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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 ⑮]‘노을이 춤추는’ 무의도 3연봉 종주길

한 나절에 기차·배 타고 산길·바닷길까지 걷는 복받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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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88호 박현준⁄ 2012.08.20 11:31:52

문득 바다가 보고 싶은 날, 드넓은 수평선에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을 배경으로 떨어지는 해를 보고 싶은 날에는 무의도(舞衣島)로 가 보자. 공항철도가 뚫리고 난 후 영종도를 중심으로 가까이 갈 수 있는 섬들이 여럿 다가왔다. 용유도, 무의도, 장봉도, 신도, 시도, 모도 등이다. 하룻길에 기차 타고, 배 타고 산길 바닷길을 걸을 수 있으니 참으로 복받은 길이다. 10년 전만 해도 인천 연안부두에서 배를 타고 가야 하는 섬이었기에 감히 하룻길에 다녀올 생각은 하지도 못했던 곳이다. 공항철도가 서울역에서 직행은 40여 분, 일반은 50여 분만에 인천공항으로 데려다 준다. 3층 7번 게이트에 가면 매시 20분(222번)과 50분(2-1번)에 무의도행 배를 탈 수 있는 잠진도 선착장까지 10여 분만에 데려다 준다. 고맙기도 하지. 무의도를 왕복하는 무룡호는 사람과 차를 태우고 쉴 틈도 없이 무의도와 잠진선착장 사이를 시계추처럼 왕복하니 서두름에 이골 난 도시인들도 기다림에 지칠 염려는 없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한강 폭보다 조금 넓은 거리라서 사진 한 장 모양내고 찍으면 벌써 하선하라는 안내방송이 나온다는 점이다. 방파제로 내려서면 큰무리 선착장의 바다 냄새가 비릿하다. 서울에서 한 시간 남짓 만에 섬에 도착했다는 일탈(逸脫)감이 마음을 가볍게 한다. 또 하나 고마운 것이 있다. 섬 끝 샘꾸미(대명선착장)로 떠나는 버스가 배에 맞추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버스를 타면 10여 분 뒤에 남해 외딴 섬 풍경 같은 섬의 남쪽 끝, 샘(생)꾸미(구미)에 도착한다. 이곳에는 얼마 전까지 인천으로 열렸던 뱃길이 있었다. 이제는 없다. 영종대교나 인천대교를 통해 차나 기차로 쉽게 올 수 있으니 승객이 없는 것이다. 인천공항으로 와서 산길을 넘어 배를 타고 인천으로 나갈 수 있는 낭만이 이제는 없어져 영 서운하다. 떼무리, 샘꾸미 등 토속 지명 그득 무의도는 참으로 토속적 지명이 많다. 큰무리, 떼(뙤)무리, 샘꾸미, 하나개, 개안, 느지지뿌리, 못두냥, 아구리, 맛뿌리, 당구지, 웬수부리, 옷구낙구지, 민드래미, 매시랭이, 잔드래기…. 갈 때마다 그곳 분들께 묻곤 하는데 시원한 대답이 없다. 모처럼 듣는 지명 유래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샘꾸미도 ‘샘이 잘 나서 샘꾸미’라는 설명이다. 필자의 상상력으로는, 샘(생)은 추측할 길이 없고, 구미(꾸미)는 아마도 ‘구미’라는 지명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북한강 오지마을 비수구미(飛水口尾), 낙동강변 구미(龜尾)시, 삼척 구미(九美)리에서 보듯 물이 굽어 들어간 지역에서 보이는 이름이다. 한자(漢字)는 편의상 빌려 쓴 것이다. 이곳도 일찍이 포구가 자리 잡았듯이 바닷물을 안고 있는 샘물 잘 나는 지역 아니었을까. 선착장에서 바라보면 아름다운 다리가 보인다. 무의도와 소무의도를 잇는 400여m의 다리다. 전에는 배로 건너다녔는데 작년 봄(2011년) 개통되었다. 해안선 길이라야 모두 이어도 2.5km밖에 안 되는 작은 섬이다.

