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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구의 한국 재벌사] 두산그룹 편 1화

장터 포목행상서 출발, 맥주로 돈벌어 성장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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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05호 박현준⁄ 2012.12.17 13:44:54

창업자 박승직(朴承稷)은 1864년 음력 6월 22일 경기도 광주군 광주면 탄벌리에서 빈농인 박문회(朴文會)의 3째 아들(5남 3녀 중 4째)로 태어나 17세 때인 1881년 민영완(閔泳完)이 전남 해남군수로 부임할 때 그를 수행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해남으로 갔다. 당시 박문회는 임의실(현 성남시 분당구 이매동)에서 여흥 민씨의 위토 15마지기를 소작하고 있었는데 이런 인연으로 박승직이 민영완을 수행했던 것이다. 박승직의 해남생활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당시 전남의 강진과 해남은 제주도 특산인 갓(凉臺)의 내륙 집산지였기 때문에 이곳에서 전국 각처로 공급됐다. 이러한 상업 환경 속에서의 경험을 통해 박승직은 장차 상인으로의 성장을 결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창업자 박승직, 포목상에서 서울 대표상인으로 성장 박승직은 해남에서 3년 간 머무르는 동안 300냥을 모았고 1883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1885년에 자금 100냥으로 포목행상에 나섰다. 인천과 강원도, 충청도는 물론 물화집산지인 송파장을 중심으로 낙생, 분당, 경안 등 광주일대의 장터를 전전했다. 송파장은 한강연안 사통팔달의 삼전도진(三田渡津)에 위치한 탓에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될 때까지 삼남(三南)지역의 최대 화물집산지였던 것이다. 1925년 7월에 ‘을축년 대홍수’로 피해가 커지자 주민 대부분이 가락동으로 이주했는데 이곳을 송파라 했다. 1886년부터는 광주일대를 떠나 경기도 산간지방과 강원도를 이동하며 상권을 점차 넓혀갔다. 3년여 행상을 통해 어느 정도 자금을 확보한 박승직은 서울로 진출했다. 그가 서울에 입성한 것은 맏형 박승완(朴承完) 때문이었다. 이 무렵 박승완은 장사하면서 마전다리(현 청계천 5가) 일대에서 무쇠솥(鐵鼎) 장사를 했으나 신통치 않아 집에서 쉬고 있었다. 박승직은 1889년에 종로4가 90의 집 두 채를 마련해 앞채에는 승완이, 뒤채에는 자신이 기거했다. 서울에 근거를 마련한 박승직은 약 10여 년 동안 전라도 영암, 나주, 무안, 강진 등지를 돌며 무명을 수집, 서울에 판매함으로써 부(富)와 상거래 경험을 축적했다. 이후 1898년경에 종로4가 15번지에서 ‘박승직상점’(朴承稷商店)을 개업했다. 강인한 체력을 소유한데다 근면 성실했던 그는 러일전쟁(1904~5) 직후인 1905년 무렵에는 동대문시장의 거상(巨商)으로 성장했다. 1905년 7월에는 종로 및 동대문일대의 포목상들을 규합해 자본금 7만8000원(圓)의 광장주식회사(廣藏株式會社)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동대문시장의 관리를 목적으로 종로구 예지동 4에서 설립됐는데 박승직은 취체역 및 주주로 참여했다. 설립 및 경영에는 장두현(張斗鉉), 최인성(崔仁成), 김태희(金泰熙), 김한규(金漢奎) 등이 참여했다.

