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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느리게 살고파 배타고 영종 건너가니

인천대교 타면 얼릉 건너지만 느릿느릿 떠도니 좋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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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79호 박현준⁄ 2012.06.18 11:41:15

살다 보면 어느 날, 어딘가 깃털처럼 가볍게 다녀오고 싶은 때가 있다. 이런 날에는 이 길을 걸어 보자. 1호선 전철이 종점 인천역에 닿는다.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 경인선의 시발점이었던 곳이다. 주안역이나 동인천역에 비해 역사(驛舍)는 작고 서민적이다. 역을 나서면 조그만 광장 건너로 차이나타운의 패루(牌樓: 게이트)가 보인다. 중국 웨이하이(威海) 시에서 기증하였다 한다. 우리나라 자장면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니 들려 자장면 한 그릇 맛본다. 인터넷이나 언론매체에 많이 나오는 집은 너무 퓨전(fusion)이라서 그냥 옛집에서 맛보는 게 편하다. 다시 역광장으로 내려오면 월미도행 버스(2, 15, 23, 45, 51…)가 쉴 새 없이 도착한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라서 5분 뒤 월미도 입구에서 내린다.(월미도를 그냥 지나치려 하면 선착장 입구에서 내리실 것) 월미도(月尾島), 우리의 섬이면서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곳이었다. 1904년 러시아 함대를 급습해 승리를 쟁취한 일본이 월미도를 사실상 접수한 뒤 패망할 때까지 일본의 병참기지와 임해 유원지였고, 6.25에는 인천상륙작전으로 초토화되었다. 그 후 미군의 군사기지, 우리 해군 2함대 사령부의 주둔지로서 일반인들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2001년부터는 모두 개방돼 시민의 품으로 돌아 왔다. 대부분의 섬 이름이 그렇듯이 월미도도 사람들이 설명하는 ‘달의 꼬리’ 모양이라서 월미도가 아니라고 한다. 월미도의 다른 한자 표현이 어을미(於乙味, 魚乙未)인데, ‘어을’은 ‘어우르다’이며, ‘미’는 ‘물’이라 한다. 미더덕(물더덕), 미나리(물나리)에서 보듯 ‘미’는 ‘물’이다. ‘물이 어우러지는 섬’이 월미도인 것이다. 이제는 물뿐 아니라 사람도 많이 어우러진다. 월인도(月人島)라고 별명 하나 만들어도 될 것 같다.

공원으로 가꾸어진 월미도로 들어서면 좌측에 한국 전통 정원을 조성해 놓았다. 예산은 좀 들었을 것 같은데 다행인 것은 완성도를 어느 수준은 갖추었다는 점이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정통 정원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생각으로 곰곰 둘러본다. 공원 서쪽 끝에는 문화관광 해설사가 계시니 시간 여유가 되면 도움을 받는 것도 좋다.(010-7276-7277) 조선왕조실록과 영종진읍지(永宗鎭邑誌)에 의하면 이곳 어딘가에는 임해사(臨海寺)란 절이 있었고 그 터에 행궁(行宮)을 세웠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일본군의 저탄장(貯炭場) 위쪽이라는 의견과, 전통 정원 남쪽이라는 의견이 엇갈려 있다. 영종진읍지 기록을 보자. ‘행궁은 월미도에 있다. (영종)진 남쪽 수로 7리.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향해 있다(子坐午向). 정전 8간, 동랑(東廊) 4간, 서랑 4간, 남랑 7간, 수직간(守直間:지키는 건물) 3간, 내중문 1간, 외중문 1간, 옛 임해사(臨海寺) 터에 세웠으며 일용기물은 인천부 어용고(御用庫)에 있다.’ 왜 이곳 월미도에 임금의 행차 시 머물 수 있는 행궁을 세운 것일까? 그 답은 숙종실록(34년, 1708년)에 있다. “부사용(副司勇) 민치대(閔致岱)가 상소(上疏)하기를, 인천의 영종은 바다 방어의 중요한 통로입니다. 서울과의 거리가 1백 리도 안 되는 곳이며, 삼남(三南)으로부터 오는 대문과 같아서 강화와 서로 돕게 되니, 강화를 중히 여기는 계책으로 영종을 버리고는 그 형세를 의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옛 재상 홍명하(洪命夏)는 행궁(行宮)을 인천(仁川)과 월미도에 설치하기를 건의하였습니다. 이른바 월미라는 곳은 곧 인천과 영종도 사이의 작은 언덕인데, 그 분의 생각은 아마도 사태의 시급함이 병자년·정묘년(丙子胡亂, 丁卯胡亂)과 같이 되거나 녹은 얼음으로 길이 끊어지고 갑곶진(甲串津: 현재 강화대교 자리, 옛 나루터)을 통할 수 없게 된다면, 인천에서 영종으로 오고, 영종에서 강화로 가는 것입니다.(其意蓋爲事急如丙、丁, 而流澌又斷, 甲串不可通, 則自仁川至永宗, 自永宗至江都也)”

