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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구의 한국 재벌사]LG그룹 편 1화

전쟁통 물자부족과 박정희 대통령의 라디오 보내기운동으로 재벌급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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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87호 박현준⁄ 2012.08.13 13:59:58

LG그룹 창업자 구인회(具仁會)는 1907년에 경남 진양군 지수면 승내리 362-2에서 300~400석 지기의 중농인 구재서(具再書)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구인회는 고향에서 서당교육을 받은 후 서울 중앙고보에 진학했으나 1926년에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에서 선배, 동료들과 함께 협동조합을 설립하면서 사업과 인연을 맺는다. 어린 시절 일본인이 눈깔사탕 장사로 시작해서 점차 사업품목을 확대해 동네상권을 독점하는 것을 보고 사업을 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협동조합 경영을 통해 경험을 쌓은 구인회는 부친에게서 2000원(圓)을 받아 1931년에 진주에서 아우 철회(哲會)와 함께 구인회상점(具仁會商店)이란 포목상을 개시하였다. 철회도 1800원을 투자하여 공동경영했는데 운수사업도 병행하였다. 구인회는 1937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물자부족을 예견, 광목 2만 필을 사재기하여 8만 원이란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 1940년 6월에 구인회상점을 주식회사 체제로 전환하고 어물 및 청과물도 취급했다. 1941년에는 둘째 아우인 정회(貞會)가 경영에 참여하면서 3형제 공동경영 시대를 맞이한다. 화장품 사업 시작하며 ‘럭키크림’ 출시 1945년 해방과 함께 구인회는 구인회상회를 폐업하고 그해 11월에 부산 남포동 부근에 조선흥업사를 설립하였다. 당시 부산에는 목탄(木炭)을 연료로 하는 일본식 주택들이 많았는데 목탄은 일본 대마도에서 많이 생산되었기 때문에 이를 수입하여 판매할 목적으로 이 회사를 설립하였던 것이다. 경남도청으로부터 화물차 30대를 사들여 운수업과 포목상도 겸하였으나 사업은 신통치 못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정회가 화장품메이커인 부산 흥아화학공업사의 김준환을 만났다. 당시 이 회사의 생산직 사원이었던 김준환은 정회에게 화장품 사업이 성업 중이란 정보를 제공했다. 구인회 형제는 흥아화학에서 생산한 여성용 화장품인 아마쓰 구리무(크림) 판매사업에 착수했다. 이 무렵에 구인회의 처가 친척인 허준구(許準九)와 셋째 아우 태회(泰會)도 경영에 참여한다. 허준구는 구인회의 장인과 6촌간인 허만정의 3째 아들이자 철회의 사위로 당시 24세였다. 일본 도쿄의 관동(關東)중학을 졸업하고 1943년에 귀국하여 고향에서 면서기를 역임했다.