남쪽으로는 제법 우뚝 솟은 산(안산)이 있는데 74m이고, 북으로는 작은 언덕만한 당산(堂山: 34m)이 자리하고 있어 섬사람들의 믿음이 뭉친 신성한 장소이다. 이제는 당산에 남은 흔적은 없다. 다만 이 섬에 300여 년 전 처음으로 삶의 터전을 닦은 이(박동기)의 묘소가 당산 기슭에 있는데 시조묘라 한다. 다리를 건너 좌측 길로 나아간다. 작은 선착장이 있는데 떼무리선착장이다. 무의도 본섬에는 큰무리가 있고 소무의도에는 떼무리가 있다. 믿을 만한 설명은 ‘무리’는 ‘물’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물’은 단순히 水(water)가 아니라 조석간만(潮汐干滿)을 말하는 것으로 바다낚시를 갈 때 쓰는 ‘물때’에서의 물과 같은 뜻이다. 아마도 큰무리는 조석간만의 차가 커서 큰무리가 되고 떼(뙤)무리는 조수가 또아리 틀듯이 감돌아 떼(뙤)무리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지명을 연구하는 분들이 연구해 주셨으면 좋겠다. 말이 나온 김에 무의도(舞衣島)라는 섬 이름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무의도가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세종실록지리지 13년(1431년)조 기록에 의하면, 말을 기를만한 곳을 찾으라는 명에 대해 무의도(無衣島)도 방목할 만한 곳(可以放牧處)이라 기록하였다. 그러니 처음 등장하는 무의도의 한자는 無衣島였다. 동국여지승람에도 무의도가 기록되어 있는데 ‘무의도는 인천부 서쪽 57리에 있다. 둘레는 28리이며 목장이 있다(無衣島: 在府西五十七里 周二十八里 有牧場)’라 하였다. 여기에도 無衣島였다. 대동여지도에는 무의도가 그려져 있을까? 그려져 있는데 無衣島였다. 요새말로 하면 한결같이 누드(Nude) 섬이라 하니 참 무정도 하구나. 1789년 호구총수(戶口總數)에는 한술 더 떠 無依島라 하니 옷도 없는데 ‘기댈 곳조차 없는 섬’이 되고 말았다. 다행히 1842년(헌종 8년)에 기록한 영종진읍지에 ‘舞衣島’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등장한다. 영종진지도에도 무의도는 ‘舞衣島’로 기록되니 이후 무의도는 ‘舞衣島’로 자리를 잡았다. 무의도의 ‘무’는 ‘물 때’ 의미 아닐까 여기에서 힘을 얻은 것일까? 요즈음 무의도를 설명하는 자료에는 장수가 갑옷 입고 춤추는 모습이라서 舞衣島라 한다는 내용이다. 더 나아가서는 5공주 중 춤추는 셋째 공주 설화도 생겨났다. 여름이면 춤 대회와 셋째공주 선발대회도 개최되고 있으니 무의도는 춤과 공주의 섬으로 진화 중이다. 그러면 무의도라는 이름의 어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지명을 연구하는 분들의 설명은 큰무리, 뙤무리처럼 무리(물)에서 나온 말이라 한다. 지금도 무의도에 가보면 간만(干滿)의 물때가 확실하다. 물(때) 확실한 섬 ‘물의 섬’이 곧 ‘무의도’이다. 떼무리 선착장은 한산하다. 이제는 어선도 객선도 없다. 과거 이곳은 크나큰 어항이었다 한다. 40여 척의 안강망(鮟鱇網: 조수가 흘러오는 방향으로 그물을 열어 잡는 방법) 어선이 멀리는 연평도까지 출어하여 어업을 하던 곳이었다. 조기도 잡고 민어(民魚)도 잡았던 모양이다. 우리나라 서해의 도서 지방이나 바닷가 어촌에 가면 당집에는 용신(龍神)과 함께 임경업(林慶業: 인조 때의 명장. 역모로 몰려 죽임을 당함)을 어업의 신(漁業의 神)으로 모시는데 떼무리도 임경업 장군을 신으로 모셨다. 이제는 당집도 무너졌다. 어업이 없으니 누가 돌보랴. 이곳 떼무리는 가슴 아픈 이야기의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일제 시대 어업이 성한 곳이다 보니 이를 배경으로 쓰인 희곡이 있었다. 193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10년간 희곡만을 발표한 극작가 함세덕이란 분이 있었다. 그가 1941년 인문평론에 발표한 희곡이 ‘무의도 기행’이었다. 가난한 어부의 아들 이야기인데, 두 형을 바다에 잃고 누이마저 배 수리 비용 마련을 위해 중국 유곽으로 팔려간 뒤 주인공이 끝내 배를 안 타려다가 집안의 생계를 위해 배를 타게 되고 끝내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내용이다. 무의도에서 한 번 무대에 올려지면 좋을 것이다.