국가 긴급사태 시(時), 서울에서 강화로 직접 가는 강화대로가 끊겼을 때 제2의 루트로서 ‘월미도 ~ 영종도 ~ 강화도’ 루트를 개설했음을 알 수 있다. 강화까지 하루에 갈 수 없으니 경관 좋은 이곳 월미행궁에서 하룻밤 머물고 영종 거쳐 강화로 가시라는 배려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주무신 조선왕은 안 계셨다. 그 후 다행히 그럴 일이 없었던 것이다. 이제 산책로로 들어선다. 월미산 아래쪽 길을 순환하여 돌 수 있는 경관 좋은 산책길이다. 한 바퀴 다 돌면 2.3km라 한다. 오늘은 월미산(108m)도 오르지 않고 순환도로를 돈다. 도중에는 옛 러시아 저탄장 표지판도 있고, 문화재 발굴을 알리는 주의판도 있다. 길을 돌아 북쪽 선착장으로 간다. 지금이야 영종도 가는 길에 두 개의 다리가 놓였지만 예전 공항이 생기기 전 이 선착장이 영종도로 가는 주통로였다. 영종도 주민들의 발이었고 필자처럼 떠돌기를 좋아하는 이들의 간이역이었다. 이곳 선착장에서 빤히 건너다보이는 영종도를 바라보며 배를 타면 20분 안에 영종으로 넘어 간다. 연초에는 승객이 없어 운항을 중지한 일이 있었다. 그 때 얼마나 속이 쓰렸던지…. 편리성으로야 영종대교나 인천대교를 이용하면 그만이지만 느리게 살고 싶은 날은 이런 곳에 와서 배를 타는 일탈(逸脫)을 잃을까 걱정했었다. 다행히 배가 다시 떴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부리나케 달려 왔었다. 배는 차도 태워주고, 사람은 뱃삯 3000원에 건너다 준다. 매시 정각에 출발하고 영종에서 돌아오는 배는 매시 30분마다 뜬다. 배가 바다로 나간다. 갈매기들이 떼를 지어 따른다. 사람들이 주는 새우깡에 맛들인 놈들이다.

오른쪽으로는 작약도가 손에 잡힐 듯하다. 옛 지도에는 물치도(勿淄島)라고 쓰여 있다. 신미양요(1871년) 때에는 미 군함 5척이 이 섬 앞에 정박했다가 자기들 맘대로 이 섬을 우디 아일랜드(Woody Island)라고 이름 붙였다. 생각해 보면 참 우스운 자들이다. 남의 땅 이름을 주인의 허락도 없이 지그들 마음대로 바꾸다니…. 이것만이 아니었다. 병인양요 때는 또 프랑스 군이 이 섬을 보아제(Boisee)라고 개명하였다. 힘없으면 멀쩡한 이름도 도둑맞는 원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다른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아무리 머리띠 두르고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외쳐도 힘없으면 그 땅은 다케시마(竹島)가 될 수도 있다. 배가 영종도 구읍(舊邑) 배터에 도착한다. 이곳에는 영종 뱃길과 주변 섬들(영종, 용유, 무의, 월미, 신불, 물치, 응, 삼목)을 지키는 영종진(永宗鎭)이 있었다. 오랜만에 온 영종진 구읍마을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하늘도시라는 이름의 아파트단지가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병화(兵火)는 지상(地上)의 흔적만 쓸어가지만 개발은 그 터마저 모두 앗아가 버렸다. 이 지역에 관련된 가장 오랜 기록은 송나라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실려 있다. 고려와 송(宋)나라는 형제처럼 가까운 나라였다. 송이 북방의 거란(遼나라)에 밀려 남쪽으로 쫓겨나자 고려와 통교(通交)할 방법이 남쪽 뱃길밖에 없었다. 그래서 남선항로(南線航路, 또는 明州航路)가 개척됐는데 절강성 명주(明州, 현재 寧波)를 출발해 한중 경계인 협계산(夾界山)을 지나, 배도 ~ 흑산(黑山) ~ 죽도 ~ 고군산 ~ 마도 ~ 자연도(영종도) ~ 예성강 벽란도를 통해 개성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지금은 빠르고 값비싼 인천대교-영종대교가 영종도를 연결하지만 예전에는 월미도에서 배타고 건너가는 게 유일한 길. 느린 게, 떠도는 게 좋은 사람은 이 배타고 백운산 한번 올라보길 1123년(고려 인종 1년) 이 뱃길을 따라 사신으로 왔던 서긍은 자연도(영종도)에 머물면서 이때의 일을 고려도경에 기록하였다 “자연도(紫燕島): 이날 신시 정각에 배가 자연도에 정박했는데 이곳은 곧 광주(廣州)이다. 관사는 산에 의지했고 써 붙이기를 ‘경원정(慶源亭)’이라고 하였다. 경원정 곁에는 막집(幕屋)이 수십 간이다. 주민들의 초가집도 많다. 그 산의 동쪽에 섬이 하나 있다. 날아다니는 제비가 많아 그렇게 이름(紫燕島)을 지은 것이다. … 제물사(濟物寺)에 들러 원풍(송 신종의 연호) 때의 사신인 고 좌반전직(左班殿直) 송밀(宋密)을 위해 반승(飯僧) 의식을 행한 후에 배로 돌아왔다. (是日申正。舟次紫燕島。卽廣州也。倚山爲館。榜曰慶源亭。亭之側。爲幕屋數 十間。居民草舍。亦衆。其山之東一嶼。多飛燕。故以名之。 … 過濟物寺。爲元豐使人故左班殿直宋密。飯僧畢歸舟。)”

