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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준희 교수의 메디컬 40년 에세이]연세대 농구부 전성기와 나

10여년 농구부장 맡으며 사랑 불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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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68-269호 박현준⁄ 2012.04.09 15:26:53

중고교 시절 농구 선수로 뛴 후 의과대학에 들어와서도 전국의대 체육대회에서 농구 우승 6연패를 차지한 인연으로 의대교수 20여 년 재직 중 연세대 농구부장을 맡았다. 지금도 위력을 발휘하며 뛰고 있는 서장훈 선수가 대학 3학년 말 때 일이니 세월은 정말 빠르다. 의사로서보다 농구에 더 열중했던 농구부장 10여 년 세월이었다. 자식 같은 선수들과 함께 해서 행복했고, 내가 좋아하는 운동을 늘 접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선수들이 부상을 당하면 그들을 돌보는 것도 내 일이었다. 한 번은 일산에서 프로팀과 연습 경기를 하는 도중 우리 선수가 상대방 선수와 부딪혀 쓰러진 뒤 일어나지 못했다. 상대팀 감독과 선수들이 쓰러진 우리 선수를 보면서 의식이 없는 것 같다며 우리를 손짓해 불렀다. 가보니 선수는 눈을 감은 채 쓰러져 있었는데 눈을 깜박거리는 등 무의식 상태로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선수를 감독실로 옮기게 한 후 선수의 이름을 부르며 “야, 나 설 부장이야!” 했더니 이 친구, 눈을 번쩍 뜨면서 일어났다. 시합에서 실수를 연발하다가 또 실책을 하자 쓰러진 김에 감독에게 혼날까봐 그냥 의식이 없는 척 하고 있었는데, 내가 호명하자 들통났다는 생각에 즉각 일어났다는 것이다. 10년 넘게 농구부장을 했으니 선수들의 심리 상태도 잘 알게 됐다. 부상을 잘 당하는 선수, 거의 부상이 없는 선수의 구별이 가능해진다. 유연성이 있고, 넘어질 때 힘을 빼고 쓰러지는 방향으로 그대로 나가는 즉, 저항을 안 하는 선수(쓰러질 줄 아는 선수)와 무리하지 않는 선수는 부상을 거의 당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넘어지는 방법을 알고 유연성이 있는 선수는 간혹 쓰러져도 걱정을 안 하게 됐다. 반대로 대학 4년 동안 계속해서 부상을 당하다가 선수 생명이 끝난 경우도 적지 않다. 한 번은 여자 프로농구 결승전 시합장에 갔다가 한 팀의 에이스이며 국가대표였던 선수가 발목 부상으로 뛰기 힘들게 됐다. 그러자 그녀는 내게 “어떻게든 계속 뛰게 해 달라”고 했고, 나는 할 수 없이 마취제를 써 시합에 나가게 했다. 그 팀이 우승을 했지만 나는 무리하게 선수를 뛰게 했다는 생각으로 한동안 걱정을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부상 이외에도 공동생활을 하다보니 독감, 소화불량으로 병원을 찾는 경우도 있는데, 시즌 중에는 가급적 입원을 안 시키려고 한다. 그런데 어떤 중소 종합병원은 돈을 목적으로 선수에게 입원을 강권하기도 했다. 의사인 나한테 진상을 좀 알아봐달라고 하는 경우가 많았고, 내가 그 병원에 전화를 하면 80% 정도는 입원을 취소하는 경우를 경험하면서 의사가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일생을 소아심장학에 전념하면서도 이에 관한 책은 하나도 쓰지 못했다. 그런데 연세대학교 농구 부장을 맡은 후 여러 차례 농구 관련 세미나를 개최했고, 미국에서 농구에 관련된 많은 서적 및 비디오 등을 종합했다. 당시 연세대 최희암 감독과 상의해 ‘슈팅학’이란 책도 썼다. 의학적 견지에서 농구 슈팅 방법을 소개한 내용이었다. 이제는 세월이 지나 어린 학생으로만 보였던 선수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병원으로 데리고 오기도 한다. 