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2호 박현준⁄ 2012.07.08 13:28:45
현대그룹은 1960년대부터 본격화된 국토개조사업과 중화학공업 정책, 중동건설 특수 등 외부환경의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면서 가장 활발한 다각화작업을 전개해 최대 기업집단으로 부상했다. 1970년대 현대그룹의 다각화 중심축은 건설, 자동차, 조선, 기계, 시멘트 등이었다. 이 산업들은 원래 덩어리가 큰 데다 전후방 연관효과를 수반한 중후장대형이었다. 삼성이 무역, 식품, 섬유, 전자, 보험, 유통 등의 수평적 다각화를 통해 다핵(多核) 구조의 기업집단을 형성한 반면에 현대는 건설과 기계 중심의 비교적 단조로운 형태의 수직적 다각화로 그룹화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대조적이었다. 정주영, 쌀가게 열어 사업과 인연 맺다 창업자 정주영(鄭周永, 1915~2001)은 1915년에 강원도 통천에서 논밭 4000여 평을 경작하던 중농(中農) 정봉식의 6남2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인근의 송전소학교 졸업 후 부친을 도와 농사짓다가 가난한 농촌생활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18세 때인 1932년에 가출해 인천의 항만 하역장, 철도공사판 등을 전전하다가 서울 인현동 소재의 쌀가게 복흥상회(福興商會) 배달원으로 취직하면서 사업과 인연을 맺었다. 배달원생활 4년 만인 1936년에 신용을 담보로 주인으로부터 가게를 인수받아 경일상회(京一商會)란 쌀가게를 개업했다. 운영은 잘 되었으나 중일전쟁의 여파로 1939년 12월에 ‘쌀 배급제’가 실시되면서 전국의 쌀가게들이 문을 닫아야만 했다. 그도 쌀가게를 정리하고 1940년에 서울 아현동에 있는 ‘아도서비스’란 자동차수리공장을 3500원에 이을학, 김명현 등과 함께 공동으로 인수했다. 그러나 개업 25일 만에 공장이 화재로 전소(全燒)되어 정주영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삼창정미소(대표 吳潤根)로부터 다시 3500원을 차용, 신설동 뒷골목의 조그만 대장간을 빌어 무허가 자동차정비공장을 차리고 수리기간을 최대한 단축해서 소비자의 편리를 도모하는 등 기발한 방법으로 경영해 호황을 누렸다. 수리공장 운영 3년 만에 부채를 전부 청산하고 약간의 부(富)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기업정비령’이 발동되어 1943년에 정주영의 정비공장은 일진공작소에 강제로 합병되었다. 1946년 4월에 중구 초동 106의 적산(敵産) 대지를 불하받아 자동차수리공장인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하고 미군 병기창의 차량엔진 교체 및 중고(中古) 일제차 개조작업에 매진하는 한편, 1947년 5월 25일에 현대토건사(현대건설의 전신) 간판을 더 달았다. 건설업 마진이 자동차수리에 비해 엄청 큰 데다 일찍부터 공사판을 전전했던 경험도 있어 사업이 가능할 것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공업학교 교사 출신 기사 1명과 기능공 10여 명으로 건축업을 시작하였는데 첫 해에 매출액 1530만 원을 기록했다. 포천, 대전, 인천 등지의 미군 막사와 부대시설 신축, 개축공사를 수주해서 올린 것이었다. 현대건설, 미군공사 독식해 성장 1950년 1월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해 자본 3000만 원(75만 원 불입)의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했으나 한국전쟁이 발발, 부산으로 피난하였다. 정주영은 부산에서 주한미군 건설공사에 주목하면서 첫째 아우 정인영(鄭仁永, 1920~ 2006)을 끌어들였다. 일본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영문과를 졸업한 정인영은 해방 직후부터 주한미군 통역으로 활동한 경력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현대건설이 주한미군 건설공사에 착수한 것은 1950년 10월 서울 대학로의 전(前) 서울대학교 법대 및 문리대 건물을 개조, 미8군 전방기지사령부 본부막사를 설치하는 공사를 수주하면서부터였다. 이후부터 전국에 산재한 미군기지 건설공사 수주에 주력, 미군 건설공사는 현대건설이 독점하다시피 하였는데 공사이익은 실행예산의 5~6배정도로 대박이었다. 환차익이 준 이익은 보너스였다.
