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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쿠데타 세력에 쫓겨 마지막으로 식사해 식사동

호랑이 아니라 개가 지키는 쓸쓸한 공양왕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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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85-286호 박현준⁄ 2012.08.11 17:06:34

고양시 원당동 왕릉골에 가면 고려 34대 공양왕의 능(陵)이 있는데 입구 옆에는 고양시가 세워 놓은 예쁘장한 안내판이 하나 서 있다. 거기에 쓰여 있는 글은 공양왕(恭讓王)에 대한 연민과 궁금증을 일으킨다. 잠시 그 글을 보자. “고려왕가의 운명이 기울어 가던 1392년 어느 날, 고양 견달산 기슭에서 헉헉거리며 쫓기는 한 사나이, 결국 군사들에게 붙잡혀 다시 개성으로 끌려간다. ‘나는 왕이 되기 싫다!’ 수없이 외쳤으나 결국 왕이 되어 비운을 맞이했던 공양왕의 최후 모습이다. 고려말기에 승려 신돈이 집권하고 홍건적, 왜구의 침입 등으로 정국이 소란스러웠다. 신진사대부 이성계 등은 국운이 다 됐다며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고 역성혁명을 일으켜 지배층을 숙청하였다. 이 때 쫓기는 공양왕을 단번에 알아보고 밥을 날라 주던 스님의 암자. 그 절이 유래되어 지금의 식사동(食寺洞)이 되었고, 비운의 고양왕은 원당동 왕릉골 산기슭에 묻혔다.” 오늘의 답사길은 전설처럼 전해오는 이 이야기의 현장을 찾아가고자 한다. 식사동(食寺洞), 어침사(魚沈寺, 御寢寺)터, 현달산(見達山, 견달산), 공양왕릉이다. 지하철 3호선 마두역 중앙버스정류장에서 080, 081 마을버스를 탄다. 버스는 일산시도시를 벗어나 경의선 백마역 앞길을 통과하여 새롭게 아파트촌이 건설된 식사지구를 지난다. 살기도 쾌적하고 교통도 좋아 방송과 연예계에 종사하는 이들이 많이 산다고 한다. 동국대 한방병원과 일산캠퍼스도 이곳에 있다. 일산신도시에서 직선거리로 2~3km, 버스로 약 15분 내외면 버스는 식사동 종점에 도착한다.

버스종점도 3곳이나 있는데 3호선 마두역을 지나는 대호운수(80, 81, 85번), 3호선 원당역에서 오는 097, 099번과 경의선 행신역에서 오는 금명교통(35, 65번), 3호선 화정역에서 오는 화정교통(027, 028, 029번)이 있다. 버스가 남쪽 일산신도시 방향에서 견달산로를 지나 우회전하면 종점이 된다. 우회전하는 코너에는 SK삼일주유소가 있는데 이 길은 사리현로이다. 아파트촌에서 벗어난 지역으로 2차선도로에는 차량도 잦지 않다. 예원본가라는 간장게장집, 남경이라는 중국집이 있고, 몇몇 공장건물들이 있다. 이 지역이 자연부락 견달마을인데 이제는 자연부락의 모습은 없다. 왕 안 되겠다고 그렇게 거부했건만… 북쪽으로 자그마한 산이 자리잡고 있다. 見達山이다. 오랜 동안 견달산(또는 본달산, 번달산, 현달산)이라 불렀는데 이곳 지명위원회에서 ‘현달산’으로 통일하였다. 그러나 옛지명은 남아 거리이름도 ‘견달로’이며 마을이름도 ‘견달마을’로 남아 있다. 