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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 ⑧]개발 손안탄 ‘강화나들길’ 시원쿠나

인공시설물 안 만들고. 보일듯말듯 화살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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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71호 박현준⁄ 2012.04.23 14:30:07

600여 년 전 태조 이성계는 용산강(龍山江: 원효로 앞 한강)에 나가 강화도로부터 실려 오는 귀중한 보물을 맞이하였다. 그 보물은 다름 아닌 국보 32호이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었다. 그 때 이야기가 짤막하게 조선왕조실록 1398년(태조 7년) 5월 10과 12일자에 실려 있다. 그 기사를 보자. ‘(임금께서) 용산강(龍山江)에 거둥하였다. 대장경판(大藏經版)을 강화(江華)의 선원사(禪源寺)로부터 운반하였다.(幸龍山江 大藏經板, 輸自江華禪源寺)’ 이틀 뒤인 5월 12일 조에는, ‘대장(隊長)과 대부(隊副) 2천 명으로 하여금 대장경판을 지천사(支天寺)로 운반하게 하였다.(令隊長隊副二千人, 輸經板于支天寺)’ 태조는 강화도 선원사에서 한강을 타고 옮겨온 대장경을 용산강에서 맞이하여 군사 2000명으로 하여금 지천사(支天寺)로 옮기게 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여러 궁금증이 생겨난다. 강화 선원사에 있는 대장경을 왜 서울로 옮겨 온 것일까? 선원사는 강화 어디에 있었으며 지천사는 또 어디에 있었던 절일까? 이 대장경이 언제, 어떤 경로(經路)로 합천 해인사에 가 있는 것일까? 이 대장경은 어디서 판각(板刻)한 것일까? 불행히도 이런 궁금증에 대해 조선왕조실록도, 어느 사찰의 사지(寺誌)나 역사서(歷史書)도 기록을 남기고 있지 못하다. 심지어는 선원사(禪源寺)와 지천사(支天寺)의 위치에 대해서도 정확한 결론을 얻지 못한 채 미스터리(mystery)로 남아 있다. 팔만대장경은, 온전히 남아 있는 실물(實物)만이 실체일 뿐 판각과 보관, 이운(移運)의 길이나 이운 방법도 모두 수수께끼 속에 묻혀 있는 블랙홀이다. 이런 궁금증에 대한 상상적 추론을 즐기면서 지천사와 선원사를 찾아 떠나 보자. 우선 서울에 있었다는 지천사(支天寺)를 찾아보련다. ‘한국사찰전서’에는 ‘지천사는 태평관 근처에 있다(近於太平館)’고 했다. 그러면 태평관(중국 사신의 숙소)은 어디에 있었을까? 세종실록지리지에 그 답이 있다. ‘숭례문 안 황화방에 있다(在崇禮門內皇華坊).’ 또한 세종실록 15년(1433년) 7월 기사에는 ‘남대문 밖에 못을 파고 문안에다가 지천사를 두었다(南大門外鑿池 於門內置支天寺)’고 했으니 지천사는 지금의 상공회의소나 삼성빌딩 근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남대문에서 덕수궁으로 가는 태평로(태평관에서 유래)의 한가운데 있었을 확률도 높다. 왜냐하면 남대문에서 덕수궁에 이르는 신작로는 1912년 무렵에 뚫렸으니 그 이전에는 비스듬한 산자락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이 지역에 지천사의 흔적은 초석 하나 기와 파편 하나 남아 있지 않다. 지천사는 마음 속 절터로 담아 두고 강화도로 간다.

