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에 떠 있는 섬 중에는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한나절에 다녀 올 수 있는 섬들이 있다. 필자에게는 휘파람 불며 집 근처 공원나들이 하듯이 다녀오는 섬들이다. 특히나 공항철도는 일하는 날에는 공항길이지만 한자락 마음 내려놓은 날에는 마음 가벼운 여행열차가 된다. 이미 졸고(拙稿) ‘옛절터 가는 길’에 소개했던 영종도, 무의도 이외에도 장봉도, 시도, 신도, 모도는 가벼운 트레킹 길에서부터 17km 가까운 긴 산길 종주코스까지 다양한 길과 만나게 해주는 곳이다. 그 날의 컨디션과 마음을 따라 걸으면 되는 일이니 마음도 가볍다. 오늘은 장봉도(長峰島) 산길을 걷는다. 장봉도는 영종도의 서쪽 강화도, 석모도, 교동도의 남쪽에 있는 섬이다. 섬 이름이 이미 암시하고 있듯이 산봉우리(峰)들이 길게(長) 이어져 있는 섬이다. 높이라야 최고봉이 151m이니 숨이 턱에 찰 리도 없다. 알맞게 숲이 우거진 능선길을 따라 좌우로 눈 시리도록 바라보이는 바다와 주변에 점점이 자리잡고 앉은 섬들을 바라보며 걷는 길이다. 이제 그 지겹던 여름 더위도 지나갔기에 마음 바람난 도반(道伴: 길친구)이 눈 좀 시원한 길을 안내하라 한다. 공항철도를 타고 운서역(雲西驛)에 내린다. 영종도는 그 중심에 백운산(白雲山)이 자리하고 있기에 그 산 서쪽에 자리잡은 지역은 운서(雲西)가 되었다. 운서역에서는 매시 40분 삼목(三木)선착장으로 떠나는 버스(221-1)가 있다. 장봉도, 신도(信島), 시도(矢島), 모도(茅島)를 가는 날에는 이곳에서 삼목선착장으로 가야 한다. 필자는 언제나 이 코스를 택할 때는 운서역에 매시 30분에 도착하는 열차를 탄다. 서울역에서 40분 정도 걸리는 길이니 서두를 필요도 없다. 예전의 섬이 선착장 되고, 4형제 섬은 연도교로 연결되니 혹시나 인천공항행 버스를 이용하는 이들은 공항 3층 5번 게이트에서 303, 223번 버스를 타고 신도시 입구 풍림아파트에서 하차, 길을 건너서 203번 버스로 환승하면 삼목선착장으로 온다.
40분에 운서를 출발한 버스는 10여분 후 삼목선착장에 도착한다. 삼목선착장은 영종도에 신공항이 들어서기 전에는 삼목도(三木島)라는 작은 섬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말목장이 있었고 어업도 꽤 있었던 섬이었다. 선사시대 주거지터가 발견되었을 만큼 일찍부터 사람이 살던 곳이었다. 그러던 섬이 이제는 영종도의 북쪽 한 모퉁이 땅이 되었다. 물길이 셋이어서 ‘삼 목(項)’이었다는데 이름도 ‘세(三) 나무(木)’으로 바뀌고 섬이었음을 기억하는 이들조차 거의 없으니 삼목도의 지신(地神)께서는 많이 서운하실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포구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장소가 되었으니 지신께서 영 밑진 장사만 하신 것은 아닌 것 같다. 이름도 사랑스러운 ‘장봉바다역’ 장봉도로 떠나는 배는 매시 10분에 출발이다. 버스시간을 배 떠나는 시간에 맞춘 것이다. 10분 뒤 배는 신도(信島)에 도착한다. 신도는 좌측의 시도(矢島), 모도(茅島)와 모두 연도교(連島橋: 섬을 잇는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섬 중앙에는 구봉산(178m)이 자리 잡고 있으며 세 섬을 이어 걷는 트래킹코스는 한 번 다녀간 이들에게 사랑 받는 길이다. 배는 다시 장봉도를 향해 출발한다. 30여 분 뒤 장봉도 옹암(甕岩: 독바위)선착장에 도착한다. 선착장터미날 이름은 ‘장봉바다역’이다. 배에서 내리니 장봉도 마을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대한민국 만만세다. 철도 내리니 버스가 기다리고 있지, 버스 내리니 배가 기다리고 있지, 배 내리니 산행 출발지로 떠나는 마을버스가 기다리고 있지…. 먼 섬까지 대중교통이 시스템을 갖춘 나라, 괜찮은 나라 아닌가.
