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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 ⑨]강화도령이 순이 손잡고 걷던 길

국난 맞아 죽음으로 맞선 김상용 선생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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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73호 박현준⁄ 2012.05.07 13:09:42

팔만대장경의 흔적을 찾아 강화(江華)길을 다시 걷는다. 오늘 길은 강화도령 철종(哲宗)도 만나고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죽음으로 맞선 선원 김상용(仙源 金尙容) 선생도 만나는 길이다. 버스가 강화터미널에 도착한다. 터미널에서 나와 우측으로 걸어 나오면 강화의 대로 48번 국도와 만난다. 버스가 터미널로 들어갔던 그 길이다. 좌(서쪽)로 꺾어 잠시 가면 좌측 샛길 안으로 성문(城門)이 보인다. 강화산성(江華山城)의 남문이다. 새로 복원해 놓아 깔끔한 모습으로 서 있다. 밖에는 강화남문이라 썼고 안에는 안파루(晏派樓)라고 편액했다. 본래 몽고의 2차 침략에 대비해 무신정권의 실력자 최우(崔瑀, 후에 崔怡로 개명)는 고종을 종용해 1232년(고려 고종 19년) 강화로 천도했는데, 이듬해인 1233년부터 내성(內城), 중성(中城), 외성(外城)을 쌓아 나갔다. 그때의 내성 자리를 기준으로 해 조선조 숙종 때 쌓은 성(城)이 대체로 지금의 강화성에 해당한다. 지금 복원한 남문도 그 때 중수한 남문자리에 세운 것이다. 이곳은 병자호란의 아픔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곳이다. 조선왕조실록 인조 15년(1637년) 1월 기사를 보자. “전 의정부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이 죽었다. 난리 초기에 김상용이 임금의 분부에 따라 먼저 강도(江都)에 들어갔다. 적의 세력이 이미 밀어닥치니 분사(分司)에 들어가 자결하려고 하였다. 그리고는 성의 남문루(南門樓)에 올라가 앞에 화약(火藥)을 놓고 좌우를 물러가게 하고는 불 속에 뛰어들어 스스로 타죽었다. 그의 손자 한 명과 노복 한 명도 따라 죽었다. 前議政府右議政金尙容死之. 亂初, 尙容因上敎, 先入江都. 及賊勢已迫, 入分司, 將欲自決, 仍上城南門樓, 前置火藥, 麾左右使去, 投火自燒. 其一孫、一僕從死.” 김상용(金尙容)은 누구인가?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이렇게 읊으며 청나라로 잡혀간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 선생의 형으로 척화파(斥和派)의 선봉에 선 분이다. 이 분은 본래 인왕산 아래 청풍계(淸風溪)에 사셨는데 겸재 정선은 선생의 고택이 남아 있는 청풍계 그림을 여럿 남겼다. 기회 되시면 국립박물관, 간송박물관, 고려대박물관에 남아 있는 겸재의 그림을 통해 선원 선생의 고택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 선원 선생이 뜻한 바 있어 지금의 강화 선원면 선행리(仙源面 仙杏里)에 집을 짓고 은거하셨다. 그런 선생이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종묘(宗廟: 조선 왕가 위폐)와 세자빈, 세손을 모시고 강화로 왔는데 강화가 함락되자 스스로 자결하신 것이다. 나라가 힘없으니 슬픈 역사가 남는구나. ‘가노라 삼각산아’ 읊으며 동생 김상헌은 청나라로 잡혀가고 강화도에 칩거하던 형 김상용은 불속으로 뛰어들어 자결했으니… 남문을 떠나 길을 건너면 강화군청이 나오고 좌측 골목길을 200m 정도 가면 용흥궁공원이 나온다. 이 공원 좌측 끝에는 비각이 하나 서 있는데 김상용 순절비(殉節碑)가 두 개 서 있다. 강화유수를 지낸 공(公)의 종증손 김창집(金昌集)이 세운 비와 7세손 김매순(金邁淳)이 세운 비이다. 그 뒤로는 공장굴뚝 하나가 덩그러니 남아 있다. 강화의 대표기업 심도직물의 옛 공장굴뚝이다. 우리도 많이 성숙하였다. 그 고장에 큰 힘이 되었던 공장의 굴뚝도 보존할 정도가 되었으면 성숙한 사회가 된 것이 아니겠는가. 필자도 젊은 날 심도직물의 ‘웸브리’ 넥타이를 맸던 기억이 새롭다. 공원 앞쪽 언덕 위로는 품위 있는 한옥 건물이 서 있다. 성공회 강화성당이다. 1900년에 건립한 건물인데 입구는 사찰의 일주문과 천왕문처럼 두 개의 문을 세우고 안으로 금당(金堂)처럼 천주성전(天主聖殿)을 앉혔다.