見이란 글자는 ‘보다’라는 뜻으로 쓸 때는 ‘견’으로 읽고, ‘나타나다, 드러나다’라는 뜻으로 쓸 때는 그 음이 ‘현’이다. 그래서 見達山을 ‘현달산’으로 읽으면 무엇엔가 ‘달통(達通)함이 나타난 산’이란 뜻이니 느낌이 좋다. 견달산을 북으로 두고 사리현로로 100m쯤 동쪽으로 가면 좌측에 097, 099번 버스종점 금명운수가 있다. 이 차고지 뒤로 논이 있고 그 끝에는 산기슭 아래로 냇물이 흐른다. 이제는 시멘트로 물길을 잡아 시멘트 구거(溝渠:도랑)가 되었다. 그 물길 뒤로는 어수선하게 지어진 농막(農幕)이 자리잡고 있다. 이 농막 뒤, 현달산이 북녘 바람을 막고, 남쪽의 따듯한 햇살을 품에 안겨준 곳에 수백평 되어 보이는 평탄지가 있다. 이곳이 어침사(魚沈寺, 御寢寺) 옛터다(식사동 261번지 일대). 이곳에서 곧바로 절터로 가는 길은 없다. 금명운수 차고지를 나와 사리현로 길 동쪽으로 약 100m 가량 나아가면 유성레이져라는 업체가 있고 이 업체 옆으로 현달산 방향으로 갈 수 있는 흙길이 있다. 다행히 이곳에서 10여년을 살고 계시다는 연만한 부부를 만났다. 절터에 대해 물었건만 이 근처에 절터가 있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라 하신다. 지도와 자료들을 보여드렸더니 몇 년 전까지 농사짓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폐농지가 되었다고 자세히 상황을 설명해 주신다. 시간이 되면 내일 그 땅주인을 만나게 해 줄 터이니 자세히 물으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도랑 건너 그 터에 갈 수 있는 방법도 일러 주신다. 도랑에 놓인 다리를 건너 잠시 시멘트 경계를 지나면 현달산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이다. 좌측으로 몇 개의 무덤이 보이는데 이곳 무덤방향으로 풀을 헤쳐가면 숲이 우거진 아래로 농막이 보이고 그 뒤로 평탄지가 내려다보인다. 이곳에 오는 이들이 달리 없다 보니 길이 없다. 농막에는 개들을 사육하는지 짖는 소리가 요란하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접근하기로 한다. 숲과 풀이 제 자리로 돌아간 늦가을 날에 기와조각과 자기편들을 찾아보리라. 왕이 묵어갔다는 어침사 터도 이곳에 있으니 앞에 고양시가 공양왕릉에 세운 안내판이 말하듯 이 절터에는 공양왕의 애환이 설화로 남아 있다. 고려 34대 마지막 왕 공양왕(恭讓王)은 모진 목숨 버리지 못하고 이 지역으로 도망왔다. 주린 허기(虛飢)를 채우려고 현달산 아래 작은 절에 이른 그 분을 위해, 절의 스님은 비교적 안전한 다락골(약 3km 동쪽, 왕릉골과 교외선 삼릉역 사이에 있는 마을)에 숨게 하고 남몰래 식사를 해 날랐다 한다. 하룻밤 잠은 재워드린 것일까? 절의 이름은 어침사(御寢寺, 魚沈寺)로 기록에 남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어침사는 고령산에 있다(魚沈寺在高嶺山)’고 기록하였다. 고령산을 군 서쪽 15리에 있다(在郡西十五里)고 했고, 견달산을 군 서쪽 10리에 있다(在郡西十里)고 했으니 같은 산 품으로 보았던 것 같다.