미군공사는 달러화로 계약되었는데 기성분을 받을 때쯤이면 환율이 계약시점보다 엄청나게 치솟은 탓이었다. 1950년 1800원:1달러였던 것이 1951년에는 2500:1로, 1952년에는 6000:1로 뛰었으니 말이다. 이 무렵부터 미군 공사뿐만 아니라 국내 관공서에서 발주하는 긴급복구공사에도 활발하게 참여했다. 1951년 2월 서울이 재수복되면서 전략물자수송 및 군사작전을 위한 긴급복구 공사와 전재(戰災) 복구공사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발주되었는데 현대건설은 주로 교량복구공사에 참여했다. 한편 정부는 1953년 2월 15일에 화폐가치를 100:1로 절상하고 화폐단위도 ‘원’에서 ‘환’으로 변경했다. 전시인플레를 수습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현대건설은 1955년 1월에 자본금을 1억 환으로 증자하는 등 건설업계의 다크호스로 부상했다. 당시 1000여 개의 건설업체들이 난립했는데 대동건설(大東建設), 조흥토건(朝興土建), 극동건설(極東建設), 대림산업(大林産業), 삼부토건(三扶土建)등이 선두그룹을 형성해 ‘건설 5인조’로 회자되었다. 1957년 현대건설의 수주액은 5억 3900만 환으로 도급순위 9위였다. 그러나 1957년 7월부터 실시된 미군의 핵무장화 등 주한미군 증강정책에 따른 반영구적인 각종 군사시설 확충으로 건설업은 또다시 활기를 띄어, 현대건설의 미군 수주액은 1957년의 171만 달러에서 1959년에는 281만 달러 등으로 급성장했다. 이후부터 현대건설은 국내 건설업계의 선두주자로 서서히 부상하였는데 일반에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1957년 9월 한강 인도교 건설공사를 수주하면서부터였다. 국내 최대의 정부공사였던 인도교 복구공사는 굴지의 건설업자들이 장, 차관 등 고위관료들까지 동원하여 치열한 로비전을 전개하였는데 현대는 응찰결과 2순위였다. “1위 가격을 써낸 흥화공작소의 가격을 본 내무부장관이 ‘흥화공작소는 입찰의사가 없는 것 같다’면서 2위인 현대로 낙찰했다. 이 공사에서 40%의 이익을 거두었고 ‘건설 5인조’에 들어갈 수 있었다”(‘현대건설 35년사Ⅰ’) 여타 건설업체보다 일찍 주한미군공사에 참여했던 것이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건설 다각화…신화의 탄생 서곡 현대건설이 다각화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 7월 현대상운을 설립하면서부터였다. 정부는 부산진역 부근에 외자(外資) 창고를 신축하고 창고 보관 업무를 현대건설이 대행케 했는데 조건은 정부가 현대에 월 200만 환의 보관료를 준다는 조건이었다. 부산 중앙동 4가 15-3 제2 부두에 연건평 2167평의 외자 창고를 건설하고 매월 받는 보관료 200만 환은 현대건설의 운용자금으로 전용하였다. 현대건설은 휴전 후 경북 고령교 복구공사에서 치명적인 적자를 입었으나 현대상운의 보관료 수입 덕에 기사회생했다. 1958년 8월에는 자본 3000만 환의 금강스레트를 설립하였다. 서울 양평동에 있던 귀속재산으로 다른 사람이 운영하다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현대건설이 인수한 것이었다. 금강은 국내 최초로 지붕재인 석면스레트를 제조하여 연평균 80%이상씩 신장, 1967년에는 국내 스레트 시장점유율 30%에 달했다. 현대건설은 설립 10여년 만에 대형 건설업체로 부상했다. 한국전쟁이 가져다준 선물이었다. 당시 건설수주가 관급공사 위주였던 점을 감안할 때 자유당 정권과의 커넥션은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한국 자본주의 역사상 전무후무한 ‘현다이(Hyundai)’ 신화가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현대의 위성그룹 ① - 한라그룹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97년 “부채비율 최고” 위기 현대그룹 창업자 정주영의 형제들은 총 6명으로 장남 정주영 밑으로 둘째 인영, 셋째 순영, 넷째 세영, 다섯째 신영, 여섯째 상영 순인데 넷째 신영은 1962년 독일 유학 중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정주영의 사업에 가장 먼저 참여한 자는 정인영이다. 