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2호 박현준⁄ 2012.11.26 11:46:59
풍수(風水)공부를 오래 하는 어느 선생 말씀에 이른바 명당(明堂)이라고 하는 자리도 모두 때가 있다고 한다. 영원한 길지(吉地)도 없고 영원한 흉지(凶地)도 없다는 말이다. 산도 그런 것 같다. 우리들 젊은 날 그리 많이 다녔던 산 중에는 어느덧 옛 애인 잊듯이 잊혀져가는 산들이 있다. 감악산(紺岳山), 고려나 조선의 사서(史書)나 문집(文集)에는 심심치 않게 등장하던 산이었다. 장단도호부(長湍都護府), 양주목, 파주목 사이에 비록 규모는 작아도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적성현(積城縣)이 가까운 지역민이 아니면 사람들 뇌리에서 점점 멀어져 가면서 이곳의 진산(鎭山) 감악산도 까맣게 멀어져 갔다. 남북이 분단되면서 일반인들이 자주 찾지 않게 되었던 까닭일 것이다. 몇 년간인가 잊고 지내던 감악산이 갑자기 보고 싶어진다. 이제는 파주시 적성면이다. 예전과 달리 접근성이 무척 좋아졌다. 감악산 절터를 찾아가는 길은 감악산 등산로와 일치한다. 버스를 타고 범륜사(梵輪寺)에서 내리는데 이곳으로 오는 기점(起點)은 두 곳이 있다. 하나는 지하철 1호선 의정부 북부역에서 25번, 25-1번(적성 방향) 버스로 환승하는 길이다. 또 하나는 적성에서 역시나 25번, 25-1번(의정부 방향)을 환승하는 길인데, 적성으로 가는 방법은 지하철역 연신내(3, 6호선) 또는 구파발(3호선)에서 30번 버스를 타던가 아니면 경의선 전철을 타고 파주 월롱역에서 30번, 92번 버스로 환승하는 길이다.
운계사 터에는 세조가 하사한 비(碑) 가는 길이 좀 먼 것이 흠인데 창밖으로 낯선 풍경 구경하며 가면 이내 도착한다. 필자가 가던 날은 마침 적성에 장이 열리는 날(5일, 10일)이라서 고을이 장터 같았다. 터미널에서 25번 버스로 환승하니 20분이 못되어 범륜사 앞 정류장에 닿는다. 주말임에도 서울의 여느 산에 비하면 산객(山客)이 많지 않아 쾌적하다. 범륜사로 오른다. 늦가을 햇빛 속에 은행잎과 단풍잎이 자태를 뽐내며 오랜만에 온 길손을 맞는다. 범륜사(梵輪寺), 이 절은 옛 절 운계사(雲溪寺)터에 근년에 새로 중창한 절이다. 이제 운계사의 흔적은 찾기 어렵다. 눈 비비고 찾으면 완전히 새로 파헤친 계곡가에 공기돌 만한 기와돌이 보이고, 절마당에 근년에 찾아 세운 고졸한 3층 석탑이 옛터를 찾아 온 객(客)을 반긴다. 자리만 그 자리일 뿐 대웅전도 부처님도 절마당도 크게 크게 세워 놓은 석물(石物)과 관세음보살 입상(立像)도 모두 다 남 같다. 다행히 깊숙한 안쪽 극락보전(極樂寶殿) 우측 담 밑에 옛 비석이 하나 서 있다. 조선 세조(世祖)가 하사한 비라고 한다.