떼무리 선착장 뒤로는 나무 데크로 잘 연결해 놓은 소무의도 누리길이 있다. 깎아지른 바닷가 절벽도 있고 주변 여러 섬을 둘러 볼 수 있는 전망대도 있다. 송도 신도시가 바다 너머로 보인다. 아래로는 자갈이 깔려 있는 몽여해변길이 내려다보인다. 송도와 무의도는 어떤 인연이라도 있는 것일까? 필자는 어쩌다 인천 송도에 가게 되면 동행들에게 퀴즈를 내곤 한다. 퀴즈는 ‘송도(松島)는 섬일까, 아닐까?’이다. 너무도 당연한 일을 묻는 것이지만 답은 ‘아니다’이다. 옛 지도 어디에도 송도라는 섬은 없다. 그곳은 문학면 옥련리였다. 1930년대 중반, 인천 부윤으로 나가이(永井)라는 사람이 부임하였다. 그는 수인선 개통에 맞추어 경인지방 일인(日人)들의 향수를 달랠만한 임해관광단지를 만들고자 하였다. ‘송도’는 일본인들이 만든, 일본인 위한 지명 일본 바닷가 해수욕장 같은 입지가 어디 없을까? 찾아낸 곳이 바로 지금의 송도 자리, 옥련리였다. 문제는 모래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때 수난을 당한 것이 무의도 모래였다. 무의도 모래를 퍼다가 송도해안을 덮었다. 하나개해수욕장 모래였는지, 다른 곳의 모래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어도 자갈만 깔린 몽여해변을 보면서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만든 해수욕장에 이름도 달았다. 그들 정서에 맞게 송도(松島)라고. 일본인들은 울릉도도 송도(松島)라 했고, 독도도 저네들 정서대로 죽도(竹島)라 했으니 남의 땅 가지고 잘도 논 것이다. 필자는 지금도 송도라는 이름이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세계를 향해 나래 펴야 하는 그 땅에. 누리길을 돌아 남쪽 해변 길로 간다. 바닷물에 깎인 절벽이 신기하다. 명사(漢字가 없어 정확한 뜻을 모름)의 해변에 가니 작은 모래사장이 있고 남녀상을 앉혀 놓았다. 박정희 대통령 일가친지들이 조용히 쉬러 온 곳이었다는 설명이 쓰여 있다. 바닷물에 깎인 바위 중에는 장군바위도 있다. 무의도에 가는 길에는 되도록 소무의도 길을 한 번 걷기를 권한다. 다시 다리를 건너 무의도의 샘꾸미로 돌아온다. 무의도에는 세 개의 산봉우리가 있다. 남쪽으로부터 호룡곡산(虎龍谷山), 국사봉(國寺峰), 당산(堂山)이다. 샘꾸미삼거리 위쪽으로는 호룡곡산으로 오르는 산행길이 있다. 비오는 날이면 이 산길에 두 다리가 붉은 제법 큰 게가 나타난다. 몇 마리 잡으면 한 끼 반찬거리는 될 것 같은데 잡아 본 일은 없다. 이름도 모르고 보호종인지 아닌지도 모르지만 호룡곡산에 이 게가 가득해지면 장차 큰 관광자원이 될 것 같다. 호룡곡산 정상에서 보는 서해 노을 절경 호룡곡산을 향해서 쉬엄쉬엄 오른다. 대략 2km가 되는 길이다. 오르는 길가에는 참나무 종류가 많다. 