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쇄
  • 전송
  • 보관
  • 기사목록

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외국 원작은 왜 한국에만 오면 번들번들해질까

원작에선 소시민 주인공, 한국에선 엄청나게 대단하신 분들로 탈바꿈

  •  

cnbnews 제274호 최영태⁄ 2012.05.14 18:19:05

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을 실실 웃으며 재미있게 봤다. 그런데 줄거리를 쫓아가면서 한 가지 의문이 슬슬 고개를 들었다. “이 스토리가 한국 얘긴가?” 영화 마지막에 자막이 올라가는 걸 힐끗 보니 외국 말이 있는 것 같다. 혹시나 싶어 인터넷을 찾아보니 아르헨티나 영화(Un novio para mi mujer, 아내를 위한 남자친구. 2008년 작)를 리메이크 한 것이란다. 그러면 그렇지. 외국 영화를 리메이크하면서 어느 정도 내용을 고치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다. 그게 창작이다. 그러나 그간 번안 작품을 볼 때마다 느꼈던 “도대체 한국 사람들은 왜 이럴까?”라는 의문은 이번에도 계속됐다. 원작 아르헨티나 영화와 한국판 ‘내 아내의 모든 것’의 가장 큰 차이는 등장인물들의 위대함이다. 원작의 남녀 주인공은 그냥 보통 소시민이다. 아내를 꼬시는 카사노바 님도 아르헨티나 산은 그저 허우대만 멀쩡하게 힘좋게 생긴 남자일 뿐, 중고차를 타고 다니는 소시민일 뿐이다. 소시민도 얼마든지 웃길 수 있는데… 그런데, 이런 원작 인물들이 한국에 뜨면 그냥 위대해지신다. 주인공 정인(임수정 분)과 두현(이선균 분)은 일본 유학 중에 일본어로 대화를 나누다 사랑에 빠진 분들이시며, 정인은 가정주부지만 요리에 엄청난 일가견을 가진 부인이시다. 건축가인 남편은 지진 공포감을 가진 아내를 위해 “지상에서 지진에 가장 안전한” 집을 직접 지어주시며, 남편과 카사노바의 승용차는 당연히 아주 반질반질한 신품 고급차다. 남편의 부탁을 받고 아내를 꼬시는 카사노바 성기(류승룡 분)에 이르면 대단담은 극치를 향해 달린다. 그는 이탈리아어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국제파 인텔리이며(그래서 외국 여자들이 비행기를 타고 내한해 죽자 살자 매달린다), 펜트하우스에서 자신의 예술 작업을 펼치는 돈 많고 멋진 예술혼이다. 아니, 성기처럼 대단한 남자가 ‘청부 꼬시기’를 하다가 정인에게 반했다는 스토리인데, 그렇다면 아내는 찌질남 남편을 버리고 당연히 대단한 성기 품에 안기는 게 더 논리적으로 일관성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도 아내 정인은 자신을 쫓아내려는 남편을 더 생각한다니, 이건 좀 이상하지 않나? 원작의 아르헨티나 남편은 일과 후에 축구 클럽에서 볼을 차는 소소한 남자고, 아내는 권태감에 다리를 떨지만 급한 볼일이 생기면 휭하니 자전거를 타고 나가는 날씬한 아줌마일 뿐이다. 원작의 카사노바 씨도 원래는 대단한 인텔리이신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영화 속에서 외국어를 씨부렁거리지는 않는다. 여자 꼬시기도 성공률은 높지만 퇴짜를 맞기도 하니 한국판 ‘성기’의 대단하심과는 거리가 먼, 그저 잘생긴 동네 아저씨일 뿐이다. 성공하지 못한 것들은 섹시하지 않으니 사랑도 말라는 나라 한국판 ‘내 아내의 모든 것’에서는 등장인물들을 너무 엄청나게 바꿔 놔, 오히려 스토리의 앞뒤가 잘 맞지 않는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소시민 주인공은 이미 한국의 드라마에서 자취를 감췄다. 재벌이 주로 주인공이더니, 요즘은 더 멋있는 왕족이라야 드라마가 되나 보다. 그리고 소시민을 주인공으로 한 외국 원작이 한국에 들어오면 거의 항상 엄청난 ‘버터칠’이 행해진다. 아주 재밌게 본 일본 드라마 ‘결혼 못하는 남자’는 한국판이 되니 등장인물이 너무 짙은 화장기로 화면에서 튀었고, 의학 드라마 ‘하얀 거탑’도 일본 원작보다 한국판 의사들의 어깨에 훨씬 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외국과는 달리 소시민이 더 이상 주인공이 못 되는 이유는 물론 다들 안다. 한국이 ‘신분제 사회’로 돌아가는 마당에, 1%를 제외한 나머지 99%는, 비록 내가 그 안에 포함돼 있다 하더라도, 그 찌질함을 스크린 속에서는 보기 싫다. 지긋지긋하니까. 똑같은 얘기라도 부자가 하면 멋지지만, ‘성공하지 못한 것들’이 하면 찌질하다. 중요한 건 말의 내용이 아니라 누가 말하냐다. 그래서 한국은 이제 ‘성공하지 못한 자, 입을 닥쳐라’다. 사정이 이러니, 외국의 소시민 얘기(스토리와 대사가 재미있는)를 한국판으로 번안하는 당사자는 “어떻게 버터칠을 해야 관객이 받아들일까”라고 고민하는 게 너무 당연하다. 속으론 빚에 찌들어도 겉으로는 명품과 외제차를(최소한 반질반질한 국산 고급차라도) 구비해야 사람대접을 받는 나라다. 이런 나라에서 성공하지 못한 것들은 섹시하지 않다. 따라서 원작의 수수한 카사노바 씨는 한국판에선 엄청난 인텔리, 거부로 탈바꿈해야 했다. 성공 못한 것들은 사랑도 말라는 나라다.

배너
배너
배너

많이 읽은 기사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