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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 - 16] 봉산 ~ 서오릉길

절 없어져 ‘간절길’에 인적마저 끊기니 ‘간사람길’일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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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91호 박현준⁄ 2012.09.10 11:17:01

혹시 강북을 기준으로 볼 때, 서울의 서쪽 경계를 알고 계시는지? 산을 자주 다니는 이들은 동쪽 경계가 수락산, 불암산, 아차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인 것은 잘 알고 있으나 서쪽 경계는 쉽게 답을 내놓지 못한다. 오늘 걷고자 하는 길은 바로 이 서쪽 경계를 이루는 산줄기이다. 산이라고 해 보아야 최고봉의 고도가 210m(봉산)인 산줄기이며, 더 연장하여도 236m(응봉, 앵봉, 효경산, 서달산)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이 산길이 봉산과 서오릉을 이어 걷는 ‘환경생태의 길’이다. 한북정맥(漢北正脈)의 한 줄기가 북한산을 타고 와 연신내에서 구파발로 넘어가는 고개(박석고개)를 이루고 다시 한 번 솟구친 것이 서오릉(西五陵)의 주산(主山)이 되는 응봉(앵봉, 서달산, 효경산)이다. 이 응봉이 나래를 펴 서오릉을 품고 주맥(主脈)은 남으로 달려 갈현동과 고양시 경계를 이루는 벌(버리)고개를 넘어 나아가니 그 줄기가 봉산 줄기이다. 이 줄기는 수색교 지점까지 능선을 이루면서 상암동 쪽으로 내려가 다시 한 번 솟구친 후 한강으로 잦아든다. 멀리 백두산에서 발원한 정기(精氣)의 한 줄기를 한강에 전하는 것이다. 그러니 산은 낮아도 오늘 걷는 길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걷는 거리도 산길 7~8km, 서오릉길 5km 남짓 되는 만만치 않은 길이다. 서울의 서쪽 경계 이루는 응봉 길 지하철 6호선 디지털미디어시티역 5번 출구에서 출발한다. 얼마 전까지 수색(水色)역이었는데 상암동이 디지털 미디어를 지향하는 지역으로 탈바꿈하니 그에 어울리게 바뀐 것 같다. 수색(水色)은 본래 순수 우리말 지명이 물치(무르치: 물이 불면 치오른다는 의미)였다는데 조선 선조 때 활약했던 선비 한백겸(韓百謙: 久菴) 선생이 부친이 돌아가시자 상청(喪廳)을 모시고 이곳에서 6년을 살다 돌아가셨다. 아우가 먼저 연고를 잡은 곳인데 형에게 북쪽 산 아래 농토를 내어주어 밭 갈고 애들 글 가르치며 그렇게 사신 것이다. 동국여지비고에 이때의 일이 기록되어 있다. 구암 한백겸이 수생리에 집짓고 거주하면서 서재를 열어 학문을 가르쳤다. 마침내는 마을 이름을 물이촌(옮기지 않을 동네)이라 고치고 뜻을 나타냈다. (久菴韓百謙家居水生里 闢書齋講學 遂改村名爲勿移村 作名以見志) 물이 차오른다는 물이촌에서 수생리 → 수색리로 바뀌기까지 물이촌이란 말은 뜻으로야 ‘옮기지 않고 살 마을’임을 나타내지만 이 시절에는 ‘물치’를 한자화하여 수이촌(水伊村)이라 했었는데 ‘수이촌’이라는 뉘앙스도 살리면서 자신의 뜻도 담아 물이촌(勿移村)이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수색(水色)은 어디에서 온 말일까? 윗글에서 수생리(水生里)와 수색리(水色里)는 자음접변 현상으로 ‘수생리’로 동일하게 발음된다. 세월 따라 ‘물치’의 뜻은 잊고 발음이 같은 수색리(水色里)가 되었을 것이다.

