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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준희 교수의 메디컬 40년 에세이]첫 국산양주 ‘조지드레이크’ 아시나요?

60년대 무교동 클럽부터 2010년대 막걸리까지 ‘술집 4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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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72호 박현준⁄ 2012.04.30 14:51:59

나는 술을 무척 좋아했고, 젊어서부터 술을 어느 곳에서나 마실 수 있었던 친구 덕에 젊어서부터 잘 못하는 술이나마 자주 마시곤 했다. 따라서 1970~1980년대의 술집 변천사가 뚜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1960년 말 ‘조지드레이크’라는 국산 양주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삶이 어려웠던 시절이기에 부자들 말고 일반 서민들에게는 막걸리가 고작이었고, 양조를 하는 집안이 부자로 부러움을 받던 시기였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역시 초반에는 외국 양주로 조니워커 등이 간간히 보였지만 서민에게는 그림의 떡이었고, 당시 박대통령이 제일 좋아했던 양주가 시바스리갈이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바 있다. 당시 무교동을 중심으로 소위 나이트클럽식의 맥주, 양주를 파는 집, ‘산다’ ‘뉴산다’ ‘스타더스트’ 등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한국 고급 술집거리의 시초다. 당시 여종업원의 팁이 3000원에서 시작해 1970년 중반 5000원, 70년대 말에 1만원까지 치솟았다. 이 나이트클럽 식의 술집 외에 고급 술집인 요정으로 오지남, 삼청각, 한림각 등이 있었지만 이는 소위 재별 고위 관료가 다니는 곳이었다. 1970년 말이 되면서 명동에 지금의 카페들이 많이 들어서고 퇴계로를 지나 이태원과 한남동에 지금의 룸살롱 스타일로 술집들이 성황을 이룬다. 그리고 1980년 초 여종업원의 팁이 2만원이 되면서 강남의 신사동을 시작으로 강남시대가 열린다. 그리고 대하, 대월, 명월, 신라 등 소위 큰 룸살롱이 한 시대를 풍미하게 된다. 1990년대 들어 강남 전체로 룸살롱이 퍼져 나가면서 룸살롱도 여러 급으로 나눠졌다. 룸살롱의 술값이 비싸지면서 서민들이 자주 가는 포장마차, 노래방 등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그리고 2010년대 들어 술값이 급격히 상승하고, 기업의 술 접대에 제한이 가해지면서 고급 술집들의 시대도 천천히 그 막을 내리기 시작한다. 양주 대신 와인이 유행하고, 막걸리가 인기를 끌고, 수많은 종류의 소주가 일반인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주된 수단이 됐다. 1990년 말부터 노래방이 출연해 성행했고 직장인, 연인, 심지어는 온 가족이 함께 노래방을 찾게 됐다. 그리고 룸살롱 등에서도 밴드가 직접 연주하던 시대를 지나서 노래방 기기를 놓고 직접 선곡을 해 노래를 부르고 가벼운 술을 즐기는 시대가 온다. 우리나라는 지난 30여 년간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술 문화도 급격히 변했다. 그 중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양주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국가로서, 조니워커의 경우 한국이 세계 1위 소비국이 되면서 조니워커 주최 골프대회에 순수 아마추어들을 가장 많이 초대하는 영예(?)를 맞기도 했다. 마시는 술의 양 꾸준히 줄어든 게 한국의 술집 40년사인데, 한국 드라마는 왜 아직도 화나면 병째 술마시는 장면 남발하나? 이런 나라인 만큼 젊은이들이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 감이 있다. 술은 조금 마시면 혈관이 확장되는 효과가 있으나 많이 마시면 혈관이 수축되고 심장에 큰 부담을 준다. 술이 신체에 전혀 해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서양식 식생활이 급속히 확산되면서 여기에 맥주 등 술을 많이 마시면 과다한 칼로리로 생활습관병을 일으키기 쉽고 건강을 악화시킨다. 맥주는 칼로리가 매우 높으며 특히 많이 마시면 위벽을 상하게 함으로써 소화 장애를 일으키기도 한다. 음주운전, 술을 먹고 이성을 잃는 경우, 입학-졸업 기념으로 술을 많이 마시는 경우 등이 더욱 기승을 부리면서 부작용도 함께 상승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닌가? 