여러 버스 노선이 있다. 영등포에서 88번, 신촌에서 3000번, 일산에서 96번, 부평에서 90번 등을 타고 김포에 가면 강화로 가는 여러 버스 노선을 만날 수 있으니 굳이 차를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다. 버스가 옛 강화대로(江華大路)를 지나간다. 차를 가지고 갈 때는 새로 정비된 48번 국도가 뻥 뚫려 있으니 그 길로 가지만, 사람들이 사는 마을들은 옛길을 중심으로 그대로 남아 있다. 버스는 다행히 옛 마을들을 거치며 지나간다. 조선시대 강화대로의 맛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뻥 뚫린 48번 도로 달리면 “왜 이리 사람이 없나” 싶지만, 사람사는 마을은 바로 뒤켠의 옛 강화대로를 따라 면면히 이어지니 동행은 무슨 버스가 골목길로 뺑뺑 돌아가느냐며 속을 태운다. “아스시게, 이게 다 그 옛길이라네.” 서울을 벗어나면서 굴포교(고촌) 지나 천등교(고촌 풍곡리 고개)를 넘자마자 옛 마을길로 접어들더니 사우리를 지나자 버스는 아예 복잡한 김포 골목길로 접어든다. 이제는 2차선 찻길에 상가가 빼곡하지만 바로 그 옛날 김포현(金浦縣)의 중심지다. 이어서 버스는 하성, 마성, 통진, 월곶 옛길을 간다. 이제는 지역 거점 상가 지역이 되었다. 강화길 48번 국도를 차를 몰고 가다보면 왜 이리 썰렁한가 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사람 사는 따듯한 세상은 그 길 안쪽 옛 강화대로를 연결하는 마을과 마을에 있음을 알면 즐거움이 커진다. 사람 삶의 즐거움이 죽음이라는 끝이 아니라 삶이라는 여정(旅程)이듯이 길 떠나는 일도 목적지만 향해서가 아니라 가는 길을 즐기면서 가시라고 권하고 싶다. 한 템포만 늦추면 지루함이 즐거움이 되는 이치를 이 길은 내게 일러준다. 버스가 강화대교를 건넌다. 갑곶나루(甲串)가 있던 곳이다. 팔만대장경도 아마 이 나루나 위쪽 승천포(昇天浦: 송해 당산리)를 거쳐 조강을 지나 용산강에 이르렀을 것이다. 정유재란 때 인조도 건넜고, 병자호란 때 봉림대군(효종)도 건넜고, 강화도령(철종)도 건넜을 그 나루를 이제는 버스가 훌렁 넘어간다. 버스가 강화버스터미날에서 나를 내려준다. 관광안내소에 들러 지도와 ‘걷기여권’도 받는다. 출국(出國) 스탬프 아닌 출발 스탬프도 찍어 준다. 강화는 제주올레길, 북한산둘레길처럼 산길과 마을길들을 이어 ‘강화나들길’ 9개 코스를 만들었다. 나는 이 길들을 사랑한다. 그 이유는 첫째 돈을 안 들였기 때문이다. 그네들의 삶이 있던 산길, 개울길, 논길(이제는 시멘트 포장된 농로길이지만), 마을길을 있는 그대로 연결했다. 안내판도 거의 없다. 그러나 길 잃을 만하면 어김없이 전봇대에, 길바닥에, 바위에 조그만 화살표가 그려져 있다. 그도 어려우면 리본을 달아 놓았다. 또 하나 사랑스러운 이유는 길마다 테마가 있다는 점이다. 고려왕국 39년의 수도로서, 강화도호부(江華都護府)로서, 개화기 치열한 역사의 현장으로서 길마다 서려 있을 그 많은 역사를 길 위에 스토리텔링 하지 못한 아쉬움이 크지만, 이 지역에 삶의 둥지를 튼 이들이 하나씩 해 나갈 것으로 믿고 기다리려고 한다. 길은 그곳에 먼저 살아간 사람들의 숨결이 살며시 내려앉아야 비로소 살아난다. 출발 기념으로 여권을 출발지 땅바닥에 올려놓고 사진 한 장 찍는다. 오늘 코스는 제6코스 ‘화남생가(華南生家) 가는 길’이다. 이 길 여정 속에 팔만대장경이 용산강으로 오기 전 출발지인 선원사(禪源寺)의 옛터가 있다.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선생은 1846년, 오늘 답사길에 들릴 두두미마을(두운리)에서 태어났다. 1888년(고종 25년) 식년시에 급제하였으나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고향땅에서 살다가 생을 마친 분이다. 이 분은 1905년 이 나라가 일본에게 을사늑약(乙巳勒約)을 당한 그 다음해(1906년) 홀연히 말 한필에 몸을 싣고 당신이 낳고 자란 강화도 일주 길에 오른다. 이때의 기록이 ‘沁都紀行’이다. 각 마을의 소개는 물론 256편의 주옥같은 칠언절구(七言絶句)가 기록되어 있다. 전해지는 필사본은 반듯한 해서체(楷書體)로서 글자 읽는 데는 어려움이 없으며 번역서도 나와 있어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다.