구인회 등은 흥아화학에서 물건을 받아 서울에서 판매하였다. 흥아화학이 부산 지역 판권을 장악한 탓이었다. 아마쓰 구리무에 대한 서울 소비자들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어서 호황을 누렸다. 화장품의 판매마진은 30%정도였는데 판매가 호조를 보이자 구인회는 화장품을 직접 제조하기로 결심하였다. 화장품판매를 통해 확보한 자금과 고향의 전답을 처분하여 3000만 환을 마련, 1947년 1월 5일에 락희화학공업사를 설립하였다. 사장은 구인회가, 부사장은 철회가 맡았으며 허준구는 판매를 그리고 흥아화학의 화장품제조 기술자인 김준환을 스카우트하여 생산을 전담케 했다. 공장은 서대신동에 있는 구인회의 집에 마련했다. 감화조를 비롯해 감화한 원료를 처리하는 방치선반과 압착여과기, 향료혼합조 등을 설치하였는데 생산초기 직공은 20여명 내외였다. 락희화학에서 생산한 제품에 ‘럭키(lucky)’라는 상표를 붙여 출시했는데 이 또한 잘 팔렸다. 당시 전국의 화장품업체는 20여개 내외로 수요에 비해 공급이 턱없이 부족했다. 구인회는 타 메이커들과의 경쟁을 고려하여 품질향상에 주력했다. 투명크림을 개발하는 한편 쉽게 파손되지 않는 뚜껑 개발에도 열중했다. 화장품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구인회는 1949년에 장남 자경(慈暻)을 경영에 참여시켰다. 그러나 한국전쟁기간 동안에 일제 화장품이 대거 밀수되어 국내 화장품메이커들이 고전했다. 일제 화장품은 품질이 뛰어난 데다 당시 국내 메이커들은 선호도가 떨어지는 중국산 향료를 수입하여 화장품을 제조한 때문이었다. 락희화학은 중국산 향료보다 50%정도 저렴한 일제 향료를 수입해서 제조한 결과 ‘럭키’크림이 전국을 석권하기 시작하였다. 락희화학, 플라스틱성형사업 개시 이 무렵 락희화학은 새로 플라스틱성형사업을 시작했는데 동기는 잘 파손되지 않은 화장품 뚜껑 개발 때문이었다. 당시 국산 화장품의 뚜껑 소재가 유리여서 쉽게 파손되곤 했는데 대용품으로 플라스틱 뚜껑을 제조하기로 한 것이다. 제품개발은 주로 태회가 담당했다. 화장품판매로 벌어들인 3억 환으로 1952년 9월에 동양전기화학공업사를 설립하는 한편 범일동 884번지에 건평 41평의 합성수지공장을 마련했다. 사출기 등을 설치하고 플라스틱제 머리빗과 비누곽, 크림뚜껑 등을 생산했는데 소비자반응이 좋아 ‘럭키’ 플라스틱제품은 원가의 20~30배에 팔려나갔다.

플라스틱 세면기와 식기생산 등으로 품종을 확대하는 와중에서 사업의 중심을 화장품에서 플라스틱성형으로 전환하기로 결심, 1953년에 화장품사업을 청산하고 동양전기를 락희화학에 흡수했다. 자동 식모기를 도입하여 칫솔도 생산했는데 소비자들의 반응이 좋아 무겁고 불편한 재래품들은 점차 시장에서 구축되어 갔다. 1953년 11월에는 국내외 판매 및 원료, 기계설비 등의 수입을 목적으로 락희산업주식회사를 설립했는데 1956년에 반도상사로 개명하면서 무역업을 강화하였다. 또한 락희화학은 1954년 5월에 미국 Abbe Engineering Co.로부터 치약배합기 등을 도입, 부산 연지동에 전용공장을 마련하고 치약생산도 개시했다. 당시 국내에는 미군부대를 통해 유출된 ‘콜게이트’ 치약과 국산으로는 동아특수화학에서 생산한 ‘다까키’ 치약이 있었으나 ‘콜게이트’ 치약은 값이 비싸 부유층에서만 사용되었을 뿐 절대다수 국민들은 소금으로 양치질하는 상황이었다. ‘럭키치약’ 또한 출하직후부터 수요가 급증했는데 이는 1955년부터 치약을 군납(軍納)한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 결과 1955년도 ‘대한경제연감’에는 자본금 기준 국내 10대기업 중 락희화학이 4위에 랭크될 정도로 급성장했다. 이후부터 락희화학은 플라스틱성형사업에 특화하여 1956년에는 PVC파이프를 생산하였고 1957년부터는 비닐장판, 폴리에텔렌 필름을 생산하는 등 국내 최대의 화학제품메이커로 부상하였다. 당시 락희화학이 생산하던 제품종류는 <표>와 같다. 락희화학은 1950년대 후반에 재벌로 도약하기 위한 제반준비를 완료하였다. 설립 10여년 만에 기틀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첫째, 해방에서 한국전쟁에 이르는 시기에 물자부족이 극심했다는 점과 둘째, 대부분의 기업들이 서울, 인천, 안양 등 수도권에 소재했던 때문에 전쟁의 참화를 입었으나 락희의 생산기반은 부산에 위치한 탓에 피해를 전혀 입지 않았다는 점과 셋째, 해외원조로 제공된 플라스틱 소재를 원료로 하여 값싸고 가볍고 내구성이 뛰어난 생활필수품을 생산한 때문이었다. 기업집단의 시작…금성사 설립 락희화학이 국내 정상급의 재벌로 도약할 수 있었던 직접적 계기는 1958년 10월에 부산시 부전동 518에 금성사를 설립한 것인데 배경은 다음과 같다. 1956년에 락희화학 서울사무소 윤욱현(尹旭鉉) 기획부장은 “평소 전축을 좋아해 전자기기에 대한 관심이 컷을 뿐 아니라 전자기기 관련 간행물들을 자주 읽었기 때문에 라디오를 생산해 보도록 구 사장에게 건의하였다. 이 무렵 일본 통산성의 백서가 발표되었다. 그런데 그 백서에는 석유화학 또는 전자공업이 앞으로 발전할 수 있는 분야라는 평가가 나왔다. 이에 구 사장은 아직 국산 라디오가 없는 점에 주목하면서 윤 부장에게 사업성을 검토해보라고 지시했다.”(‘럭키40년사’, P. 1789)