기둥마다 5개의 주련도 걸어 놓았는데, ‘복음을 널리 펴서 백성들에게 영생의 방법을 깨우치시도다(福音宣播啓衆永生之方)’라고 마무리하고 있다. 남의 나라에 와서 자신들의 믿음을 전할 때 스스로 조화롭게 동화되고 그 전통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전하는 참모습을 여기에서 보는 듯하다. 믿음을 달리 하는 분들도 강화 가시면 한 번 들려 보기를 권한다. 전체적 건물이 노아의 방주(方舟)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이제 이 공원의 주인공인 용흥궁(龍興宮)을 둘러본다. 이름이 암시하듯 용(龍)이 흥(興)한 곳이다. 조선 24대 헌종은 4명의 아내에게서 간신히 딸 하나를 얻었는데 이도 일찍 요절하니 무자식으로 세상을 떠났다. 하루라도 왕좌를 비워놓을 수 없었던 왕실에서는 왕실의 큰어른인 순원왕후(순조의 후비로 안동 김씨)가 헌종의 외가 풍양 조씨가 손을 쓰기 전에 정조의 이복 아우 은언군(恩彦君)의 손자 이원범을 옹립하였다. 역모와 연루돼 집안이 강화도로 귀양 온 몰락한 종친에서 자라던 강화도령 이원범은 농사나 짓는 시골 무지랭이였다. 그런 그가 일약 조선의 왕이 된 것이었다. 이곳 용흥궁 자리는 강화도령이 살던 집터인데, 강화도령이 왕이 된 4년 후(1853년) 강화유수 정기세가 기와로 집을 짓고 용흥궁이라 하였다. 그러니 실제로 강화도령이 살았던 집은 아니다. 강화도에서는 이곳에 용흥궁공원을 만들고 ‘강화도령 첫사랑길’이라고 이름 지어 걷기 길을 만들었다. 이곳에서 출발해 철종의 외가가 있는 냉정리(冷井里)까지 약 12km의 길이다. 정말로 강화도령은 이곳에 첫사랑의 추억이 있는 것일까? 기록이 없으니 알 수는 없다. 필자의 어린 시절 우리 어머님이 열렬한 팬이셨던 라디오 연속극 ‘강화도령’이 있었다. 당시 유명 작가였던 이서구 선생 작품이었는데 여주인공의 이름은 양순이였다. 그래서 필자는 오늘 원범과 양순의 첫사랑을 마음에 담고 길을 떠난다. 봄날 풋사랑처럼 바람이 산들하다. 큰길을 건너 중앙시장A동 앞길로 들어선다. 잠시 후 보도 한 가운데 옛 우물이 있는데 둘레석은 없고 발밑에 투명 강화 플라스틱으로 덮어 살려 놓았다. 둘레석을 올리고 덮었더라면 옛 모습이 살아나 더 좋았으련만….