이런 전설이 남아 이 지역이름이 식사동(食寺洞: 밥을 지어 드린 절동네)이 되었다. 예전 이름은 밥절골(박적골)이었다 한다. 이곳에 사는 이들은 자신의 동네 이름이 연원한 그 밥절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고 있는 것일까? 개 짖는 소리와 수풀, 모기 무리 속에 고립되어 있는 어침사지를 보면서 마음이 가볍지 않다. 사람들이 산보 길에 가볍게 들릴 수 있는 환경이면 얼마나 좋을까. 다시 오솔길로 나와 현달산 정상으로 향한다. 오솔길에서 주능선으로 오르니 길은 지프차 한 대는 충분히 다닐 수 있는 흙길이다. 얼마 전까지 현달산 일대는 군사시설이 많았기에 이동통로도 잘 마련됐던 것이다. 산을 오르는 길은 잘 다듬어져 있다. 139m 정상에 오르니 일산, 교하, 원당 일대가 막힘없이 보인다. 정상에는 국토측량용 삼각점도 몇 개 있다. 산길 방향을 알리는 리본도 매여 있다. 나지막하지만 현달산은 한북정맥의 중요한 랜드마크인 것이다. 이중환 선생의 택리지(擇里志)에서 산줄기를 보는 대간(大幹)이라는 개념이 확립된 후, 영조 때 여암 신경준 선생은 이 땅의 산줄기를 1대간, 1정간, 9정맥으로 분류하고 그 산줄기의 족보를 정리하였다. 그 기록이 산경표(山經表)인데 현달산은 한북정맥을 구성하는 한 봉우리로 우뚝 자리하고 있다. 한북정맥은 백두대간이 뻗어 내리는 평강군 식개령에서 갈라져 서해를 향해 한강 북쪽을 내닫는 산줄기이다. 이 산줄기가 휴전선을 넘으면 대성산에서 불뚝 솟구치고 김화, 철원, 포천, 의정부 산줄기를 지나 도봉산, 상장능선을 거쳐 고양시 북쪽 산줄기를 이룬다. 그리고 이곳 현달산에서 숨고른 후 고봉산 지나 교하 장명산에서 백두산의 정기를 갈무리한다. 그렇기에 예부터 가뭄이 들면 하늘에 기우제를 올렸던 신성한 산이었다. 1923년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가뭄이 심해 논바닥이 갈라지자 고양군수와 면장들이 6월 28일 12시에 현달산 정상에서 하늘에 기우제를 올렸다고 한다. 예전 기우제를 올려 비가 오면 그 결과를 우(雩)라 기록하고, 비가 오지 않으면 한(旱)이라 기록했는데 이 기우제의 결과가 궁금하다. 우(雩)였으면 좋겠구나. 이제 올랐던 길을 다시 내려온다. 산을 내려와 50m쯤 가면 우측으로 갈라지는 길이 있는데 이 길은 무시하고 가실 것.(길 끝에 조성된 묘역으로 가는 길임)

잘 다듬어진 숲길을 따라 동쪽으로 간다. 잠시 후 숲길이 끝나는 지점 좌측에 광목장(光牧場)을 만나 우향우 한다. 차도 다닐 수 있는 편안한 흙길이다. 이 길 끝은 어침사지로 향할 때 버리고 떠났던 사리현로를 다시 만나는 길이다. 잠시 후 포장길 사리현로를 만나면 좌측 고갯마루로 향한다. 한북정맥길이 이 고갯마루를 지나 현달산으로 오는 것이다. 고갯마루에는 우측으로 120도 꺾여 오르는 작은 포장도로가 있다. 이 길에도 한북정맥 리본이 간간히 붙어 있다. 이 길은 약 500~600m 이어지는데 그 끝은 국가시설의 펜스가 길을 막고 있다. 다행히 이 펜스 좌측으로 많은 이들이 다니면서 자리잡힌 길이 있다. 왕의 성을 갈아버리는 무례한 짓까지 약 20분 나아가면 좌측으로 두 개의 숲길이 나타난다. 좌측으로 급히 꺾이고 비교적 넓으면서 많은 리본이 달려 있는 길은 다시 현달산 방향으로 향하는 등산로이니 취하지 말고 평탄한 오솔길 방향으로 나아가자. 이 길은 높낮이의 변화가 없고 숲이 우거진 최고의 삼림욕길이다. 혼자 가기에는 넉넉하고 둘이 손잡고 가기에는 좀 좁은 듯한 구불구불 숲길이다. 간간히 새들도 지저귄다.