900년 전의 기록이다. 지금은 파헤쳐진 구읍 자리에 경원정이라는 관사가 있었다. 영종도의 옛 이름인 자연도(紫燕島)는 제비가 많아 붙인 이름이라는 친절한 설명이 곁들여 있다. 그리고 제물사(濟物寺)란 절이 있었다. 송나라 신종(1048~1085) 때 사신으로 왔던 송밀이 자연도에서 사망했는데 그를 위해 재식(齋食: 飯僧)을 베풀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관아가 있는 산 동쪽에 섬이 하나 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일까? 지금은 배터가 있는 곳이 영종도와 이어져 있으나 옛 지도를 보면 조그만 별개의 섬으로 만세교라는 다리로 연결되어 있었다. 고려조 목은 이색 선생의 부친이 이곡(李穀)인데 자연도와 제물사에 대한 시를 남겼다. ‘제물사에 머물며(宿濟物寺)’라는 시를 보면, 선왕께서 은택을 남기시어 (先王有遺澤) 이 정자에 제물이라 편액하셨네 (濟物牓玆亭) 달 뜨니 천지가 희고 (月出乾坤白) 구름 걷히니 온 섬이 푸르구나 (雲收島嶼靑) 자연도 정자에 편액한 임금은 누구였을까? 혹시 희종(熙宗: 1181~1237)은 아니었을까? 희종은 무신정권의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강화로 유배된 후, 5년간(1211~1215) 이 곳 자연도로 이배되었다. 그 뒤 개경으로 잠시 돌아갔다가 교동으로 또 유배된 후 그 곳에서 생을 마친 불운의 왕이었다. 그가 교동도에 머물던 집 이름도 경원전(慶源殿)이었다.

배터 버스정류장에서 202번 버스를 탄다. 파헤친 벌판 사이로 버스는 달려 10여분 뒤, 전소(前所) 농협에 도착한다. 공항이 생기기 전 영종도에서 가장 큰 고을이었다. 백운산(256m) 앞쪽이어서 전소인데 뒤쪽에는 후소(後所)마을도 있다. 버스정류장에서 진행 방향으로 100여m 가면 4거리, 우측으로 방향을 튼다. 300여m 앞으로 홀로 서 있는 건물에 용궁갈비라는 상호가 붙어 있다. 그곳에 이르면 좌측으로 용궁사를 알리는 표지판이 서 있다. 숲 사이로 비록 포장도로이지만 단아한 절길이 나타난다. 1km 정도 절길을 걷는다. 숲 사이 절이 보이고 이윽고 세월을 가득 담은 느티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인천시 기념물이다. 흔히 1300년 되었다고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아주 많은 나이가 느껴진다. 할아버지 나무가 더 늙고 할머니 나무는 조금 젊어 보인다.