장두현은 남대문통 1가 1의 113에 해동저(海東苧)와 동양목(東洋木)을 판매하는 흥일사(興一社)를 경영하면서 후일 김윤면(金潤冕)이 설립한 동양물산(東洋物産)의 취체역, 서울고무공업과 경성방직(京城紡織) 발기인, 조선상업은행(우리은행 전신) 취체역 등을 역임하는 등 대표적인 서민 출신형 기업가였다. 최인성은 종로 4가 100에서 주단포목상인 최인성상점(崔仁成商店)을 경영하는 한편, 수표동에 있는 동양흥산(東洋興産)주식회사의 사장을 겸한 동대문상인으로 박승직과는 절친한 사이다. 김태희도 동대문시장 포목상으로 추정된다. 이후부터 박승직은 서울지역의 상인을 대표하는 사업가 중의 한사람으로 부상해 1906년 1월에는 한성상업회의소(漢城商業會議所)의 설립발기인으로, 1907년에는 조선박람회 협찬회 역원에 추대되기도 했다. 박승직은 1907년 8월 30일에 최인성, 김원식(金元植), 최경서(崔景瑞)등 서울의 객주(客主) 출신 포목상들과 함께 공익사(共益社)를 설립했다. 김원식은 서린동에서, 최경서는 서대문에서 각각 점포를 경영했으며 장석우(張錫佑, 인천 박문여중고 설립자)는 인천 외리에서 포목상을 경영하는 인천지역 최대의 한국인 거상(巨商)이었다. 2세 경영 시작, 박두병 은행원 청산 가업 참여 공익사는 면포, 면사를 산지에서 직접 수입하여 공급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했는데 당시 최대 거래처는 일본 이또주상사(伊藤忠商事)였다. 공익사는 1910년에 이또주상사와의 합작기업으로 재출발했는데 영업종목도 종래 면사, 면포 외에 피혁제품(牛皮)과 콩(大斗) 무역으로 확대했다. 박승직은 1917년에 동대문시장 안에 곡물류 무역 및 정미업을 주종으로 하는 공신상회(共信商會)를 개설했으며 1916년에는 종로 4가에 박가분제조본포(朴家粉製造本鋪)를 개업, 여성용 화장품제조업에도 진출했다. 박가분 제조를 개시한 이유는 부인의 권유 때문이었다. 박가분은 당초 경기도와 강원도 일대에 공급됐으나 점차 소비자들의 반응이 좋아지면서 전국에 산재한 박승직상점 판매망을 통해 지방으로 확산됐다. 1920년에는 연지동으로 생산거점을 옮겼는데 당시 박가분 제조에 종사하는 여공만 30여명이었다. “박가분이 선풍적인 인기를 독차지하면서 판매고가 한창 올라갔을 때는 1926년부터 1930년 사이였다. 분 1갑 출고가격이 42전5푼이었으며 소매로는 50전씩 팔았다. 1상자를 분 20갑씩 단위로 포장했고 1궤짝에 50상자를 담았다. 이 기간에는 보통 평균 10궤짝씩 나갔다고 한다. 그러니까 1상자 가격은 8원50전, 1궤짝의 가격은 425원이었으니 평균 10궤짝씩 나갔다 하면 4250원이라는 엄청난 판매고를 낸 것이다”(『연강 박두병』, 74면) 그러나 1930년대 초부터 일본산 고급화장품이 유입되면서 매출이 줄어 박가분제조본포는 1937년에 문을 닫았다. 박두병(朴斗秉)은 박승직의 4남 6녀 중 장남으로 1910년 10월 9일에 서울 종로 4가 92번지에서 태어나 심상소학교와 경성중학교를 거쳐 1929년에는 경성고등상업학교에 진학했다. 상과를 지망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나는 나대로 자립하고 내가 살아가는 길을 경제라고 생각했다. -중략- 꾸준히 성실히 부지런히 일을 해서 富를 이룩하는 일은 매우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일이요, 한껏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됐다”(『연강 박두병』, 81면)