정주영보다 5살 아래인 인영은 일본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에 유학한 후 귀국하여 일시 동아일보 기자생활을 하다가 한국전쟁(195053) 중 주한미군 공병부대에 통역으로 취업하여 미군들과 교분을 쌓았다. 이와 같은 인연으로 현대건설은 전후 복구 과정에서 미군발주 공사를 거의 독식하다시피 하여 재벌화를 도모했던 것이다. 정인영이 현대그룹으로부터 독립하기 시작한 것은 1962년 9월 조향품, 제동품, 완충품, 전장품, 공조품 등 각종 자동차 핵심제품을 생산하는 (주)현대양행을 설립하면서부터였다. 이후 발전설비 생산을 추가, 세계은행(IBRD) 차관 8000만 달러와 국민투자기금 등을 투입해 1976년에 창원기계공업단지 내 160만평 대지 위에 단일공장으로는 세계 최대이자 최신의 공장건설에 착수했다. 이로써 국내 발전설비 업체는 기존의 현대중공업과 삼성, 대우중공업과 함께 4원화되었다. 그러나 자기자본이 취약한 데다 발전소 수주물량마저 부진해 창원공장은 자금난으로 건설 중단 위기에 봉착했다가 1980년 전두환 정부 출범과 함께 단행한 중화학투자조정으로 발전설비부문이 한국중공업에 귀속되고 말았다. 정인영은 애지중지 양육해 온 현대양행을 완전 포기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정산과정에서 60억 원을 한국중공업에 지급해야 하는 이중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이후 정인영은 현대양행의 사업부로 존속하던 자동차부품 제조 사업에 주력하여 만도기계를 설립했다. 1970~80년대 자동차산업의 붐을 타고 현대자동차 등에 대한 납품을 통해 국내 최대의 자동차 부품 업체로 성장했다. 만도기계의 성장에 힘입어 1976년 12월에는 인천 항동에서 한라중공업을 설립했다. 선박, 철구조물, 집진설비 제작 등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1977년에 정식으로 현대그룹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이후 그는 1978년 1월에 한라시멘트를 설립하고 강원도 명주군 옥계면 산계리에서 시멘트생산에 착수하였다. 1980년 7월에는 한라건설을 설립하여 건설업에 진출하였고 1986년 3월에는 자동차히터, 에어컨 등을 생산하는 한라공조를 설립했으며 1988년 9월에는 한라창업투자를 설립하여 금융업에도 진출하였다. 1996년 당시 한라그룹은 모기업인 만도기계를 비롯하여 한라중공업, 한라시멘트, 한라건설, 한라공조, 한라자원, 한라해운, 한라캠코, 한라마이스터, 한라콘크리트, 한라일렉트로닉스, 한라펄프, 한라정보시스템, 한라산업기술, 마르코폴로호텔, 한라창업투자 등 총 16개 계열사가 있으며, 5조2000억 원의 매출을 기록하였다. 1997년 당시 한라그룹은 자산총액 6조6400억 원으로 재벌순위 12위에 랭크되었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를 맞아 1997년 12월 6일에 부도 처리되면서 한라그룹은 붕괴됐다. 원인은 무리한 사업 확장 때문이었다. 한라그룹은 ‘중공업 왕국’의 건설을 위해 1996년에 전남 영암에 150만 톤 규모의 대규모 조선소(삼호조선)를 건설하였다. 현대, 삼성, 대우 등 국내 굴지의 대규모 조선소들이 공급과잉으로 ‘제 살 깎기 경쟁’을 진행 중이고, 동남아시아의 경기침체로 중장비나 플랜트 수출이 둔화하는 등 어려운 상황에서 한라중공업이 조선소를 건설하였던 것이다. 삼호조선소의 완공과 함께 한라중공업은 인건비 상승, 저가(低價) 수주, 금융비용 급증 등으로 1996년에는 485억 원의 적자를 기록하였다. 그 결과 금융부채는 1996년 1조8000억 원에서 불과 1년만인 1997년에는 2조5000억 원으로 급증하였다. 한라그룹은 악화된 자금사정에도 1997년에 전남 대불공단 내에 제지공장을 완공하는 한편, 재생타이어 공장, 정보통신, 금융사업 등 무리할 정도로 신규 사업에 착수했다. 또한 영국 웨일즈에 대규모 중공업공장을 건설하는 것을 비롯해서 독일에는 펄프공장을, 터키에는 신문용지 및 차량부품 공장을, 프랑스에는 천연가스 사업을, 인도네시아에서는 자동차부품 및 펄프 공장을, 이집트 카이로에는 쌍둥이빌딩을, 오만에는 고철재 합작공장을, 캐나다에는 펄프, 제지 사업, 엔지니어링 합작회사의 설립을 준비하는 등 해외 사업에도 주력하였다. 지나칠 정도로 사업 확장에 주력한 결과 1997년 당시 한라그룹의 부채총액은 6조5000억 원에 이르러 30대 재벌들 중 자기자본 대비 부채비율이 가장 높았었다. - 이한구 수원대학교 경제금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