앞으로 보이는 큰 건물은 합일초등학교다. 우측 길로 들어선다. 담 끝에 꽃그림을 그려 놓았는데 아래쪽에는 ‘학도애향단’이라고 쓴 초석이 보인다. 이 게 아마도 70, 80년대 학교 새마을운동 하던 그런 과거의 한 조각들이 아니던가. 여기서 학교 담을 끼고 좌로 오르면 ‘東軒廊廟’라는 현판을 단 집을 만난다. 관운장을 모시는 동관제묘(東關帝廟)이다. 유적 0323-27-036호로 지정돼 있으며, 1885년(고종 22년)에 세운 것이라 한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우리를 도와준 이래, 선조, 숙종, 고종 때에는 국가적으로 관운장을 모시는 묘(廟)가 성행했고, 무속에서도 관운장을 무신(武神)으로 모셨다. 지도를 보니 강화 시내에는 이곳 말고도 북관묘, 남관묘가 더 표시돼 있다. 대만에 가면 관운장을 모시는 곳이 많은데 잘 모시면 돈복이 불같이 일어난다는 중국인들의 믿음이 있다. 서울에도 동묘와 남묘가 남아 있으니 이제는 중국인들의 관광코스로 활용하면 좋을 것이다. 또한 여기는 무형문화재 8호인 ‘강화 외포리곶 창굿’을 지키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길을 돌아 내려온다. 좌로 큰 교회가 보인다. 강화중앙교회이다. 이 교회에는 기독교역사관이 있어 초기 강화의 기독교 역사 흔적들을 만날 수 있다. 교회 앞을 지나면 언덕 위로 순복음교회가 있다. 그 앞 쪽으로 400년 된 향나무가 있는 ‘향나무 우물’을 만난다. 보호수로 지정돼 있는데 나이는 감출 수 없어 굵은 주름이 온 몸을 감싸고 있다. 이 지역의 유명한 샘물은 이제 먹는 물로 사용하기에는 너무 관리가 부실하다. 주변에는 오래 전에 지은 문화주택단지가 있다. 사람들은 ‘향나무주택’이라 부른다. 주택단지 좌측으로 오르면 강화 남산 능선으로 이어진다. 능선길 여기저기로 기와 파편이 발길에 걸린다. 경주 남산이 신라문화의 보고(寶庫)이듯이 강화 남산도 고려 천도 40년의 많은 흔적이 남아 있는 현장인 듯하다. 능선길을 오르다 보면 좌측 아래로 청수암이라는 절이 있다. 궁금하여 내려가 본다. 역사는 알 수 없는데 절은 깨끗하게 불사를 해 놓았다. 마당 한 구석에 있는 묘지석인지, 마을 앞 벅수(돌장승)인지 도깨비처럼 두 눈가가 비쭉 올라간 석인(石人) 상에 눈길이 간다. 멍멍이가 짖어댄다. 낯선 이가 샘물 한 바가지 먹는 것이 싫어서 그러느냐? 능선으로 다시 돌아와 길을 오르면 잠시 후 삼우회란 이름을 써 놓은 청화약수터에 닿는다. 원범이와 양순이를 크게 그리고 ‘강화도령 첫사랑길’ 길안내를 해 놓았다. 그 숲길로 잠시 오르면 태고종 약사사 입구를 지나고 이어서 강화산성 암문에 닿는다. 여기에서는 좌로 새로 복원해 놓은 남장대(南將臺)가 보인다. 성벽 길을 100여m 오르면 남산 정상에 닿는다. 남장대가 봄바람 속에 날아갈 듯 서있다. 이 정상에는 건물도 있었고 봉화대도 있었다. 이제는 터만 남았다. 사방으로 강화가 내려다보인다. 저 너머로 김포가 보인다. 문수산성이 호응하듯이 마주 보고 있다. 이제 남으로 길을 잡는다. 첫사랑길을 알리는 리본이 매여져 있다. 공동묘지에 이를 즈음 첫사랑길은 좌측 남산리 방향으로 하향 길을 잡는다. 우리는 역사의 길을 가기 위해 그대로 능선 길로 나아간다. 무덤군이 이어진다. 무덤이 끝날 무렵 잘록한 언덕길 부분 안부(鞍部)에 닿는다. 무덤을 모두 이장시키려는지 신고하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어기면 3개월 이하 징역이나 5만 원 이하 벌금이라 한다.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 5만 원과 3개월 징역이 같은 레벨이라니….

안부에서 좌측 남쪽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병풍암사터를 찾아가는 길이다. 우측 북쪽 길은 국화리 저수지 방향이다. 병풍암사터는 근세 여러 자료에 그 이름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어느새 잊혀 그 내력도, 이름도, 위치도 관심권에서 멀어져 갔다. 안부 좌측 길로 접어들자마자 수십m를 미처 못가서 기와 편들이 발길에 걸린다. 내력은 알 길이 없다. 약 100m 더 내려와 앞 쪽으로 소나무가 많이 나타날 즈음 내려가던 길 좌측을 살피면 희미하게 길 흔적이 있다. 이 흔적을 따라 50여m 나아가면 높이 2~3m로 30여m 길이로 펼쳐진 병풍바위를 만난다. 주위를 살피면 초석과 기와파편이 흩어져 있다. 병풍암사터이다. 누군가 이곳에 기도터를 잡았는지 작은 초막도 있다. 이곳에 묻혀 있을 역사의 기록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언젠가 발굴이 이뤄져 잊힌 이야기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구나. 시골 무지랭이에서 일약 조선의 왕이 된 ‘강화도령’ 철종을 기리기 위해 강화도에는 ‘강화도령 첫사랑길’이 만들어져 있으니… 다시 안부로 돌아온다. 가던 능선 길로 계속 나아간다. 방향은 서쪽이다. 언덕을 오르는 길에도 기와파편이 흩어져 있다. 무슨 건물들이 있었던 것일까? 아름다운 능선 길을 따라 1~2km 걸으면 비로소 고갯길을 다시 만난다. 좌측으로 내려가자. 500여m 내려오면 우측으로 학교 같은 건물이 보인다. 성산청소년수련원이다. 이곳에서 좌측 숲길로 내려오도록 하자. 발밑에 기와파편을 볼 수 있는 건물터가 이어진다. 남산은 어디를 가더라도 조금 관심을 가지면 기와파편과 만나게 된다. 강화고려 40년 전국에서 난을 피해 건너 온 이들이 모두 어디에 터를 잡고 살았겠는가. 아마도 남산 주변이 가장 많았을 것이다. 잠시 후 작은 저수지가 나타나고 시리미마을 표지 방향으로 마을길로 들어서 작은 언덕을 돌면 충렬사(忠烈祠)가 있다. 충렬사는 김상용 선생을 비롯해 선열 26위를 모신 사당이다. 본래 김상용 선생이 사시던 집터였다고 한다. 그러면 그 이전에는 이 땅에 무엇이 있었을까? 바로 옛절터길 ⑧에 언급했던 팔만대장경이 용산강으로 출발한 절 선원사(禪源寺)가 있었다는 주장이다. 김로진의 강화부지(江華府志)에는 ‘선원사는 선원리에 있다(禪源寺在仙源里)’고 했으며 속수증보강화지에도 ‘선원사 지금 선행리 충렬사 문 앞 일대의 땅이 바로 그 유지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 이외에도 타당성 있는 주장이 여럿 있으나 아직 인정받고 있지는 못하다. 충렬사 주변의 넓은 들판과 무수히 깨어져 있는 기와 편을 보면서 필자의 마음은 왠지 이곳에 머문다. 충렬사 주변에 대한 발굴이 이뤄져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려 본다. 궁금증을 묻고 충렬사를 떠난다.