오늘 길은, 강화터미날 ~ 선원사지 ~ 삼동암천 ~ 마리학교 ~ 화남생가 ~ 오두리/간뎃마을 ~ 광성보 또는 오두돈대로 이어지는 약 19km의 긴 길이다. 길 멀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가는 길 중간 어디에서든지 큰 길을 만나면 거기까지만 가도 충분하다. 터미널 뒤로 빠져 나오면 강화노인복지회관이 있다. 여기에서 길은 우측 시멘트 길로 이어진다. 개울 뚝방길이다. 개울 둑에는 쑥을 비롯한 봄나물이 그득하다. 5분여 걸으면 리본이 개울 건너기를 안내한다. 논길 끝에는 마을과 교회가 나타나고 전봇대에 그려진 화살표가 우향우를 거쳐 좌로(고식이길 20번)로 가라고 한다. 길 잃을 염려는 없다. 길 잃을 만하여 주위를 둘러보면 어김없이 어딘가에 화살표나 리본이 있다. 이윽고 길이 산길로 접어드는데 ‘강화인삼 스파랜드’라는 숯불가마가 크게 자리잡고 있다. 길은 이곳을 지나 샘터로 이어진다. 편안한 뒷동산길이다. 갈림길 안내판에 ‘창리/지산리 일만보 걷기 산책로’라고 적혀 있다. 처음에는 일만보 걷기 길로 가다가 이 길을 버리고 리본이 가리키는 남쪽 능선길로 접어든다. 잠시 후 능선길이 고도를 낮추면서 잘 다듬어진 절터가 나타난다. 선원사 터이다. 1232년(고종 19년) 고려는 몽고의 2차 침략을 감지하고 대책을 세우게 된다. 이 때 실권자인 최우(崔瑀)는 강화로 천도하기로 하고 준비에 들어간다. 그 해 7월6일 고종이 개경을 떠남으로써 원종 11년(1270년) 다시 개경으로 돌아갈 때까지 39년 간 기나긴 고려의 강화도 생활이 이어진다. 이때 고려의 대장경(初彫大藏經 및 續大藏經)이 대구 부인사(符仁寺)에 있었는데 2차 침략한 몽고군에 의해 소실되었다. 고려에게 대장경은 정신적인 의지처이자 마음의 고향 같은 존재였다. 이에 새로운 대장경을 새기기로 하고 당시 무신 집정자인 최우의 주도로 천도 후 4년 뒤인 1236년(고종 23년)에 대장도감(大藏都監)이 설치되고 16년의 대역사 끝에 1251년(고종 38년)에 완성하였다. 이때의 기록이 고려사(高麗史)에 전해진다. 1251년(고종 38년 9월) ‘임금께서 성(城) 서문 밖 대장경판당(大藏經板堂)에 행차하여 백관을 거느리고 행향(行香)하였다’는 것이다.

고려사가 전하듯이 대장경이 완성되어 처음 보관된 대장경판당은 서문 밖, 지금의 국화리(菊花里) 인근이었던 것이다.(이후 용장사터 답사 글에 다시 살펴볼 것임) 그러던 팔만대장경이 어떤 이유인지 선원사로 옮겨졌다가 조선 건국 후 이 태조가 용산강에서 맞이하게 된 것이다. 태조 이성계가 용산에서 맞이한 팔만대장경은 실물만이 실체일 뿐, 어디서 만들어져서 어디로 운반됐는지가 모조리 수수께끼 속에 묻힌 블랙홀이니… 선원사 터는 층을 이루면서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고적 조에는 ‘옛터가 강화부 남쪽 8리에 있다. 지금은 장원서의 과원이 되었다(古基在府南八里 今爲掌苑署果苑)’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 이 자리가 ‘禪源寺址’로서 사적 259호로 지정된 것은 1977년이었다. 그 전 해인 1976년 이곳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선원사라는 확실한 근거(명문 기와라든지)가 되는 물적 자료가 부족한 상태에서 선원사지로 지정됐고, 현재도 5만분의 1 지도를 비롯하여 여러 지도에 ‘팔만대장경 판각 성지’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선원사는 이곳이 아니라 선원면 선행리 ‘충렬사’ 일대라는 논문이 계속 발표되고 있다. 본고에서는 너무 머리 아픈 이야기는 않으려 한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처럼 팔만대장경이 선원사에서 용산강으로 온 것은 확실한 사실일지라도 그 선원사는 이곳이 아니라 충렬사(忠烈祠) 자리일 수도 있고, 팔만대장경 판각을 주도한 대장도감(大藏都監)도 이곳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은 알고 길을 걸으려 한다.