5번 출구에서 길을 건너면 SK주유소가 있다. 그 뒤쪽으로 수색성당이 있다. 그 앞길로 오르면 우방아파트와 청구아파트가 있다. 그 사이에 있는 철사다리로 오르면 바로 숲이 우거진 봉산 동남쪽 길로 접어들게 된다. 길은 흙길로 편안하고 조망 명소 640m를 알리는 안내판이 나타난다. 조망 명소에 오르면 주변 마을과 북한산부터 시작하여 부챗살처럼 서울, 경기 일원의 산들이 시원하게 보인다. 예부터 은평, 김포, 일산이 평야지대로서 높은 산이 없기 때문이다. 전망 명소에서 내려오면 곧 팥배나무숲 탐방로가 나타난다. 길은 두 갈래로 나뉘는데, 팥배나무숲은 우측 길로 들어서야 한다. 그 길에는 팥배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약수터(만수약수터)도 있다. 좌측 길은 평범한 능선길이다. 이곳은 봉산생태보전지역인데 안내판에는 그 넓이가 약 74,000 제곱m라 하고, 봉산도시자연공원 전체 면적은 약 150만 제곱m라 쓰여 있다. 또한 능선 길을 따라 자라는 나무 분포를 표시한 지도가 있는데 나무 종류가 많기도 하다. 팥배, 작살, 중국단풍, 미국참나무, 화살, 굴참, 자귀, 병꽃, 노린재, 귀룽, 초피, 느릅, 물푸레, 신나무, 떼죽, 마가목, 으아리, 가죽, 털황벽, 상수리, 개암, 참회, 산떨, 서어, 다릅, 덜꿩…. 나무 공부하고 싶은 이들은 이 능선 길을 걸으며 익히면 좋을 것이다. 가는 길 곳곳에 10여개의 정자도 지어 놓았고, 운동기구도 갖추어져 있다. 길은 수국사(헬기장) 방향인 북으로 계속 이어진다. 우측(동쪽)은 은평구 증산동(繒山洞), 신사동(新寺洞), 구산동(龜山洞)을 지난다. 좌측(서쪽)은 고양시 덕양구 향동동(香洞洞)이다. 아마도 향동(香洞)이라는 골짜기(洞)에 마을(洞)이 생기니 동(洞)이 겹치는 지명이 되었을 것이다. 증산생활체육광장 1.3km 지나온 곳에 우측으로 숭실고등학교 방향 표지판이 서 있고 이곳에서 500여m 북으로 향하면, 우로는 ‘상신초등학교 0.45km’, 좌로는 ‘덕양구 항동’을 알리는 표지판이 서 있다. 바로 앞쪽에 보이는 정자는 은향정(恩香亭)이다. ‘항동’이라는 지명은 향동동(香洞洞)을 잘못 쓴 것인데 고개 하나 넘으면 있는 이웃마을 이름을 잘못 써도 너무 심한 것 같다. 이곳에서 향동동 방향으로 잠시 내려가면 배드민턴장이 있고 다시 50여m 내려가면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운동시설이 있다. 두 곳 모두 시원한 샘이 있어 주민들이 이용하던 곳이었다. 바로 이 운동시설 일원이 경기문화유적지도와 고양시문화유적분포에 기록되어 있는 ‘향동동 절터’이다.(향동동 산125-1/ 새 주소: 간절로 77) 샘물 마르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이곳에서 200~300m 내려가면 한전의 345KV 시설이 자리 잡고 있고, ‘간절길’이라 부르는 시멘트 마을길 포장도로가 있다. 이곳은 향동보금자리주택 예정지로 지정되어 이제는 마을이 없어졌다. 마을이 없으니 배드민턴장도 운동시설도 폐허처럼 변해 가고 있다. 샘물은 마르지 않고 예전 그대로 흘러나온다. 이곳 절이 옮겨 갔기에 이 절터로 이어지던 길을 ‘간절길’이라 부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옛날 절만 갔나, 이제는 사람도 갔다. ‘간사람길’이라고 이름 하나 붙여야겠다. 다시 능선길로 올라와 봉산으로 향한다. 30여분 지나면 직진하여 봉산을 오르는 나무층계 길과 좌로 돌아가는 평평한 흙길의 갈림길을 만난다. 흙길로 돌아가면 덕산약수(德山藥水)가 있다. 약수물은 샘이 두 개인데 어느 호사가가 음향수(陰香水), 양향수(陽香水)라 붓글씨로 써 붙였다. 직진하면 봉산방향으로 향하는 빠른 길이다.