버스는 선착장에서 출발하여 장봉도 행정중심지인 장봉2리를 지나 장봉3리, 장봉4리(종점)까지 20분 정도 소요된다. 산행길에 대해 물으면 기사님이 친절히 알려주신다. 이 버스에는 장봉도 지도도 비치되어 있다. 5~6km 산길 걸어 선착장으로 돌아올 계획이면 장봉3리에서 출발하면 좋고, 6~7km 걸을 계획이면 장봉4리 종점에서 내려 선착장으로 돌아오는 산길을 택하면 된다. 더 긴 길을 걷는 코스는 세 가지가 있다. 버스 종점 장봉4리에서 능선길로 오르면 세 갈래 길로 향할 수 있다. △동쪽, 우리가 출발한 ‘옹암선착장’ 방향길 △서남쪽 바다 끝으로 가는 ‘야달선착장’ 길 △서북쪽 바다 끝으로 가는 ‘가막머리’ 길이다 이곳에서 직접 옹암선착장으로 가는 길은 6km를 약간 넘는 길이며, 야달선착장을 왕복하여 옹암선착장으로 가는 길은 12km를 약간 넘고, 가막머리를 왕복하여 옹암선착장으로 가는 길은 11km를 약간 넘는다. 큰마음 먹고 야달과 가막머리를 모두 들러 가는 길은 17km 정도가 된다. 이 외딴 섬에 웬 봉화대? 필자는 장봉4리(종점)에서 내려 능선길로 올라선다. 먼저 이름도 아득한 가막머리 능선길로 길을 잡는다. 가파르게 치고 오르니 산봉우리에 팔각정이 있다. 이곳이 장봉도 봉화대(烽火臺)가 있던 곳이다. 석축이 일부 남아 있는데 봉홧불을 피우던 시절 연대(煙臺: 불 피우는 아궁이)의 흔적이 아닌가 모르겠다. 이 외딴 섬에 무슨 일로 봉화대를 만든 것일까? 만기요람(萬機要覽)에 장봉도 봉수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간봉인데 교동의 장봉도에서 시작하여 강화도로 통한다(間烽。初起喬桐長峯島通于江華)’. 조선시대 봉수체계는 직봉(直烽)과 간봉(間烽)이 있었다. 직봉은 국가 전체를 5개의 라인으로 나누어 한양 목멱산(남산)으로 집결하게 한 국가 기간(基幹)라인이며, 간봉(間烽)은 지방 관아를 중심으로 직봉에 문제가 있을 때를 대비한 지방 자체 라인 및 비상라인이었다.
그러면 무슨 이유로 장봉도에 봉화를 설치한 것일까? 고려와 조선은 사직(社稷)이 위태로울 때 임금이 피신하여 안전을 도모할 보장지지(保障之地)로서 강화도를 제1로 여겼다. 이 광화의 뱃길을 지킬 수 있는 지역으로 장봉도와 자연도(영종도)는 요지였던 것이다. 이 시기의 수군수영(水軍水營)은 교동도에 있었는데 장봉진(長峰鎭)은 교동수영에 속했기에 ‘교동 장봉도’라고 기록한 것이다. 8각정에서 가파르게 떨어지는 서북 방향 길로 나아간다. 고도 차이가 거의 없어 산들바람 속에 가막머리로 향한다. 길은 편히 잘 다듬어져 있는데 갈 길이 멀어서 그런지 만나는 사람이 없다. 오늘은 이 길을 전세 낸 것이다. 아름다운 땅이름들, 먼저 가져가는 게 임자 남쪽으로는 세 섬이 평화롭게 떠 있다. 날가지, 사염, 아염이다. 섬 이름도 토속적이다. 무의도도 그러했지만 장봉도도 어원은 알 수 없어도 토속적 어감이 가득한 지명들이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가막머리, 야달, 굴뿌리, 마른논골, 절터골, 구쟁이마루터기, 독적골, 중들, 말문고개, 늘논골, 뒷장술, 동그랑산, 작은멀곶, 장은서재, 죽은여, 장골, 제비물, 도랑너머, 한들, 다락구지, 아달, 큰강구지, 긴장술, 밧모, 독바위…. 카페 이름으로 가져다 쓰면 국적불명 외국명보다 한결 돋보일 것 같다. 봉화대를 떠난 지 30여분, 숲길 지나 시야가 탁 터진다. 앞으로는 그리움을 불러일으킬 만한 두 섬 너머로 끝없는 바다가 펼쳐진다. 드디어 가막머리에 도착한 것이다. 가막머리… 도대체 무슨 뜻일까?