요사채에는 용궁사(龍宮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석파(石坡: 대원군)라 쓰여 있다. 전등본말사지에는 ‘조선 고종 원년 갑자에 대원군이 이 절을 옛터로 이건하고 전명(前名) 구담사(瞿曇寺)를 용궁사라고 개편(改扁)했다’라고 기록하였다. 아들이 왕이 되기 전 구담사에 머물다 간 인연이 있었다 한다. 영종진읍지에는 ‘구담사는 백운산에 있는데 읍에서 서쪽 10리’라고 쓰여 있다. 흔히 1000년의 세월을 간직한 절이라 하는데 분명하지는 않다. 용궁사가 되기 전에는 구담사, 백운사라 불렸다. 전설에는 어부가 바다에서 옥부처님(돌부처님)을 건져 이 절에 모셨다고 한다. 지금은 없다.(혼란기 때 김씨 성 가진 주지가 다른 승려에게 넘겼다고도 한다) 이제 약수암(藥水庵)으로 가기 위해 절 마당을 내려 와 둘레길 쪽으로 향한다. 우측 언덕에 서 있는 비석이 묻는다. ‘覺何用’. 깨달음 무엇에 쓰려 하는고? 이런 뜻인 것 같다. 깨달으려 한 바도 없지만 무척 큰 물음인 것 같다. 금강경(金剛經)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신수봉행(信受奉行): 믿고 받아 받들어 行하오리다.’ 답은 行인 것 같다. 우측 둘레길로 접어들면 정자가 있고 산길 오르는 입구에 연자석(硏子石)이 있다. 31년 전에 만든 것인데 ‘연자석언 다정불심(硏子石言 多情佛心)’이라고 써 놓았다. 산 오르기 전, 부처님 마음처럼 따듯한 마음 가지라는 말인가 보다. 소나무길을 500여m 오르면 좌로 약수암 가는 길이 갈라진다.

절은 그 길 100m 위에 있다. 아직 절다운 불사를 하지 못해 여염집 같다. 빈 터에는 기와편이 눈에 띈다. 옛 구담사 터일 것이다. 고려 때 기와편이라 한다. 이 터에서 바라보는 전망이 거침이 없다. 문득 한 철, 읽을 책 지고 와 머물다 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절 뒤 가파른 등산로를 오르면 능선 한 뼘 평지에 백운산령(白雲山靈)께 제를 올리는 제단(祭壇)을 만난다. 언제나 불확실한 미래 속에 살아가던 섬사람들의 기원이 뭉친 곳이다. 10월에 제를 지낸다고 한다. 나그네도 배낭을 뒤져 과일 하나 떡 한 봉지를 차려 놓고 절을 올린다. 이곳에서 가파르게 100여m 오르면 백운산 주능선이다. 무너진 석축(石築)이 정상까지 이어진다. 아마도 영종진에서 쌓은 성(城)이 아닐까? 포곡식(抱谷式)으로 이어진다. 능선길에는 쉼터도 있고 산불에 대비하여 비치해 놓은 소화기도 있다. 정상에 닿을 즈음 봉화대 설명판이 서 있다. 정상에는 헬리콥터장이 설치되어 있다. 주변 바다와 모든 섬들이 보인다. 그렇기에 이곳에 초소를 세우고 경계근무를 했을 것이다. 영종진읍지에는 그 때의 일을 이렇게 기록했다. “요망막: 백운산 정상에 있다. 구담사 승도 중 한 사람이 서남해를 요망하고 황당선(정체불명의 선박)이 나타나는지 살핀다.(暸望幕: 在白雲山頂上 瞿曇寺僧徒中一名暸望於西南海 察其荒唐船漂泊有無)” 재미있는 것은 월급으로 한 달에 쌀 6말씩 주었다는 점이다. 백성을 공짜로 부려 먹지 않았던 것이다. 요망막이라 하였으나 천막이 아니라 기와로 번듯하게 지은 초소였다. 지금도 깨진 기와편이 발길에 걸린다. 정상 옆으로는 마루를 깐 시원한 정자도 있고 전망대도 설치했다. 영흥도 쪽에서 올라와 무의도, 팔미도 곁을 지나고 영종 남쪽, 작약도 동을 지나 강화 손돌목으로 지나갔던 무역선, 사신선(使臣船), 조운선(漕運船) 길이 손에 잡힐 듯 내려다보인다. 북으로는 과학고등학교과 운서역(雲西驛)이 보인다. 오늘의 하산길은 약 2km의 흙길이다. 운서역으로 하산한다. 서울 못지않게 먹거리도 많다. 돌아오는 길은 공항철도다. 30여 분이면 서울역에 닿는다. 오늘은 홍대역에서 내려 목을 축인다. 문득 30년 젊어진 날이다. - 이한성 동국대 교수

교통편 1호선 종점 인천역 하차 ~ 환승 월미도행 버스(2, 15, 23, 45, 51번 등) ~ 월미선착장(배편) ~ 영종구읍 배터 ~ 버스(202) ~ 전소농협 귀가 : 공항철도 운서역 걷기 코스 인천역 ~ 차이나타운 ~ (버스) ~ 월미도 ~ (배) ~ 영종도 배터 ~ (버스) ~ 전소 ~ 용궁사 ~ 약수암 ~ 산신제터 ~ 백운산 ~ 운서역 (백운산 길은 약 3시간 걷는 길)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마애불과 문화유적지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갑니다.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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