신갈나무, 굴참나무, 졸참나무, 갈참나무 표지판이 붙어 있다. 문외한은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이제는 이 섬 산길도 지나는 이가 많아 흙길이 많이 패여 있다. 비라도 심하게 오면 패인 곳을 따라 물길이 생겨 더욱 패여 나갈 것이니 마음이 편치 않다. 땀 한 번 흘리는 사이 호룡곡산 정상에 도착한다. 높이 246m로 무의도 최고봉이다. 육지의 산이라면 낮은 언덕 급인데 섬 산이라서 해발로 오르게 되니 246m를 제대로 오르게 된다. 정상에는 국토부에서 세운 삼각점이 있는데 위치가 동경 126도 25분, 북위 37도 22분이라고 쓰여 있다. 앞으로는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전망대를 만들기 전 자연암반의 운치가 사라진 것이 아쉽다. 세모(歲暮)가 되면 이 봉우리에 해넘이 하러 가끔 다녀가곤 했다. 서울에서 가까운 산봉우리 중 이곳만큼 해넘이 하기에 적지(適地)도 없을 것이다. 걸리는 것 하나 없이 펼쳐진 바다로 떨어지는 해를 보면서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것도 해볼 만한 일이다. 이제 국사봉을 향하여 북쪽 길을 내려간다. 잠시 후 좌측으로 하나개해수욕장 1.3km를 알리는 표지판이 있다. 국사봉까지는 2.4km를 알리고 있다. 좌측 길로 내려가는 길은 두 길이 있다. 한 길은 무의도에서 가장 큰 해수욕장인 하나개로 직접 내려가는 길이며, 또 한 길은 바다 절벽 길 곁을 지나는 환상의 길이다. 하나개해수욕장에는 ‘영화 천국의 계단’과 ‘칼잡이 오수정’을 촬영했던 세트장이 있어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오늘은 무의도 세 봉우리를 이어 걷는 길이니 직진한다. 1.5km 정도 내려오면 쇠로 만든 구름다리가 있다. 하나개해수욕장으로 향하는 작은 고개 포장길을 밟지 않게 하려는 배려인 것 같다. 구름다리 앞에는 원두막처럼 꾸민 무인판매대가 있다. 냉장고에는 시원한 음료와 맥주, 막걸리도 있다. 우측(동쪽)으로 내려가면 무의도 행정중심지 개안(浦內)마을이다. 조선시대 말 키우던 섬 무의도 이 고개를 중심으로 개안과 하나개 지역에는 조선시대 국가가 운영하는 말목장이 있었다. 조선 초부터 이미 목장이 개설되었는데 초기에는 92필의 말을 방목하였다. 농부, 염부가 없어 거주하지 못하고 삼목도의 목부가 내왕하며 키웠다(放國馬九十二匹 無田無鹽人 不得居 三木島放子來往者養). 그 뒤 선조 당시에는 99명의 목자가 103필의 말을 키운 기록이 있다. 1842년 기록인 영종진읍지에는 52필의 말을 키운 기록이 전해진다. 암수도 나누어 기록하였는데 수놈 38필, 암놈 18필이라고 적혀 있다(牧馬五十二匹 雄三十八匹 雌十八匹). 어찌 된 일인지 합계가 안 맞는다. 옛 분이 기록하시다가 깜빡하신 것이다.