달리 갈림길도 없으니 길 잃을 염려는 없다. 한 시간여 이렇게 걷다보면 우측으로 나무에 산불조심 안내문이 적힌 찢어진 안내막이 매듭이 매여 걸려 있다. 그 앞 우측으로는 새로 조성한 묘역(통정대부 고령신씨)이 있다. 이 묘역 우측길이 공양왕릉으로 내려가는 산책로이다. 공양왕은 부인 순비노씨(順妃盧氏) 곁에 잠들어 계신다. 순비는 이곳 교하(交河) 사람으로 창성군 노진의 따님이다. 부부 사이에는 1남 3녀를 두었는데 남편이 고려의 마지막 왕이 된 이후 힘든 삶을 살다가 명(命)대로 살지를 못하였다. 이야기는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돌아간다. 위화도회군으로 정권을 잡은 이성계, 조민수 일파는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마저 폐위시킨다. 이어 우왕의 아들 창왕을 세웠으나 이 또한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다시 세웠다. 명분은 이성위왕(異姓爲王), 왕(王) 씨가 아닌 다른 성이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공민왕의 여자 반야(般若)가 신돈과 사통하여 낳은 아들이 우왕(禑王)이라는 것이다. 이성계 일파는 우왕, 창왕을 신(辛)씨라 하여 신우(辛禑), 신창(辛昌)이라 하고 두 임금의 실록조차 만들지 않았다. 신하된 자로서 어찌 왕의 아비를 바꾸는 이 같은 일까지 저지를 수 있었단 말인가? 우, 창 두 임금을 폐위시킨 후 사살하니 우왕의 나이 25세, 창왕의 나이 10세였다. 승하한 왕에게 올려져야 할 시호(諡號)도 이 두 임금에게는 없다. 자신들의 정권탈취 정당성을 위하여 이런 일들을 벌린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한 일이 폐가입진(廢假立眞: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이라 하여 선왕(先王)의 종친 중에서 새 왕을 세우는 일이었다. 이렇게 새워진 이가 바로 신종(神宗)의 7세손 34대 공양왕(恭讓王)이다. 폐가입진했으면 잘 모셨어야 하는데 역사가 기록했듯이 그렇지 못하였다. 공양왕도 왕위에 오른 지 2년여 만에 폐위되어 이성계에게 양위되니 왕씨 고려는 막을 내리고 이씨 조선이 나라를 빼앗았다. 삼척에도 왜 또 하나의 공양왕릉이 있을까 그러면 공양왕은 어찌 되었을까? 원주, 간성, 삼척으로 유배당했다가 부인 순비와 함께 살해되었다. 기록은 없으나 세자도 함께 변을 당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다행히 세 따님은 이미 출가하였기에 화를 면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삼척군 근덕면 궁촌리(近德面 宮村里)에는 또 하나의 공양왕릉이 남아 있다.(강원도 기념물 71호)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공양왕릉은 이곳 원당동 왕릉골의 능(高陵)이다. 아마도 살해된 후 일단 삼척에 묻혔다가 어느 때인가 이곳 왕릉골로 옮겨졌을 것이다. 신체 일부가 이곳으로 옮겨졌을 것으로 추측하는 이들도 있는데 근거는 없다. 능역(陵域)에는 작은 봉분 둘, 석인상 두 쌍, 낡은 묘지, 석등, 동물상 등 초라할 정도로 간소한 석물들이 있다. 그런데 눈길을 끄는 것은 동물상이다. 흔히들 석호(石虎)라 부르는데 강아지 모습이다. 능역 아래에는 작은 물구덩이가 있는데 슬픈 전설이 전해진다. 밥절에서 밥을 지어 온 스님이 다락골에 다다랐는데 공양왕 내외가 보이지를 않았다.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물웅덩이 곁에서 삽살개가 끝없이 짖어대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이 다가가자 삽살개도 그 물에 들어가 빠져 죽었다. 물속을 들여다 본 사람들은 큰 슬픔에 빠졌다. 왕 내외분이 나란히 물속에 누워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웅덩이 위쪽에 두 분을 장사지냈다. 그 곳이 지금의 공양왕릉이라는 것이다. 물웅덩이는 지금도 있는데 풀만 무성하다. 능 앞을 지키고 있는 동물상은 아마도 이때 함께 죽은 삽살개일 것이다. 살아서 지켜드리지 못한 주인의 넋이라도 지키려고 600년이 넘는 세월을 그 자리에서 지키고 있다.