의젓한 가장이 된 제자를 보면서 대견스럽기도 하고, 손자나 손녀 같은 느낌이 들어 기쁘면서도 화살 같이 지나가는 세월이 무상하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다니… 얼떨결에 전임강사 되니 책임감은 밀려오고… 내가 전공의 4년차가 될 즈음, 심장학을 담당하던 교수가 외국으로 1년간 연수를 떠났다. 소아심장 환자의 정밀검사를 담당할 교수가 없자 과에서는 당시 심장학 과정에 있던 나에게 4년차 전공의 동안 내내 심장학을 담당해 정밀 검사를 하도록 시켰다. 다른 4년차 전공의들도 신생아학, 혈액학, 내분비학 등에 배속됐다. 나는 심장 환자들을 담당하기는 했지만 전공의 신분으로 환자를 입원시키고 치료할 수 없어 당시 미국에서 돌아오신 다른 분야의 교수 밑에서 일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런데 그 교수님은 모든 일에 철저하신 분이셔서 보통 4년차 10월이 지나면 모든 일손을 놓고 전문의 시험을 준비하도록 봐 주시는데 그 교수님은 유독 1주일에 3일은 정밀검사, 나머지 날은 외래환자를 보도록 계속 시켰다. 동기 4년차들은 모두 밖에 모여서 하루 종일 전문의 시험 준비에 여념이 없는데…. 12월에 병원에서 마주친 외과 교수가 나를 보시더니 “자네 지금 4년차 아닌가? 공부 안 하고 뭐 하나? 허허, 이번에 전문의 시험에서 확실히 떨어질 사람이 하나 있군” 하신다. 1월 첫째 주에 필기시험이 있는데 12월이 되자 나도 내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즈음 미국에 계시던 흉부외과학 홍필훈 교수님이 귀국하셔 심장외과의 책임을 맡으셨는데 당시 학장보다도 훨씬 선배로 의학계에서 존경받는 분이셨다. 심장외과와 매주 회의(수술할 환자들을 검사해 토의함)를 개최하고, 소아 심장환자 수술 때 가끔 수술방에도 들어가곤 했던 나는 자연히 홍 교수님과 자주 대면했다. 홍 교수님은 매일 병원에 출근하는 나를 보고 내가 전임강사쯤 되는 것으로 여기셨다고 한다. 전문의 시험을 보기 2주 전 일본 심장혈압연구소에서 외과 교수들이 우리 병원을 방문했다. 나는 이들이 수술할 수 있도록 심장 기형이 있는 환자들을 정밀검사 하고 회의에서 설명했다. 일본 교수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내가 전임강사가 아니라 4년차 전공의임을 처음 확인한 교수님은 내게 “전공의가 끝난 뒤 교수 요원으로 남으라”고 권하셨다. 그러나 당시 문제가 있었다. 우리 과 주임교수와 학장의 사이가 아주 나빠 지난 4년간 우리 과에 교수 요원이 한 명도 들어오지 못했던 것이다. 교수님과 상의하니 “밑져야 본전이니 주임교수에게 말이나 해보라”고 하셨다. 주임교수를 찾아가 이런 말을 하니 그는 어이없다는 듯 나를 쳐다보며 “내가 추천해도 안 된다”고 하셨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교수직으로 남게 해달라”며 주임교수를 찾아간 전공의는 과거에 전혀 없었으며, 그 당시 개념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한다. 내 부탁에 어이없어 하신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어쨌든 내가 재차 요청하자 주임교수는 “정 네가 소원이라면 한 번 요청은 해보겠지만 큰 기대는 말라”고 대답하셨다. 하지만 나는 홍필훈 교수님의 도움으로 교수직에 임용됐고, 이를 안 주임교수도 놀랐다고 했다. 어쨌든 소아심장학 전문 전임강사로서 밀려오는 책임감이 막중했다. 시험을 봐야 하는 것도 아니지만 타 학교와 경쟁해야 하고, 학회에서 논문 발표가 탁월해야 한다는 책임감! 아마도 내 자신이 절실해 공부를 시작한 첫 번째가 아닌가 생각된다. 토요일, 일요일, 휴일도 없었다. 지나간 20년간의 외국 논문, 책 등을 보고 연구할 대상을 찾고…. 내 자식이 아파서 소아과에 입원하는 것조차 모르고 공부에 몰두했던 시절. 지금 생각하면 내 일생에서 가장 소중했던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 설준희 세브란스심혈관병원 심장웰네스센터장 / 운동치료클리닉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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