그렇다면 또 하나 운계사의 흔적이리라. 실록 세조 2년 3월조에는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가 전국 영험한 곳 기도처를 정할 것을 상소(上疏)한다. 이 때 감악산(紺岳山)도 명산으로 삼는다(以紺岳山爲名山). 또 다음 해인 3년(1457년) 8월조에는 세자가 병이 나서 신하들을 여러 영험한 곳에 기도하러 파견한 일이 기록되어 있다. 세조는 향(香)과 축문을 내렸는데 상호군의 업무를 행하던 이연손이 감악산에 기도하였다(李延孫于紺岳).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 보람도 없이 의경세자는 끝내 이 해에 2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이 분이 요즈음 TV연속극에 자주 나오는 인수대비의 남편이자 연산군의 할아버지이다. 그렇다면 세조가 하사하였다는 비는 언제 무슨 내용을 담고 세운 것일까? 아들의 회복을 기원하는 아비의 마음을 담은 것일까? 마모가 심하여 판독할 수가 없다. 이 곳 운계사에 다녀 간 이들이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세조의 왕위찬탈로 세상을 등진 생육신(生六臣) 중 한 분 추강 남효온(秋江 南孝溫) 선생이다. 선생은 운계사에 다녀가며 그 때의 마음을 칠언율시에 담으셨다. 宋玉坎壈悲失意(송옥감람비실의) 송옥처럼 불우하게 실의에 슬퍼하니 林間驢背賦秋聲(임간려배부추성) 숲 사이 나귀 등에서 가을 시를 짓는다 雲溪寺裏聽宵雨(운계사리청소우) 운계사에서 밤비 소리 듣고 紺岳祠前看晩晴(감악사전간만청) 감악사 앞에서 맑은 저녁 바라 보지 落日臨津龍吼壯(락일림진룡후장) 해지는 임진강 용 트림 장대하고 西風鴨島荻花平(서풍압도적화평) 서풍 부는 압도에는 갈대꽃이 펼쳤구나 松山百里靑無了(송산백리청무료) 송악까지 백 리 걸쳐 푸른빛 끝이 없어 禾黍高低愴客情(화서고저창객정) 들쑥날쑥 들판에 나그네 정 쓸쓸하네 *송옥(宋玉): 굴원의 제자, 모략을 당해 힘든 떠돌이 생활을 했다 함.
미수 허목(眉叟許穆) 선생도 1667년 운계사를 다녀가셨다. 이 때의 기록이 미수기언에 유운계기(遊雲溪記)로 전해진다. 그 기록 중에 흥미로운 부분이 있는데 운계비(雲溪碑)에 대한 것이다. 선생은 저녁 무렵 눈 온 후의 운계에 도착하여 운계폭포를 보았는데 ‘운계의 수석, 그 바위 골짜기를 청학동이라 하고 가장 위 바위를 무학대라고 하는데 올라가서 운계비를 읽었다. 운계사에서 묵었다.(雲溪水石 其石洞曰靑鶴洞 其最上層石曰舞鶴臺 上讀雲溪碑 宿雲溪寺)’ 이 글의 내용으로 보면 지금 범륜사(운계사) 일대 골자기가 청학동, 운계사 쪽 제일 높은 바위가 무학대, 그리고 그 위에 운계비가 있었을 것으로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세조의 비(碑)라고 하는 비석이 무학대 위에 있었던 운계비는 아니었을까? 감악산 정상의 미스터리 간직한 비석 이제 감악산 정상에 서 있는 미스터리의 비석(碑石)을 만나러 출발이다. 연전(年前) 수해로 인해 흉물스레 망가진 계곡을 손질하고 길도 손질하였다. 서운한 것은 너무 잘하려다 보니 자연스러움을 잃었다. 600여m 오르니 숯가마터가 나타난다. 가난하던 시절 참나무가 많은 산에는 숯가마를 만들어 숯을 구웠다. 다시 200여m 오르니 비교적 너른 평탄지가 나타난다. 안내판에 묵은밭이라고 쓰여져 있다. 예전 화전을 일구었던 흔적이다. 농터가 없던 농민들은 산 속으로 들어와 평탄한 땅에 불을 질러 초목을 태운 자리에 밭을 일구었다. 