능역에서 내려오면 우측 100여m 되는 곳에 세종임금의 6번째 아들 수춘군 이현(壽春君 李玹)의 묘역이 있다. 이 묘역 아래쪽에는 그 어머니 혜빈 양씨(惠嬪 楊氏)의 신단(神壇)도 모셔져 있다. 혜빈양씨는 세종의 후궁으로 한남군, 수춘군, 영풍군 세 왕자를 낳은 현숙한 부인으로 세종의 신임이 두터웠다.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단종 출산 후 하루 만에 세상을 떠나자 세종께서는 어린 손자 단종을 혜빈양씨에게 맡겨 키우도록 하였다. 혜빈양씨는 사랑과 정성으로 단종을 길러 냈다. 그러나 수양대군의 계유정란 후 단종의 측근이었기에 본인도 아들들도 귀양길에 올랐고, 사육신이 처형된데 이어 세조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 역적으로 몰려 죽은 이의 무덤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일찍이 병사하여 이곳에 묻힌 둘째 아들 수춘군의 후손들이 시신 없는 할머니의 신단을 이곳에 모셨다. 수춘군의 부인 군부인 영일정씨는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처럼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다. 숭인동 정업원에서 정순왕후를 지키며 일생을 보냈다 한다. 풍수하는 이들이 명당(明堂)이라는 이곳에 어찌 이리 가슴 아프게 하는 이들이 머물고 계신 것일까? 길을 따라 400~500m 내려가면 길 옆으로 효녕대군의 손자 율원군 이종(栗元君 李倧)의 사당이 있고 앞쪽 산에는 그 분의 묘역이 바라다 보인다. 이제 내려 왔던 산길로 다시 오른다. 고즈넉한 산길 500여m 지나면 도로 공사로 길이 끊긴 절개지가 나온다. 옆길로 내려와 다시 앞 산길로 접어든다. 다시 500여m 나아가면 산길은 끝난다. 도로로 내려서기 전 2간(間) 기와집과 기와집에 매달려 있는 작은 정문(旌門)을 만난다. 그곳에 ‘孝子學生張宣中之閭’라 쓰여 있다. 철종, 고종 연간 효성이 지극했던 장학선에게 고종이 광무8년(1904년) 내린 정려(旌閭)이다. 효(孝)란 가치가 퇴색한 시대에 보이지 않는 산기슭에 남아 아무도 찾지 않는 퇴락한 효자의 정려에 스산한 바람이 지나간다. 세월의 바람이다. - 이한성 동국대 교수

교통편 3호선 마두역, 경의선 백마역 마을버스 080, 081번 종점 하차 3호선 화정역 마을버스 027, 028, 029번 종점 하차 3호선 원당역 마을버스 097, 098번 종점 하차 경의선 행신역 마을버스 035, 065번 종점 하차 걷기 코스 식사동 버스종점 ~ 유성레이져 골목 ~ 어침사터 ~ 현달산 ~ 사리현로 고개 ~ 군부대 펜스 좌측길 ~ 갈림길(좌측 숲길) ~ 공양왕릉 갈림길 ~ 공양왕릉 ~ 수춘군 묘역 ~ 율원군 사당/묘역 ~ 다시 산길(또는 도로 걸어도 됨) ~ 장선중 정려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마애불과 문화유적지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갑니다.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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