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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 - 23] 새해맞이 행주 누리길

600년 도읍 품은 덕양산, 어제와 다른 새해가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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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07-308호( 박현준⁄ 2013.01.02 14:20:22

2013년 새해가 밝아왔다. 새해 첫날 아침에 뜨는 해를 맞이하는 일은 사는 일을 신선하게 만든다. 흔히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어제 뜬 해와 오늘 뜨는 해가 무엇이 다르냐고, 어제 진 해와 오늘 지는 해가 다른 것이 있느냐고. 사람 사는 일이란 무심히 살다 보면 ‘그 날이 그 날’인 나날의 연속이다. 사는 날을 7일씩 갈라서 ‘월화수목금토일’을 만든 이후 우리 마음은 요일에 따라 기쁘기도 하고 무겁기도 한 삶으로 색깔을 띠기 시작했다. 지는 해를 보며 한 해를 정리해서 실어 보내고, 새해 첫 해(Sun)를 보며 소망을 담는 일은 삶을 맛갈지게 한다. 올해는 인연이 된다면 가까운 산정에 올라 새 해(Sun)을 맞아 보자. 오늘 떠나는 길은 3호선 원당역에서 시작하여 덕양산(행주산성)을 오르는 아기자기한 길이다. 신원당, 화정, 행신 신도시의 동쪽 나지막한 구릉지를 이어 한강가 덕양산(행주산성)에 이르는 길이다. 지자체에서 기존에 있는 산길, 들길, 마을길, 개울길, 뚝방길을 이어 세금 안들이고 연결한 길이기에 정(情)도 가고, 행주산성은 해맞이 장소로도 알맞기에 이번에는 이 길을 걷는다. 연전(年前)에 필자는 행주산성에 와서 해맞이를 한 일이 있다. 출발은 3호선 원당역 1번 출구다. 출구를 나서서 전철 선로방향 앞으로 직진한다.(해맞이를 행주산성에서 할 분은 행주산성에서 해맞이를 한 후 역순으로 걸으시기를). 길은 약간 오르막인데 약 300m 전방 우측으로 ‘배다리酒박물관’이 있다. 5대째 이 지역 술도가(都家)의 명성을 이어 오는 배다리막걸리 도가에서 설립한 박물관이다. 언젠가 박정희 대통령이 한양골프장에서 골프를 끝낸 후 ‘실비집’이란 집에 들려 막걸리를 한 잔 하게 되었는데 그 때 이 막걸리를 맛본 후 맛을 들여 줄곧 마시던 막걸리라 한다.

박물관 2층에는 막걸리를 만들기 위해 사용하던 옛 물건도 전시되어 있고 술 만드는 과정도 재현되어 있다. 작은 식당도 있어서 간단한 안주에 막걸리도 마실 수 있다. 물론 실비는 부담이다. 박물관 뒷길 쪽으로 나오면 ‘사근절천’이라는 작은 개천이 있다. 개천길을 따라 다시 원당역 방향으로 돌아온다. 200여m 내려오면 좌측으로 행주기씨 묘역(幸州奇氏墓域)이 자리잡고 있다. 남쪽 묘역에는 조선초 정치가이자 청백리인 기건(奇虔) 선생 신도비와 묘역이 있는데 정부인(貞夫人) 풍산홍씨와 합장으로 모셔져 있다. 재실과 고양서원도 이곳에 자리하고 있고 행주기씨의 대학자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선생의 숭모비도 세워 놓았는데 철길 너머 북쪽 묘역에는 고봉의 숙부되는 기준(奇遵) 선생의 묘역도 있다. 박정희 대통령 ‘막걸리 향수’ 어린 배다리주 박물관 다시 원당역 3번 출구로 돌아온다. 휘어지는 도로가 남쪽으로 향하고 있다. 100여m 앞에 행주누리길 출발점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길은 산으로 오솔길이 나 있다. 누리길로 오르지 말고 잠시 직진한다. 왼쪽으로는 자비정사라는 근년에 세운 절이 있고 우측 산기슭에는 규모를 갖춘 어느 분의 묘역이 보인다. 앞쪽으로는 저 멀리 성라공원 테니스장이 자리잡고 있다. 이 곳 지명은 사근절 불당골이다. 지명이 말하듯이 이곳에는 절이 있었다 하는데 절터에는 테니스장이 자리하고 있어 이미 그 흔적은 사라졌다. 우리 땅 여러 곳에 사근절이라는 지명이 있다. 가까이는 서울의 사근동이다. 흔히 예전에 있던 절이 삭아서(퇴락하여) 사근절(삭은절)이 되었고 그것이 지명으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뭔가 개운한 설명은 아닌 것 같다. 이곳 불당골 절이 없어진 사연도 흔히 전설로 이야기하듯 절에 빈대가 많아 스님들이 절을 떠났고 절이 삭아 없어졌다 한다. 다행히 사근절 대신 자비정사라는 새 절이 이곳에 자리잡았으니 불당(佛堂)골은 역시나 불당골이다.