그러다 보니 산림을 훼손할 수밖에 없었다. 정부에서는 급기야 1966년 ‘화전정리에 관한 법률’을 만들어 정당한 절차 없이 개간한 화전들을 모두 정리대상으로 하였다. 배고프던 그 시절 많은 화전민들이 삶의 터전을 잃었다. 이 곳 묵은 밭도 그 때 이 곳을 떠난 이들의 흔적이리라. 조선시대에도 묵은 밭이 있었다. 다산선생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는 묵은 밭을 기간(起墾)하는데는 백성만 믿지 말고 수령이 반듯이 지성으로 경작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陳田起墾 不可恃民 牧宜至誠勸耕). 우리 시대는 노는 농토에 보조금을 주는 세상이 되었으니 참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다. 묵은 밭에서 좌측 능선길로 치고 오른다. 직진하여 계곡길로 계속 오르는 길보다 정상까지 1.5km 정도 긴 길이다. 능선까지 힘차게 오르면 운계능선 갈림길이다. 임진강과 강건너 북한 땅, 송악산을 건너다 보면서 오르는 코스이다. 추강선생의 싯구(詩句)처럼 구불구불 임진강은 용의 포효함이 장대하다( 臨津龍吼壯). 임진강의 옛이름은 칠중하(七重河)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온조왕이 칠중하에서 말갈의 엄습을 막아낸 기록이 보인다. 또한 같은 책 잡지(雜志) 고구려 지리지에는 이 곳 땅을 칠중현(七重縣)이라 했고 한편으로는 백제의 난은별(難隱別)이었다고 한다. 저 구불구불 흘러가는 임진강을 보고 7번 꺾여 돌아가는 물길을 칠중(七重)이라 했을 것이다. 적성 구읍(舊邑) 좌측으로는 칠중성(七衆城 )주변이 보인다. 임진강 유역, 한강 유역은 본래 마한(馬韓) 땅인데 백제가 이어 받았다가 고구려 광개토대왕, 장수왕 때 빼앗기고 말았다. 그 후 신라와 나제동맹(羅濟同盟)을 맺어 잠시 수복하였다가 신라의 배신으로 이 땅을 다시 신라에 빼앗겼는데 배신으로 빼앗은 땅에 신라는 신주(新州- 남천주 - 북한산주)를 설치하고 삼각산 비봉에는 신라의 강역(疆域)임을 선언하는 진흥왕 순수비를 세웠다. 이 때 세 나라가 빼앗고 빼앗겼던 성과 보루가 한강과 임진강 사이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칠중성도 그 중 하나였다. 오늘은 시계(視界)가 별로 좋지 않아 북한 땅 송악산은 잘 보이지 않는다. 능선길 까치봉과 팔각정을 지나 드디어 감악산 정상(675m)에 도착한다. 운계사에서 4km 정도 걸어 온 능선길이다. 정상에는 변함없이 우뚝 선 감악산비(紺岳山碑)가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다. 빗돌대왕비, 비뚤대왕비, 설인귀비, 몰자비(沒字碑) 등 이름도 많다. 이 비석의 글자가 모두 마모되어 비의 내용을 읽을 수 없다 보니 비석 모양과 전설에 따라 이름이 붙은 것이다. 1982년 동국대에서 이 비를 조사하였는데 제5의 진흥왕순수비(巡狩碑)가 아닐까 추정하였다. 물증은 없지만 비의 모양, 지정학적 위치, 추정 연대, 비가 서 있는 산 정상 등등 모든 면에서 또 하나의 진흥왕순수비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30여년 전 이 비를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궁금증과 감회가 솟아오른다. 감악산비여, 당신의 정체를 드러내 주소서.