경성고상은 1922년 4월에 국립으로 설립됐는데 전교생의 대부분이 일본인으로 1932년 박두병의 졸업 당시 졸업생 84명중 한국인 학생은 17명에 불과했다. 박두병은 1932년에 조선은행에 취직했다. 조선은행은 1909년 7월에 ‘한국중앙은행 설립에 관한 협정’에 근거, 중앙은행으로 설립되어 1911년 3월에 조선은행으로 변경됐다. 그는 과묵하고 침착, 신중할 뿐만 아니라 겸손하여 은행원으로는 적격이었다. 윗사람들로부터 신임도 얻었다. 그곳에서 박두병은 구용서(한국은행 총재 역임)와 장기영(경제기획원 장관 역임), 백두진(국회의장 역임), 김영찬(상공부 장관 역임)등과 교분을 쌓는다. 구용서는 박두병의 경성중학교 선배이자 직장 상사였으며 장기영, 백두진, 김영찬 등은 그보다 2년 늦게 입사했다. 박두병이 은행원생활을 청산하고 가업(家業)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1936년 2월로 처음 관여한 곳은 박승직상점 이었다. 근대적 상업교육을 받은 박두병이 참여하면서 박승직상점의 경영도 서서히 근대화했다. 또한 박두병이 경영에 참여하면서 박승직상점은 은행권과도 가까워졌다. “김용관(박두병의 동기동창)은 해동은행이 재정파탄으로 1938년 1월에 한성은행(조흥은행)에 병합되자 그대로 한성은행에 근무하게 됐고 얼마 있지 않아 요행이도 연강(박두병의 호)의 상점과 나란히 건물이 붙어있는 동대문지점으로 오게 됐다. 그들은 자주 만나게 되었고 점심도 같이하는 때가 많았다. 때로 갑자기 자금이 필요하게 되면 연강은 김을 찾아가 말없이 손을 내밀었고 그러면 가능한 한 돈을 돌려주었다. 배급제로 전환하기 직전 그 낌새를 알아차린 매헌(박승직의 호)과 연강은 지점대리의 직함을 가지고 있던 김에게 자금 대부를 상의했다. 자그마치 50만 원(圓)의 거액이었다“(『연강 박두병』, P.128) 박승직상점은 1940년에 들어서면서 불황에 직면했다. 태평양전쟁 수행과 관련한 전시통제경제 때문이었다. 한편 박두병은 1941년에 소화기린맥주(昭和麒麟麥酒) 대리점을 개설했는데 배경은 다음과 같다.

1930년대 초까지 국내에는 ‘삿뽀로’(札幌), ‘기린’, ‘사꾸라’(櫻)등 일본산 맥주가 장악하고 있었는데 맥주소비가 점증하자 일본 맥주메이커들은 한국 내에서의 맥주생산을 검토했다. 일본경제권이 만주 등 대륙으로 확장되면서 이 지역의 맥주수요도 점증했으나 일본에서 맥주를 생산해서 중국대륙으로 수송할 경우 물류비 과다 등으로 채산성에 한계가 있었다. 대신 한국은 물이 좋을 뿐 아니라 부동산가격과 인건비 등이 저렴하여 경쟁력도 충분했다. 태평양전쟁으로 위기…해방 후 소화기린맥주 불하 1933년 12월 8일에 자본금 300만 원(圓)으로, 120만 원(圓) 불입 조건의 소화기린맥주가 일본 도쿄에서 설립됐다. 일본 기린맥주의 자회사로 1주당 50원씩 총 6만주를 발행했다. 기린맥주가 5만7000주를 소유한 반면, 한국인으로는 박승직과 김연수(삼양사그룹 창업자)가 각각 200주씩 보유했다. 소화기린맥주는 본사와 생산공장을 영등포에, 영업소는 남대문통에 두고 사업에 착수했다. 1934년 4월 13일부터 시제품을 생산, 4월 20일부터 ‘기린비루’란 상표로 시중에 공급했다. 이런 인연 때문에 박두병이 소화기린맥주의 대리점권을 확보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동생 우병(玗秉)에게 경영을 맡겼다. 당시는 중일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맥주 또한 배급제로 공급됐다. 일주일에 2회씩 배급차가 연지동 창고에 도착하면 이를 접객업소나 각 도매상에 공급하였는데 한번 입고된 물량은 2~3일 내에 전부 소진됐다. 박두병은 1945년 해방과 함께 서둘러 일본인과의 거래관계를 정리하는 한편, 상점문을 닫고 사태추이를 관망했다. 급작스런 해방으로 기업환경이 어떻게 조성될지 가늠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관망과 모색의 일주일이 지날 무렵, 영등포에 자리 잡고 있는 소화기린맥주주식회사의 자치위원회 사람들이 돌연 연지동으로 매헌(박승직)을 찾아왔다. -중략- 그들은 소화기린의 한국인 종업원들로서 자치위원회의 핵심위원들이라 했다. 연강(박두병)은 그들을 알지 못하고 있었으나 그들 가운데 최인철(崔寅哲)은 아우 우병과 진작부터 잘 알고 있었다.”(『연강 박두병』, P.140) - 이한구 수원대학교 경제금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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