다리를 건너 국사봉 영역으로 들어서면 낡은 안내판이 하나 서 있다(지난 봄까지 있었는데 이번 여름에 가 보니 없어졌다). 내용은 봉우리에서는 예부터 나라를 위해 제를 지냈고, 1950년대에 봉우리에서는 금동불상과 수백 점의 토우(土偶)가 발견되었고 절터가 남쪽 기슭 200m 지점에 있기에 산 이름을 ‘국사봉’으로 정했다는 것이다(이 안내판에는 國寺峰을 國史峰으로 잘못 표기하고 있었다). 금동불상, 토우 모두 필자에게는 관심거리였는데 이 안내판 이외에는 어디에서도 기록이나 실물을 확인할 수 없으니 안타깝다. 국사봉(國寺峰) 아래 절터도 여러 번 찾아보았는데 정확한 위치를 아직 찾지 못하였다. 등산로 우측(동쪽) 평탄지에서 공깃돌만 한 기와 파편, 옹기 파편, 공양간에 걸었던 가마솥 파편으로 보이는 쇳조각 하나 찾은 것이 전부이다. 1894년 간행된 영종진사례책에 무의도 호수(戶數)가 무의도 42호, 소무의도 26호였다 하니 절의 규모는 아주 작았을 것이다. 1966년 무의도 인구도 200가구에 550명 정도였다니 법당에 기와나 제대로 얹을 수 있었을까?

평탄지에서 가파르게 500m 오르면 국사봉 정상이다(236m). 인천 지역 여러 단체가 세운 국사봉(國寺峰) 정상석이 나무 데크에 밀려 뒤쪽으로 서 있다. 내려다보면 하나개해수욕장과 실미도가 손바닥처럼 보인다. 이제 다시 당산을 향하여 하산 길로 접어든다. 119안내 11 위치에 갈림길이 있다. 직진 방향은 큰무리마을, 좌측 방향은 실미유원지로 가는 길이다. 그대로 하산하려면 큰무리마을로 가고, 당산으로 가려면 실미유원지 방향으로 가야 한다. 무의도 3봉우리 종주 길에 나선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이 갈림길에서 그만 큰무리 하산 길로 들어서고 만다. 길표시가 애매해서이다. 실미도 길로 들어서면 아름다운 소사나무 숲길이 이어진다.

바지락전에 막걸리 한잔 “얼쑤” 하산길의 끝은 봉오리재이다. 우측(동)은 큰무리마을이며 좌(서)로 넘어가면 이내 실미도(實尾島)다. 영화 ‘실미도’로 잘 알려진 우리 현대사의 아픈 현장이다. 썰물이 되면 무의도에서 걸어서 넘어갈 수 있다. 무인도인데 썰물 때 한 나절 다녀오면 좋다. 말끔히 정리해 놓아 쾌적하다. 봉오리재에서 1km 남짓 오르면 당산에 닿는다. 당집은 없는데 당목(堂木)이 세월을 머금고 있다. 아마도 무의도에 몇 안 되는 나이 먹은 소사나무일 것이다. 큰무리마을에도 20여척의 배가 있었다 한다. 멀리 연평도 지역까지 어로 길에 올랐으니 어찌 용왕님과 산신님께 기도하지 않을 수 있으랴. 지금도 당제를 지내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큰무리마을에 살던 무당은 이제는 육지로 나갔다 한다. 오늘 나의 산길도 이곳에서 마무리하려 한다. 얼쑤~. 큰무리 선착장으로 내려가 바지락전에다 막걸리 한 잔 해야겠다. - 이한성 동국대 교수

교통편 공항철도/공항버스 인천공항 3층 7번 게이트 ~ 버스 환승 222번(매시 20분), 2-1번(매시 50분) ~ 잠진도 선착장 ~ 무의도 배편 ~ 무의도 도착(큰무리 선착장)/버스환승 ~ 샘꾸미(광명선착장) 돌아오는 교통 역순으로 잠진도 ~ 공항 버스: 222번(매시 35분), 2-1번(매시 5분) 걷기 코스 샘꾸미 ~ 소무의도 누리길 ~ 샘꾸미 ~ 호룡곡산 ~ 국사봉 ~ 당산 ~ 큰무리 선착장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마애불과 문화유적지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갑니다.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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