선원사 또한 최우의 공력으로 건설되었는데 그 낙성(落成)의 기록을 보면 1245년으로 대장도감이 출범한 후 9년 뒤에 세워진 절이다. 그러니 여기에서 팔만대장경을 판각했다는 말은 무언가 알리바이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데 왜 모두 그렇게 믿게 된 것일까? 왕조실록의 기록이 모두를 그렇게 믿도록 한 것은 아닐까? 창궐하는 왜구가 1360년(공민왕 9년)에도 강화도로 올라 와 선원사와 용장사를 노략질한 일이 있으니 불교에 믿음이 깊었던 이 태조로서는 팔만대장경을 더 이상 강화에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용산강으로 실어와 친견한 후 약탈 위험이 없는 내륙 해인사(海印寺)로 보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팔만대장경 = 선원사’라는 고정관념이 생긴 것은 아닐까? 선원사 터 아래에는 근래에 세운 요즈음 선원사가 있다. 옛 선원사와는 무관한 절이다. 연전 TV 프로에 ‘牛보살’이라는 소가 여러 번 소개된 적이 있다. 스님의 목탁 소리에 맞춰 혀를 차는 소가 있었는데 마치 목탁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신기하기도 했고, 각지의 보살(여신도)들이 모여들기도 하였다. 구제역이 난리치던 그때 살처분을 당해 그 소의 모형을 만들어 놓았다. 뭔가 어설프다. 이제 그만 서방정토로 갈 수 있게 놓아 주었으면 좋겠구나. 길을 건너면 선원사 연꽃 축제장이 있고 몇 개의 노래비가 서 있다. 잠시 읽고 지나친다. 산(生) 자의 마을 안에 죽은(死) 자의 무덤이 자리한 마을을 지나며 죽음이라는 것이 삶의 이웃이라는 사실을 배운다.

잠시 후 화장실 담에 모란(牧丹) 꽃을 탐스럽게 그린 남산동 마을로 들어선다. 60~70년은 족히 되었을 양기와 얹은 한옥 앞을 지난다. 문패에 ‘鄭月夏’라 적혀 있다. 이 집을 돌면 석탑이 있다. 어디일까 궁금해 하는데 연만한 분이 다가와 말을 건다. 파라솔 아래 앉아 생면부지의 ‘정월하’ 선생과 시간 반 이상 수다를 떨었다. 대중가요 작사가라 한다. 25년 전 이곳에 들어와 터를 잡았다고 한다. 연꽃 축제장 노래비의 유래도 들을 수 있었다. 궁금하시면 이곳 ‘남산대’를 지날 때 이 분이 계신가 기웃거려 볼 일이다. 고개 넘어 끝없이 가면 시멘트 농로길을 한참 지나 삼동암천 다리도 건너고, 환경농업교육을 하는 ‘밝은 마을 마리학교’ 지나 강화에 터를 잡은 제주 고(高)씨 사당인 영모사(永慕祠) 아래 화남선생(華南) 생가에 닿는다. 두두미마을(두운리)인데 아무 표지판도 없으니 지나치지 않도록 하자. 본고에 실린 사진을 눈여겨보시면 좋으리라. 이쯤 오면 다리도 아프리라. 12km나 걸었으니 말이다. 힘들면 마을 앞 도로에서 버스 타고 터미널로 돌아갈 수도 있다. 필자는 두두미노인정 앞을 가로질러 능내촌 방향으로 간다. 아이들이 논물로 장난을 하면서 모르는 나그네에게 반갑게 인사를 한다. 도시 애들과는 다르구나. 불음남로 44번 길을 건너 오두리로 넘어 간다. 산 위 물탱크에 광성보가 3.94km 남았다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뉘 집인지 규모를 갖춘 한옥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이윽고 마을길로 들어서니 여염집에 성모마리아께서 나그네를 맞는다. ‘오두리 공소(公所)’다.

강화에는 신자끼리 믿음을 지키는 공소가 여럿 있다. 성당까지 가기에 교통이 불편했던 시절의 흔적이리라. ‘간뎃마을(가운데 마을)’을 알리는 큰 바위 안내판 앞에서 우향우 오두돈대로 나간다. 원래 제6코스의 종점은 광성보지만 이 번 길에는 오랜만에 오두돈대가 보고 싶다. 이제 오늘의 나그네길 끝이다. 다음차에는 충렬사를 찾아 가리라. 읍내로 나온다. 중앙시장 근처 ‘우리옥’으로 간다. 강화에 오면 으레 들르는 밥집이다. 누님뻘 되는 주인 아주머니와 마실 온 사람처럼 이야기를 나누며 병어찌게에 강화막걸리 한 사발, 시원쿠나. - 이한성 동국대 교수

교통편 신촌 3000번/ 영등포 88번/ 일산 96번/ 부평 90번 버스 ~ 강화버스터미널 하차(약 1시간 소요) 걷기 코스 버스터미널 ~ 인삼스파랜드 ~ 선원사터 ~ 삼동암천(개울) ~ 마리학교 ~ 화남생가 ~ 능내촌 표지석(2차선 도로) ~ 산길 공사장터 ~ 오두리 물탱크 ~ 오두리공소 ~ 간뎃마을 ~ 광성보/오두돈대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마애불과 문화유적지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갑니다.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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