나는 1970년대 말 전공의로서 무의촌에 학생들과 함께 간 적이 있었다. 일을 끝내고 저녁에 식사 후 막걸리를 마시는데 학생들이 큰 대접에 막걸리를 가져와 한 번에 마시라는 성화에 그 한 잔을 마시고 의식이 들어보니 한밤중이었다. 막걸리에 소주 한 병을 섞어서 마셨으니…. 1990년대 와서는 대학교 입학 축하연과 회사 입사 축하연에서 술을 과하게 권해 간간히 사망 사고가 난 일도 있었다. 2000년대가 넘어서면서부터는 고등학교 졸업식 후에는 술 파티가 벌어지곤 했다. 우리나라 연속극을 보면 실연을 하는 등 괴로울 때는 소주나 양주를 병 째 들이키는 장면이 거의 나온다. 이것이 술 문화를 나쁘게 하는데 한 몫을 담당했다고 볼 수도 있다. 당신과 나 속의 ‘도박 유전자’ 폐가망신 해도 도박만 보면 손떨리는 사람들 왜 사람들은 도박에 중독되는 것일까? 최근 들어 마약이나 알코올 중독처럼 도박도 뇌의 도파민(dopamine)이라는 물질과 관련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예전에는 3대 도박 하면 화투, 마작 그리고 포커 게임을 들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경륜, 경마 거기에 각종 인터넷 도박까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인터넷 불법 도박 수익금 110억 원을 마늘밭에 묻었다가 발굴된 사건은 충격적이었다. 제주도에서는 택시 영업을 하는 사람들이 경마에 미쳐서 폐가망신을 해서 제주 전체가 떠들썩한 일도 있었다. 서울의 경마장에서는 자동차를 맡기고 돈을 빌려 경마 내기를 하는데 아무리 좋은 차라도 몇 푼 돈을 못 받고, 돈을 빌려간 뒤 몇 달 안에 차를 찾아가는 비율이 60% 이상이나 된다고 한다. 내가 잘 아는 사람의 부인이 밤중에 다급히 전화를 걸어 “남편이 죽으려고 약을 먹었다”고 했다. 급히 치료해 살아났는데 그 친구 왈 “나는 살아서는 안 돼. 사채업자들이 나를 가만두지 않을 거다.” 요즈음 유명 연예인들이 동남아시아에서 대형 도박을 하다 돈은 돈대로 탕진하고 외화 반출 도박 혐의로 구속되는 사태가 가끔 발생하지만 이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강원도에 가면 아침 일찍부터 줄을 서서 좋은 자리를 맡으려고 대기한다고 한다. 나는 미국에서 라스베이거스, 어틀랜틱 시티, 리노 등 대형 도박 도시에 가본 적이 있다. 어느 곳에서나 동양인 특히 중국인과 한국인들이 극성이었다. 돈을 다 잃고 빚을 져서 카지노장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사람들 중에 동양계가 대부분이었다. 청소를 하다가도 도박이 하고 싶은지 멍하니 도박판만 쳐다보는가 하면 같은 동족임이 확인되면 다가와서 칩을 몇 개만 달라고 하는 경우도 많다. 어떤 할아버지가 하도 부탁해서 몇 개를 주자 청소하던 손을 놓고 바로 도박판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그런 처지에 놓인 한국 사람의 하소연을 들은 일이 있다. “아무리 돈을 잃어도 돈이 조금만 더 있으면 금방 만회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카지노는 떼돈을 버는 사업이며, 이 권리를 따내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 한때는 인디언 거주지에 카지노 시설을 허용해 자립을 유도했다고도 한다. 중국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어떤 사람이 너무 도박에 미쳐 부인까지 팔아먹어서 아버지가 오른 손목을 잘라내고 본인도 절대로 도박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는데 몇 달 뒤에는 왼손으로 능숙하게 마작을 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도박을 한다고 해서 누구나 중독이 되는 것은 아니다. 뇌의 이상에 의한 유전적 경향이 크다고 한다. 도파민 운반 유전자 등 도파민 분비에 관계하는 유전자들이 밝혀지고 있다. 그러므로 많은 중독증들이 유전자와 환경적 요인의 복합적인 작용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에 거주할 때 가까운 거리에 카지노가 있어 처음에는 자주 가서 블랙잭 등을 해봤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재미가 없어지는 것이었다. 내게는 이런 유전인자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 설준희 세브란스심혈관병원 심장웰네스센터장 / 운동치료클리닉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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