덕산약수길과 직진길은 다시 만난다. 두 길이 만나는 지점에서 1km 남짓 직진하면 드디어 최고봉인 봉산(烽山, 일명 鳳嶺山)에 도착한다. 고도 210m로 오늘 여정의 최고봉이다. 근년까지도 군부대의 주둔지여서 일반인이 접근할 수 없었다. 이제는 봉산해맞이공원으로 다시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정상에는 봉산정이라고 한글 편액을 붙인 6각정도 세웠고, 이곳에 있던 봉수대도 재현해 놓았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이곳 봉수대 이름이 ‘영서역(迎曙驛) 서산봉수’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은 ‘군 동쪽 15리 지점에 있다. 서(西)로는 고봉 성산에 응하고, 동으로는 서울 무악에 응한다(在郡東十五里 西應高峰城山 東應京都毋岳)’라 하였다. 이 봉수 라인은 여진족의 동태를 감시한 라인으로 압록강변 고정주(古靜州, 의주)에서 출발하여 서쪽 바닷가로 이어진 후 고양 성산 봉수를 지나 서울 무악(안산) 서봉으로 전달됐다. 조선 말기에는 고양시 강매동의 해포봉수로 그 임무를 이관했다 한다. 정상에는 두 기의 봉수점화대를 세워 놓았는데 그 사이로 백련산 너머 무악서봉이 보인다. 또 하나 이곳 봉산을 기억해야 할 일이 있다. 삼일운동이 일어난 열흘 후 3월 11일에 이 지역 많은 사람들이 올라 봉화를 밝히고 만세를 부른 뜻깊은 장소이기도 하다. 이곳 봉산 서쪽 363번 지방도로 봉산로 옆에는 절터로 추정되는 또 하나의 건물터가 있다. 경찰견 훈련학교에서 200~300m 남쪽에 길 안쪽으로 서부중앙교회 비젼센터와 바로 이웃하는 한마음교회(가족농장)가 있고 그 앞쪽에 유신자원이라는 업체가 있다. 이 두 교회 앞 등성이에 많은 기와편과 자기, 도기 파편이 널려 있다(덕양구 향동동 242번지 주변). 어느 기록에도 없으니 수국사를 연구하는 이들은 찾아가 보시기를 권한다. 거연선사의 지성으로 탄생한 수국사 이제 봉산을 내려온다. 평탄지에는 봉수정(烽燧亭)이란 정자가 있다. 앞쪽 서오릉 방향으로 잠시 나아가면 우측(동쪽) 숲 사이로 기와지붕 건물이 보인다. 200~300m 아래 찬란한 황금빛 절 수국사(守國寺)가 있다. 남방불교에서 불탑을 황금으로 장엄(莊嚴: decoration)하듯이 수국사도 불당을 황금빛으로 장엄하고 있다. 실제 금 성분의 재료라고 한다. 수국사는 어떤 절이었을까? 봉선본말사지(奉先本末寺誌)에 수국사(守國寺)가 자세히 실려 있다. 1800년대 말 북한산성 총섭(總攝)의 직을 맡고 있던 월초거연선사(月初巨淵禪師)가 있었다. 건양 2년(1897년) 3월 고양군 신도면 오하산(鰲下山) 선영에 성묘하고 돌아오다가 수국사(守國寺) 유허를 보고는 “지금껏 존속했다면 우리 선조께서 염불과 설법을 들을 수 있었을 텐데”라며 애석해 하였다. 그리고는 가까운 곳에 터를 구해 다시 수국사를 세울 것을 염원하였다.