옆 산기슭에 자리잡은 묘역을 찾아간다. 고려말 조선초 정치가 정간공(靖簡公) 권희(權僖) 선생묘역이다. 선생은 적성 백석에 은거하고 계셨는데 태조의 청에 따라 3子 충(衷)과 4子 근(近)을 출사(出仕)케 하였다. 지금은 아버지 권희 선생보다 아드님 양촌 권근 선생이 세간에 더 이름을 얻었다. 묘역에는 신도비와 재실인 성산재(星山齋) 이외에 ‘권성의 사시발원비(權姓의 四始發源碑)’라는 비석이 있다. 안동권씨로부터 비롯된 4가지 시원(始源)을 적은 비석이다. 권희 선생이 조선 최초로 기로소(耆老所: 원로 자문기관) 멤버가 된 일, 권근 선생이 홍문관, 예문관의 대제학을 다 지낸 일(文衡), 권채(權採)선생이 호당(湖堂:독서당)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처음으로 받은 일, 성화보(成化譜)라는 족보를 처음 만든 일에 대한 자긍심을 적은 비석이다. 이제 산능선으로 올라 행주누리길로 들어선다. 작은 구름다리 건너 오르막길 오르면 고인돌(支石)이 자리잡고 있다. 성라산(星羅山) 고인돌이다. 지구상에 우리나라만큼 많은 고인돌이 있는 나라가 없다. 고인돌 형태는 두 가지인데 상(床)처럼 괴는 돌이 있는 형태를 북방식(北方式), 돌 자체를 흙 위에 그냥 놓은 것처럼 보이는 형태를 남방식(南方式)이라 한다. 일인(日人)학자가 지은 이름이다. 문제는 남과 북에 두 형태가 혼재한다는 점이다. 북한에서는 북방식을 오덕형(五德形), 남방식을 침존형(沈存形)이라 부른다고 한다. 합리적인 이름인 것 같다. 성라산 고인돌은 남방식(침존형)이다. 기원전 수세기 전 청동기시대 유적인데 이 지역에는 오래 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터를 잡고 살았던 것이다. 고인돌 지나 잠시 오르면 성라산 정상으로 향하는 도로를 만난다. 누리길은 이 도로가 아니고 좌측 산허리를 감도는 길이다. 성라산(星羅山)은 나라를 위한 제사를 지냈다 해서 국사봉(國祀峯)이라고도 하며, 고양군 옛 지도에는 별아산(別峨山, 또는 베라산)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109m밖에 안되는 낮은 산이지만 이 지역의 진산(鎭山)이다. 출입이 통제되어 있는 정상에는 수 기(基)의 고인돌이 있다고 한다. 성라공원 위를 끼고 산길을 감돌면 6각 정자가 나타난다. 정자방향으로 가지 말고 하산길로 방향을 잡는다. 잠시 후 성라산 약수터를 지나 작은 돌무더기가 있는 서낭당(성황당)을 지난다. 민초들이 이 고갯길을 넘으며 다리에 탈나지 말라고 돌 하나씩 얹고 지나갔을 것이다. 당집이나 당목(堂木)이 있으면 좋으련만 그냥 돌무더기만 조그맣게 쌓여 있다. 기원전 고인돌 유적 가득한 행주누리길 서낭당고개를 내려오면 잔디광장이다. 조금 더 내려가면 작은 포장도로를 건너게 된다. 자연부락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홍도동으로 넘어가는 길이다. 길건너 나지막한 구릉을 오른다. 아래로는 배밭이 여기저기 펼쳐져 있다. 서울 동쪽 먹골배가 유명하듯이 이곳 배도 물 많고 달기가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다. 가을날 이 길을 걷게 되면 모름지기 맛 한 번 볼 일이다. 구릉을 내려가면 경주이씨 세장묘(世葬墓)가 자리하는데 토지신(土地神)께 인사드리는 제석(祭石)이 먼저 길손을 맞는다. 이 땅 한국인들은 제 산에 묘를 써도 제 것이라고 외람되게 굴지 않았다. 산왕대신(山王大神)이나 토지지신(土地之神)께 먼저 아뢰고 묘도 썼으며 성묘를 와도 먼저 이 분들께 제물을 올렸다. 백제의 무령왕도 능묘(陵墓)를 쓸 때 토지신에게 땅을 사서 능묘를 쓴 매지권(買地券)이 남아 있으니 자연을 대하는 이 땅 선배들의 겸허함에 머리 숙여진다. 경주이씨 묘역을 지나 왼쪽으로 잠시 가면 길은 마을길로 접어든다. 비닐하우스도 있고 밭도 있고 자그마한 개울 뚝방길을 걸으면 작은 구릉으로 오르게 된다. 지렁산이다. 정상에는 옛 군부대 건물이 남아 있다. 이곳에도 남방식 지석(支石)이 있다. 1991년 서울대박물관에서 조사를 하여 3기의 지석묘를 찾았다 한다. 흩어져 있는 돌들도 아마 지석의 흔적일 것이다. 이제 능선길을 따라 잠시 나아가면 아파트단지가 있는 큰길에 닿는다.