감악산 신은 당나라 장수 설인귀 정상은 넓고 평탄하게 다듬어 놓았는데 무수히 많은 기와파편이 흩어져 있다. 무슨 기와편들일까? 가장 오래 전 기록인 삼국사기로 돌아가 보자. 잡지(雜志) 제사편에 보면 신라는 명산대천에 제사를 드리는데 이 곳 칠중성(七重城) 감악(鉗岳)에서 소사(小祀)를 드리고 있다. 아마도 여기에서 비롯하여 이 곳 산정상에 감악산신을 모시는 감악사(紺岳祠)가 생기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민간에서는 당나라 장수 설인귀(薛仁貴)를 감악산신으로 여겨 왔다. 유래는 분명치 않으나 고구려 멸망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수나라 당나라의 30만 대군, 100만 대군이 쳐들어 와도 고구려는 끄떡없이 이들을 물리쳤다. 그런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앞장선 장수가 설인귀였으니 설인귀는 당나라의 영웅이 되고 평양에 당(唐)이 안동도호부를 두자 군정 총독이 되었다. 아 가슴 아프다. 그 굳세던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죽자 세 아들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 장자 연남생이 당으로 도망가 고구려를 치는 전투에 당군의 앞잡이가 되었으니 나라의 운명을 인간의 욕심이 망친 것이다. 그 날의 일이 1500년이 지난 오늘날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역사는 땅에 묻힌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되살아나는 것이다. 이런 설인귀가 이 지방 출신이라는 소문에 편승하여 민간에서 감악산신으로 천 년을 지내 왔던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적성현지, 봉암사지(봉선본말사지) 기록을 보자. ‘감악사는 민간에 전하기를 신라가 당나라의 설인귀를 산신으로 삼았다고 한다(紺岳祠諺傳 新羅以唐薛仁貴爲山神)’. 임꺽정 봉에서 바라본 세상 저편 고려 친원파(親元派)임금 충렬왕도 원나라를 도와 출병할 때 설인귀를 제2신으로 봉해서 도만호로 삼기도 하였다(封神第二爲都萬戶). 조선에 들어와서 국가에서는 이 곳을 중사(中祀)를 지내는 명산대찰로 삼아 국가안녕과 기우제를 지낸 기록이 실록에 무수히 많이 기록되어 있다. 민간에서는 어떠했을까? 중부지방의 열두거리 무가(巫歌)에서 감악산신은 흥겹게 한 바탕 노신다 ~ ‘황해도 편산(평산)에 신장군 유장군 복장군 배장군 마누라 파편산(파평산) 윤씨대왕 양마누라 감박산(감악산)에 천총대왕 양마누라 아니시랴 ‘(산마누라거리) *마누라: 마누라의 어원은 상대를 부르는 극촌칭이다. 마마 정도? ‘파평산 윤씨 장군 뫼신 광대 황해도 평산 사(四)장군 뫼신 광대 충주단월 나라충신 림 장군 뫼신 광대 감박산(감악산) 천총대왕 뫼신 광대 ~’ (창부거리)
천총대왕(天聰大王)? 혹시 이 분은 단순히 정복자(征服者)가 아니라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 만세에 남고자 했던 진흥왕의 또 다른 모습은 아니었을까?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 보면 동으로는 마차산, 소요산이 이어지고 남으로는 감악지맥 노고산 노아산이 한북정맥으로 이어진다. 동쪽 앞 봉우리에는 마리아상(像)이 임진강 너머 북녘을 바라본다. 두고온 산하에 힘든 영혼들을 살피시는가 보다. 동남쪽 하산길에는 동광정사 1.7km 안내판이 붙어 있다. 이름도 낯선 절이름이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봉암사(奉岩寺)였는데 개명하였나 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불우(佛宇)조에는 감악산에 감악사(紺岳寺), 운계사(雲溪寺), 신암사(神岩寺)가 기록되어 있다. 봉선본말사지 봉암사 편에 의하면 봉암사의 전신이 감악사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철종 9년(1858년) 화주 창헌(暢憲)이 중창했음을 적고 있다. 거기에 주변에 있던 어떤 절을 옮겨왔다 하면서 신암사를 옮겨와 神을 奉으로 바꾸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봉암사에는 옛 흔적이 남은 것이 없기에 오늘은 100m 앞 봉우리 임꺽정봉으로 향한다.