그곳에는 널찍한 나무데크로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가막머리 낙조대라는 이름을 붙였듯이 이곳의 낙조는 참으로 아름다울 것 같다. 어느 날 이곳에서 비박(Biwak: 야영) 한 번 하면 좋을 것 같다. 떨어지는 낙조를 보고 파도소리 들으며 별 가득한 하늘을 바라보는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들뜬다. 바닷가로 내려가니 파도와 시간이 새겨 놓듯 깎인 바위들도 많다. 낚시하는 이들에게도 포인트가 될 듯하다. 앞에 보이는 두 섬은 동만도(東晩島)와 서만도(西晩島)인데 장봉도 생태를 조사한 보고서에 의하면 천연기념물 노랑머리백로를 비롯하여 괭이갈매기, 검은머리물때새, 민물가마우지, 가마우지 등의 서식지라고 한다. 이제 가막머리를 마음속에 담아두고 온 길을 되돌아간다. 봉화대를 지나 남쪽 야달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산길은 더 이상 연결되지 않고 건어장 해변으로 내려온다. 바닷가로 내려가 백사장 길을 걷는다. 물 빠진 바닷가 돌들을 들치니 칠게란 놈들이 후다닥 놀래 달아난다. 어렸을 적에는 바닷가라도 가면 이 놈들을 잡아다가 조려 먹었던 생각이 난다. 가난하던 시절이니 먹을 만한 것은 모두 소중했다. 바다가 보이는 예쁜 ‘장봉둘레길’ 바닷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나타나는데 나무층계를 잘 만들어 놓았고 정상에는 팔각정도 예쁘게 지어 놓았다. 길도 편하게 다듬었는데 ‘장봉둘레길’이다. 마을 사람들이 다니던 산길도 있고 새로 8부 능선에 만든 길도 있다. 대체로 바다가 보이는 아름다운 길이다. 길의 끝 산 정상에는 통신철탑이 서 있다. 그 뒤로 야달선착장으로 내려가는 길을 닦아 놓았다. 선착장까지 내려가 보았는데 힘든 것에 비해 특징이 없다. 갔던 길을 되돌아 출발 지점 장봉4리 위 능선길로 회귀한다. 이제 장봉바다역(옹암선착장) 방향 산길을 탄다. 지나 온 길은 11km, 갈 길은 6km 정도이다. 좌측 북쪽 바닷가 진촌해수욕장(鎭村)이 깨끗하게 보인다. 진촌마을도 있다. 장봉수군이 있던 장봉진(長峰鎭)이다. 숙종실록(4년, 1678년 10월 23일)에는 병조판서 김석주가 올린 글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장봉도(長峰島)와 자연도(紫燕島)는 해문(海門)을 분치(分峙)하여 남쪽으로 조운(漕運)하는 입구가 되고 …중략… 장봉도는 토지가 심히 비옥(肥沃)하고 사람이 모두 들어가기를 원하며, 또 포곡(浦曲)이 있어 수십 척의 선함(船艦)을 정박시킬 만한 데이니, 또한 1보(堡)를 설치할 만합니다. (長峰與紫燕分峙海門, 爲南漕咽喉, 煤音距喬桐數里, 而近與江都人可隔水相語. 其島又甚廣, 鹺戶漁人之所聚居, 雖有牧馬, 足設一鎭. 長峰則土甚膏沃, 人皆願入, 且有浦曲, 可以藏泊數十船艦者, 亦可設一堡)”
장봉도와 영종도에 방어기지를 설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건의는 39년이나 지난 숙종 39년(1717년)에야 실현되었다(전선 5척, 군사 705명). 그 후 장봉진은 180여 년 뒤인 1895년 갑오개혁으로 폐지되었다. 그런데 장봉진을 없애니 당장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 다음 해인 고종 33년(1896년 12월 11일) 승정원일기를 보자. “주문도와 장봉도는 오래 전에 목장(牧場)을 없앤 데다 이번에 수장(水將) 마저 혁파하였으니, 중요하기 그지없는 국토를 누가 차지하게 될지 알지 못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 섬의 좌우로 빽빽이 들어선 작은 섬들은 잠상(潛商)과 유적(流賊)이 출몰하는 소굴이니, 이 섬들을 지킬 관리를 두지 않는다면 원주(原州)의 양길(梁吉)이나 울도(鬱島)의 김호(金護) 같은 무리들이 세력을 형성하는 일이 생길까 염려됩니다.” 도둑의 무리가 심하여 장차는 나라를 탐하는 세력으로 성장할까 걱정하고 있다. 이 염려는 일본이라는 도적에 의하여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섬의 논 색깔은 왜 이리 아름다울까 숲길을 잠시 지나니 장봉3리에 대빈창으로 내려가는 길 표지판이 보인다. 장봉진의 대병창(大兵倉)이 대빈창으로 변음되어 전해지는 것이리라. 길은 편하게 이어지는데 장봉3리길을 1km 지나면 국사봉 700m, 장봉2리 300m 갈림길 표지판을 만난다. 잠시 장봉2리라고 표시한 길로 100m 나아가면 또 하나의 봉화대 유구가 있다. 남쪽 바다와 북쪽 바다가 모두 보이는 곳인데 이곳에서 봉화를 올리면 강화에서나, 장봉도의 행정중심지인 장봉2리에서나 모두 잘 보이는 위치이다. 작은 봉우리 위에 돌무더기가 무수히 흩어져 있다. 다시 모으면 있는 그대로 복원도 가능할 것 같다.