이듬해 1898년 8월 선사가 진관사에 들렸는데 법당 한 구석에 차 한 잔, 마지(잿밥) 한 그릇 공양 받지 못하는 아미타불 한 분을 만나게 되었다. 물은 즉, 폐사된 수국사에서 모셔 온 부처님인데 한 번도 공양드린 적이 없다 하였다. 선사는 다시 다짐하였다. 그러던 중 황세자(순종)의 병환이 심하여 고종황제께서 노심초사했는데 선사가 황세자를 위한 기도를 하게 되었다. 선사의 공력(功力)인가, 아미타불의 불력인가, 기도 80여일만에 황세자가 쾌차하였다. 이렇게 하여 광무(光武) 4년(1900년) 황실의 시주금으로 현 위치에 땅을 사고 절을 지었다. 최근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이때 다시 모셔온 아미타불은 지금 수국사 법당에 계시는데 고려 때(1239년) 조성된 부처라 하며 1900년대 초에 그린 탱화들은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다. 그러면 오하산 근처에 있다는 옛 수국사 터는 어디 있는 것일까? 아직도 찾지 못하였다. ‘은평구 문화유산(박상진 저, 은평문화원 간, 2005년)’에 덕양구 하고개 부근에서 절터를 찾았다 하니 기대를 걸어 봄직하다. (용두동 산 80번지 근처, 용두 초등학교 서편) 수국사를 떠나 다시 능선 길로 올라온다. 다음 찾을 곳은 최근에 세워진 절 금륜사(金輪寺)다. 수국사길 반대편 샛길로 내려가도 되는데 기왕 오늘은 봉산 능선 길 종주를 목표로 했으니 능선 길 끝까지 간다. 능선 끝은 장작구이통닭집이다. 품질도 좋고 값도 합리적이어서 언제나 손님이 많다. 장작구이통닭에 시원한 생맥주 한 잔이 간절하다. 그러나 어찌하랴, 절터를 찾는 중이니 음주와 육식은 참아야지. 통닭집 앞은 신호등이 있는 서오릉 앞길이다. 좌로 200~300m 내려오면 서오릉 건너편으로 용두동 방향 남쪽으로 가는 차도를 만난다. 그 길 잠시 아래 좌측으로 금륜사가 있다. 최근에 조성한 마애불이 천진하게 길손을 맞는다. 이 절은 청정 비구니(比丘尼) 스님들이 수행하는 절이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 차 한 잔 얻어 마시고 갈 수 있다. 서가(書架)에는 성경(聖經) 책도 자리 잡고 있다. 열린 마음이다. 탱화는 지리산 산청에 묻혀 사는 이호신 화백이 그린 것인데 법구경(法句經)을 수화(手話)로써 설(說)하고 있다. 코믹한 표정과 손모양이 미소 짓게 한다.

