록에 환선교(喚仙橋)가 있었다 하는데 흔적은 헤아릴 수 없다. 세월은 기억도 사물도 모두 데리고 간다. - 이한성 동국대 교수 교통편 3호선 연신내역 3번 출구 ~ 범서쇼핑 돌아 버스정류장 7211 환승 ~ 진관사/삼천사 입구 하차. 걷기 코스 진관사 앞 다리 ~ 좌측 삼천사 방향 고개 ~ 산천사길 ~ 삼천사지1 ~ 삼천사지2 ~ 삼천사지3 ~ 부왕동암문(소동문) ~ 원각사지 ~ 부왕사지 ~ 대서문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마애불과 문화유적지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갑니다.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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