윤욱현을 중심으로 1958년 4월에 라디오, 플라스틱 잡화, 전기기기 부품, 유라이트 등을 생산하는 공장건설계획을 확정하고 기계 및 시설도입비로 8만5195달러를 책정했다. 9월에는 서독의 라디오기술자인 헨케(Henke)를 2년 계약으로 고용하고 12월에는 기술요원 확보를 위해 공고 및 공대 졸업자들을 모집하여 생산체제를 갖추었다. 1959년에는 차관 및 은행융자 등 때문에 주식회사로 전환하고 생산에 착수한 결과 그해 11월에는 국내 최초의 국산라디오인 A-501을 생산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국산라디오에 대한 홍보부족과 외제라디오 때문에 금성사는 출발부터 존폐의 기로에 서야만 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도약 계기가 찾아왔다.

금성사 고위 관계자의 회고 “문 닫는 시기를 내달로 정하느냐 그 훗달로 정하느냐로 고민하던 때에 ‘농촌에 라디오 보내기운동’이 벌어졌다. 7월 14일 박정희 대통령부부가 트랜지스터 라디오 3대를 공보부에 기증했다는 기사가 있었다. 물론 금성사의 라디오였다. 이를 시발로 라디오 보내기운동 성금들이 속속 모아지고 라디오 주문은 쏟아졌다. 주문 받은 것을 소화하느라 밤을 낮 삼아 일하기가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이종재, 재벌이력서, P.204) 1961년에 박정희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 정부는 ‘외제품 배격운동’을 추진했는데 이를 홍보할 매체로 라디오를 정하고 ‘농촌에 라디오 보내기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금성사는 1962년 한 해 동안에 13만7000대를 팔아 4억3100만 원의 매출을 올렸다. 이후 전화기, 적산전력계 등의 생산은 물론 1964년 말부터는 동남아, 중남미 등에 수출하는 등 급신장했다. 한편 이 무렵부터 금성사는 TV생산에 착수했는데 배경은 1961년 12월 31일자로 국영 KBS-TV가 국내 최초로 텔레비전 방송을 개시한 것이다. 1964년 8월에는 TBC-TV가 개국되었다. 정부는 1966년 12월에 전자제품 국산화를 통해 전자공업을 장차 수출주력산업으로 육성한다는 내용의 전자공업 진흥계획을 발표했다. 금성사는 1963년부터 TV생산시설을 마련하고 1965년 9월에는 일본 히다찌(日立) 제작소와 기술도입계약을 체결, 1966년 8월에 국내 최초로 19인치 흑백TV수상기(모델명 VD-191)를 생산했는데 없어서 못 팔 정도로 빅히트했다. 이때부터 ‘전자제품은 금성’이란 말이 소비자들 사이에 회자되어 금성사는 락희화학과 함께 쌍두마차로 자리매김하면서 LG그룹은 재계의 전면으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 이한구 수원대학교 경제금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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