이제 장봉2리 방향으로 내려간다. 절터골을 찾아가기 위해서이다. 절터골은 도상 거리로는 등산로 아래 200~300m 지점인데 숲이 우거져 직접 내려갈 수는 없다. 결국은 2리 마을 방향으로 내려가 논이 펼쳐져 있는 벌판 최북단으로 2~3km 돌아가야 한다. 그 곳에는 장봉도 공동묘지가 있다. 오래된 무덤부터 최근 무덤까지 장봉도에 살다간 이들의 무덤인 것 같다. 절터는 흔적이 없다. 무덤 지역의 동쪽 끝에 숲이 우거져 있는데 그 일대로 추정된다. 기왕에 2리로 내려온 김에 장봉출장소 앞마당에 있는 장봉주민구황비(長峰住民救荒碑)를 찾아본다. ‘前參奉趙公鏞敎救荒施惠不忘碑 進士李公鼎薰救荒施惠不忘碑’(전참봉 조용교공 구황 시혜 불망비 진사 이정훈공 구황 시혜 불망비). 조용교 선생과 이정훈 선생이 1901년 대흉년 때 굶주림에 허덕이던 장봉 주민들을 구휼한 것을 잊지 못해 세운 비인 것이다. 다시 산길에 올라 장봉도 최고봉 국사봉(國師峰, 151m)에 오른다. 팔각정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다와 섬마을들이 곱다. 논 색깔이 저리도 아름다웠던 것인가?
종주 길로 다시 나아간다. 400여m 길은 낮아지는데 드디어 찻길과 만나는 말문고개이다. 말문고개? 무슨 뜻을 담고 있을까? 동국여지승람 강화도호부 산천조를 보면 장봉도가 실려 있다. ‘진강현에 있는데 주위가 25리 목장이 있다.(在鎭江縣 周二十五里 有牧場)’ 세조실록(3년, 1457년)에는 말을 방목한다 하였고 건장한 어린 말(兒馬)과 숫마(雄馬)가 46필이라 하였다. 한 마디로 장봉도는 국영목장이었던 것이다. 장봉도 동쪽 끝(선착장)부터 이곳 말문고개까지가 그 영역이었다고 한다. 말이 넘지 못하도록 돌담을 쌓았는데 그 끝 지점이 말문(馬門)이라 한다. 언제부터인지 고갯마루에는 붉은 말의 상(像)을 가져다 놓았다. 생선 그득 싣고 조선 배가 흘러가던 곳 말문고개를 지나면 나지막한 능선길이 동으로 이어진다. 남쪽으로는 썰물로 빠져 나간 갯벌이 보인다. 장봉도 특산물은 갯벌에 지주를 설치하고 길러내는 재래식 김이다. 봄에 생산되니 한 번 입맛을 돋을 일이다. 북쪽으로 보이는 장봉도와 강화도, 교동도 사이인 큰골은 1930년대 민어(民魚, 鮵魚)의 주요 산지였다 한다. 깊이는 낮고 물살이 빠르면 대어가 잡힌다는데 민어의 최대 대어는 이곳에서 잡혔다 한다. 바다를 바라보니 그때가 그립구나. 고기를 싣고, 땔감을 싣고 경강(京江)으로 가는 韓船(柴船, 商賈船)들이 가득했다 한다. 이 우리 조선 고유 배가 90년대까지 장봉에 몇 척 남아 있었다는데 지금은 어찌 되었는지 궁금하다. 마지막 작은 봉우리 상산을 지난다. 그 곳에도 정자가 있다. 긴 산길을 걸어 선착장으로 내려오니 인어상(人魚像)이 기다리고 있다. 자신을 잡았다 놓아 준 어부에게 많은 고기를 잡게 해 주어 보은했다는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목이 컬컬하다. 선착장 근처에서 목 좀 축이고 가고 싶은데 마땅치 않다. 아쉽지만 운서역에서 마른 목을 푼 날이다. - 이한성 동국대 교수
교통편 장봉4리(버스종점) ~ 능선길 ~ 여기에서 세 갈래 길 선택(선착장방향 / 가막머리 방향 / 야달 방향)해 능력에 맞게 조합. 걷기 코스 공항철도 운서역 ~ 길 건너 221-1 버스 환승(매시 40분) ~ 삼목선착장(매시 10분) / 돌아오는 길: 반대로. 장봉도 배 시간: 매시 정각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마애불과 문화유적지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갑니다.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