이제 서오릉(西五陵)으로 들어간다. 서오릉에는 경릉(덕종 내외), 창릉(예종 내외), 명릉(숙종과 두 妃), 익릉(인경왕후: 숙종의 원비), 홍릉(정성왕후: 영조의 원비)의 다섯 능(陵)과 수경원(영빈 이씨), 순창원(순회세자), 대빈묘(장희빈)가 잠들어 계신다. 서오릉은 능으로뿐만 아니라 한산하고 숲이 우거진 걷기코스로서 더없이 좋은 곳이다. 특히 비오는 날 서오릉을 걷는 일은 더 없이 좋아서 몸과 마음의 사치라는 생각까지 든다. 세 코스가 있는데 북쪽 서어나무길 1.92km, 중앙 소나무길 1.08km, 남쪽 단풍길 2.14km의 아름다운 길이다. 서오릉은 세조의 장자 의경세자(懿敬世子)로부터 시작되었다. 의경세자는 1457년(세조 3년) 나이 20에 임금이 되지 못하고 운명을 달리 하니 고양군 동쪽 봉현 언덕에 장사지냈다(葬高陽郡東蜂峴之原). 세자빈은 우리에게 인수대비(仁粹大妃)로 알려진 한(韓) 씨인데 1504년(연산군 10년) 세상을 떠나니 남편 곁에 묻혔다. 의경세자의 묘를 조성한 후 세조는 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절을 지을 것을 내수사에 명한다(內需其距玄室不遠造寺一區). 이렇게 해서 경릉의 능침사찰(陵寢寺刹)로 정인사(正因寺)가 경릉 동쪽에 세워진다(正因寺在敬陵東). 정인사와 수국사는 다른 절이다. 수국사는 오하산(鰲下山)에 있었고, 정인사는 서오릉 구내 익릉 남쪽에 있었던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의경세자가 죽자 그의 동생(세조의 2子) 황(晄)이 세자가 되어 왕위를 이었다. 예종(睿宗)이다. 예종은 왕위에 오른 지 13개월 만에 역시나 20세로 승하하였다. 이렇게 하여 묻힌 곳이 형 의경세자가 묻힌 서북쪽 창릉이다. 세조의 아들들이 요절한 것에 대해 세간에서는 조카 단종을 죽인 세조의 업보라 했고,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원한 때문이라고도 했다.

이렇게 두 형제가 요절하니 왕위는 한명회의 사위인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에게로 돌아갔고 자을산군이 성종으로 등극하니 그 아버지 의경세자는 덕종(德宗)으로 추존되었다. 어머니 한 씨 또한 소혜왕후(昭惠王后)가 되었고, 이어서 인수대비가 되었다. 힘을 얻은 소혜왕후(인수대비)는 남편 의경세자(덕종)의 원찰 정인사(正因寺)가 너무 졸속으로 초라하게 지어진 것이 가슴 아파, 정인사 건립 12만에 고승 설준(雪峻)을 초빙하여 119간의 대찰을 지었다. 이때의 기록이 김수온의 정인사중창기로 전해지고 있다. 정인사는 봉선사와 더불어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절이 되었는데 많은 유생들이 유숙하며 쓴 시(詩)들이 동국여지승람에 전해진다. 그러면 정인사(正因寺)의 정확한 위치는 어디였을까? 1682년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국휼등록(仁敬王后國恤謄錄)에 익릉(인경왕후릉) 남쪽이 정인사 위전에 면한다 하였다. 그러면 정인사는 경릉에서 멀지 않은 동쪽이면서 익릉 남쪽과 면하고 있는 곳이다. 엊그제 비로 깨끗이 씻긴 익릉 남쪽에 가 보았다. 그 곳에는 여러 개의 초석과 맷돌바닥, 기와편이 씻겨 있었다. 그렇게 찾고 싶었던 정인사(正因寺) 터는 먼 곳이 아닌 서오릉 익릉 앞이 분명하였다. 그동안 여러 사람들이 생각해 왔던 정인사와 수국사는 다른 절이며, 수국사는 월초거연선사가 보았듯이 오하산(鰲下山)에 있던 절이고, 정인사는 서오릉 구내 익릉 남쪽에 있던 절이었음이 거의 확실하다. - 이한성 동국대 교수

교통편 지하철 디지털미디어시티 역 5번 출구 걷기 코스 5번 출구 ~ SK주유소 뒷길 ~ 청구아파트 ~ 봉산능성 ~ 팥배군락 ~ 향동동 절터(항동 갈림길) ~ 덕산약수 ~ 봉산 ~ 수국사 ~ 금륜사 ~ 서오릉 ~ 정인사 추정 터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마애불과 문화유적지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갑니다.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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