앞으로는 백양고등학교가 있는데 길을 왼쪽으로 틀어 100여m 나아가면 장미란체육관을 만난다. 체육관 앞에는 장미란 선수가 역기를 어영차~ 드는 모습의 커리커쳐를 재미있게 돌에 새겨 놓았다. 한 시대를 빛냈던 이들을 이렇게 기리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체육관을 좌로 끼고 다시 마을길로 들어간다. (장미란체육관을 돌아볼 필요가 없으면 지렁산에서 좌측 능선길로 내려 오실 것) 잠시 마을길을 걸으면 ‘광동꽃농원’이라는 간판이 붙은 가건물이 보인다. 여기에서 우측길로 90도 꺾어 우회전이다. 이내 길은 두 갈래로 나뉘어지는데 우측 흙길로 접어든다. 앞에는 어느 회사건물처럼 보이는 2층 건물이 보인다. 이곳이 베다테마공원이다. 오늘 갈 길은 이 테마공원 좌측 펜스를 끼고 도는 길이다. 테마공원의 인조잔디구장도 보이고 목각인형 행렬도 보이고 돌절구들도 만난다. 펜스가 끝나는 지점에서 도내로에 닿는데 옆으로는 성사천이 흐른다. 여기에서 봉대산 정상까지는 3.51km이다. 이 길을 따라 저 멀리 보이는 아파트단지 서정마을 방향으로 간다. 아파트가 시작되는 곳부터는 개울옆 산책로가 잘 가꾸어져 있어 걷기에 무리가 없다.