개울 건너에 선행리 경로당으로 간다. 이곳에서 개울 둑길로 동쪽으로 향한다. 냉이와 쑥이 지천이다. 나물 캐는 아낙네들이 많다. 나도 슬그머니 그 속에 끼고 싶구나. 개울 둑길로 1km쯤 오면 세련된 건물 ‘보리떡 도서관(나무들의 집)’이 있다. 화곡동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지은 일종의 수양관이다. 외관이 마음에 들어 관리하시는 자매님의 양해를 구해 건물 구경을 하였다. 숙소, 교회당, 쉼터, 공동의 공간 등 내 눈에는 무엇 하나 버릴 것이 없다. 시골길에도 이런 공간을 만들 수 있구나. 사람이 아름다운 날이다. 길은 남으로 이어지는데 폐가에 무너진 건조장 곁을 지난다. 아마도 담배 조장 아닐까? 없어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으로 수리해서 보존했으면 좋겠다는 조바심이 생긴다. 앞쪽으로는 토성(土城)이 길게 산등성을 넘고 있다. 아마도 고려 때 중성(中城)의 흔적이 아닐까 싶다. 산길 지나 아스팔트길 넘으니 찬우물(冷井)이다. 예부터 강화 이 고갯길의 명물이었다. 화남 선생도 시(詩)를 남기고 있다. 앞으로는 외포리로 향하는 2번 지방도로가 있다. 길을 건너 잣나무 조림지로 들어선다. 조림지 너머로 무덤들이 많다. 좌측 능선 끝은 대문(大門)고개다. 고리짝(고려적)에 큰 성문이 있던 곳이다. 숲을 지나면 실낙원(實樂園)이라고 이름 붙인 복합주택건물을 지나 선원초등학교 고개를 건너게 된다.

여기부터 2~3km 무덤덤한 농촌 길을 지난다. 이윽고 마을이 나타날 즈음 큰 무덤들을 만난다. 동네 분께 물으니 옛 염보현 서울시장의 조상 묘인데 허묘라 한다. 이곳을 지나 잠시 가면 마을 아래쪽에 철종 외가에 닿는다. 철종 4년(1853년)에 지은 외삼촌 염보길(廉輔吉)의 집이다. 단아한 한옥인데 매헌서당(梅軒書堂)이라는 편액이 눈길을 끈다. 강화도령은 양순이의 손을 잡고 이곳까지 왔던 것일까? 집 서쪽 언덕에 있는 세 외삼촌 묘를 둘러본다. 비문(碑文)에 ‘용담(龍潭) 염(廉)’씨에서 ‘용담’이란 글씨가 패이면서 글씨가 새롭게 고쳐 쓰여 있다. 파평 염씨 어떤 이가 이 비문의 용담을 파평으로 고쳐 놓고는 철종의 외가 행세를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발각되어 다시 고쳐 놓은 흔적이라 한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에 기대어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이들은 그칠 줄 모른다. 비끼는 저녁 해가 빙그레 웃는다. - 이한성 동국대 교수

교통편 영등포, 송정역: 김포 88번 버스 타고 강화터미널 하차 *신촌, 홍대, 합정: 김포 3000번 버스 타고 강화터미널 하차 *일산: 김포 96번 버스 타고 강화터미널 하차 *부평: 김포 90번 버스 타고 강화터미널 하차 걷기 코스 터미널 ~ 남문 ~ 용흥궁공원 ~ 동관제묘 ~ 향나무우물 ~ 남장대 ~ 병풍암사터 ~ 성산청소년수련원 ~ 충렬사 ~ 보리떡 도서관 ~ 찬우물 ~ 선원초교 ~ 철종외가/ 철종외가묘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마애불과 문화유적지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갑니다.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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