깍아지른 봉우리 앞에는 절벽 아래로 굴이 하나 있다. 임꺽정(설인귀)굴이다. 임꺽정이 이 굴에 은거했다는 전설도 남아 있다. 임꺽정(林巨正)은 명종때 황해도 구월산에서 활약한 의적인데 고향이 양주 불곡산 근처였다 하니 양주와 한양쪽으로 산길을 탄다면 응당 감악지맥을 탔을 것이다. 그러니 임꺽정굴이나 임꺽정봉도 과히 엉뚱한 이름은 아닌 것 같다. 굴 아래 깍아지른 계곡 저편 아래로는 봉암사가 가을 오후 햇볕 속에서 졸고 있다. 그 아래로는 원당저수지가 보인다. 감악산에는 또 하나의 굴이 있다. 정상에서 동광정사(봉암사) 내려 가는 방향에 있는 남선굴(南仙窟)이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후 출사(出仕)하기를 간곡히 요청했으나 끝내 출사하지 않고 이 굴에 은거했다는 사천백 남을진(沙川伯 南乙珍)선생의 흔적이 남은 굴이다. 이 분은 서울 청계산에 국사봉이라는 이름을 남게 한 또 한 명의 고려 충신 조견 선생과 함께 감악산 남쪽 정절사(旌節祠, 사천서원)에 배향되었다.
이제 시야가 탁 트인 임꺽정봉에 올라 사방을 바라본다. 산과 자연이 살아 있는 경관이 아름답다. 임꺽정봉 옆으로는 바위능선이 이어진다. 서측 200 m 옆에 장군봉이 있다. 이 봉을 넘으면 장군봉 안부(데크)에 감악산 약수 1.6km, 감악산 주차장 3.7km 안내판이 있다. 주차장 방향 길로 100m 내려 가면 얼굴바위쉼터다. 고개를 돌려 지나온 장군봉을 바라 본다. 로마인처럼 이목구비가 완연한 얼굴바위가 저녁햇살 속에 빛나고 있다. 쉼터에서 잠시 아래 좌측 기암 아래를 바라보면 낮은 돌담이 보이고 안쪽으로 고르게 다져 놓은 옛 평탄지가 보인다. 초석과 기와편이 없는 것을 보면 절터는 아닌 것 같은데 감악신사와 관련된 기도터가 아닌가 모르겠다.
이제 마지막 남은 신암사터를 찾아간다. 장군봉 데크까지 다시 올라가 한 능선 넘어 멧돼지바위에서 하산해야 길이 편하겠지만 늦가을 풀도 말랐기에 기도터에서 골자기 너덜길을 내려 간다. 잠시 후 신암사(神岩寺)터가 나타난다. 신암사터를 알리는 안내판 이외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神岩寺? 어찌 神 자를 쓴 것일까? 우리 말에 ‘감, 검, 금, 곰, ?’ 등은 모두 신(神)을 뜻하는 말이다. 왕검, 검단, 금암, 검암, 곰나루, 감악... 모두 신의 영역에 있는 것이다. ‘神岩’은 신의 바위이니 ‘감악’과 같은 말인 것이다. 신암사터에서 골자기길 500m 내려 오면 감악산 마애불이 있다. 근래에 기도하는 이들이 뫼신 약사불이다. 이제 신의 세계를 떠나 인간세계로 돌아간다. 버스정류장까지는 약 3km, 신암저수지 지나서도 한참을 간다. 되돌아 보니 저녁 으스름 속에 신의 바위가 저으기 내려다 보신다. 두 손 모으고 허리 굽힌다. 흰 눈이 펑펑 오시는 날 다시 뵈러 오겠습니다. - 이한성 동국대 교수
교통편 범륜사 입구 ~ 범륜사 ~ 묵은밭 ~ 운계능선 ~ 감악산정상 ~ 임꺽정본 ~ 장군봉 ~ 얼굴바위쉼터 ~ 기도터 ~ 신암사터 ~ 마애불 ~신암저수지 ~ 371지방도(25/ 25-1버스 정류장) 걷기 코스 1) 1호선 의정부북부역, 25/25-1 버스 환승 ~ 범륜사입구 하차 2) 3호선/ 6호선 연신내역, 30번 환승 ~ 적성종점, 25/25-1환승 ~ 범륜사입구 3) 경의선 월롱역, 30, 92번 환승 ~ 적성종점, 2)번과 동일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