성사천 산책로가 끝나는 지점 길은 경의선 철도 위를 큰 아치형으로 넘는 강매교로 이어진다. 아래로는 KTX 기지가 넓게 펼쳐져 있다. 강매교를 넘으면 우측으로 기와건물 정자와 재실이 보인다. 정자의 이름은 매화정(梅花亭)이다. 이곳은 선거이(宣居怡) 장군의 후손인 보성 선씨가 대대로 살던 곳인데 매화정 이름을 따 매화정마을이라 불렀다. 장군은 무과에 급제하여 전라수군절도사로 이순신 장군과 함께 해전을 치뤘으며 전라병사로 권율 장군을 도와 행주대첩에서 공을 세운 분이다. 그러니 그 후손들이 행주산성 앞 매화정마을에 자리잡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순신 장군과 해전 치른 선거이 장군의 후손 마을 이제 길을 건너 봉대산(烽臺山)으로 오른다. 일명 강구산(江口山:강 입구에 있는 산이라서 유래, 江古山으로 부르기도 함)이다. 산은 높지 않아 96m밖에 되지 않는데 주위에 높은 산이 없어 시야는 넓게 펼쳐진다. 그러기에 일찍이 봉수대(烽燧臺)가 자리잡았다. 산 아래로 흐르는 큰 하천이 창릉천이다. 북한산에서 발원한 하천인데 본래는 덕수천(德水川)이라 부르다가 예종과 안순왕후의 능(陵)인 창릉(昌陵)의 이름을 따서 이제는 창릉천이라 부르고 있다. 이 창릉천에 있던 포구(浦口) 이름이 해포(醢浦)였다.

따라서 이 곳 봉대산 봉수도 해포봉수로 기록되고 있다. 김정호 선생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해포봉수는 (군) 서남 25리에 있다(醢浦在西南二十五里)고 적고 있다. 우리나라 다섯 봉수길에서 제3라인으로 평북 강계(江界)에서 내륙을 타고 내려와 도라산(장단)~대산(파주)~소질달산(일명 독산, 고양)~해포~무악동봉~목멱산(남산)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봉대산에 오르니 덕양산 너머로 2012년 해가 진다. 아쉬움도 그리움도 한 해 힘들었던 모든 기억도 지는 해에 담아 보낸다. 봉대산을 내려오는 하산길에는 조선초 학자이자 정치가인 서호산인 신효(申曉) 선생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누리길 이정표가 서 있는데 행주산성이 2.1km 남았음을 알리고 있다. 앞쪽 창릉천에는 해묵은 돌다리가 걸려 있다. 향토유적 33호로 지정되어 있는 고양시에서 가장 오래 된 다리 강매동석교이다.

이제는 서울과 일산을 연결하는 길이 여러 개 뚫려 있지만 조선시대 강 가까운 곳에 살던 민초들이 서울로 갈 때 이용하던 중요한 다리였다. 본래는 나무다리로 해표교(醢浦橋)라 불렀는데 다리 옆에 써 있는 ‘江梅里橋 庚申新造’라는 각자(刻字)를 보면 1920년에 새로 돌다리를 놓았음을 알 수 있다.이제는 다니는 사람이 없으니 그 때의 왁자지껄하던 해포포구와 부지런히 왕래했을 사람들이 그리워진다. 다리는 인적없는 개울에 제 혼자 눈에 덮혀 있다. 행주산성을 향해 뚝방길로 향한다. 창릉천과 성사천이 만난다. 이곳 마을 이름이 강구산(江口山: 강 입구에 있어서, 또는 江古山)마을이다. 북쪽 매화정마을과 합쳐 강매리(江梅里)가 되었다. 뚝방길 1km 남짓 걸어서 자유로 아래 굴다리를 지나면 행주산성 마을이다. 마을길 지나 행주산성으로 오른다. 산이름으로 말하면 덕양산(德陽山)이다. 124m의 나지막한 산이지만 북한산, 아차산, 관악산과 함께 서울을 외겹으로 둘러싸고 있는 외사산(外四山)이다.

정상으로 향하는 길 왼쪽으로는 후기신라시대의 토성이 남아 있다. 서북쪽으로부터 접근하는 적을 막으려고 산기슭 경사면을 가파르게 한 토성(土城)이다. 행주산성이라는 이름은 이 토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상에는 행주대첩비가 하늘을 찌르며 우뚝 솟아 있다. 1593년 권율장군을 비롯하여 조선의 장수들은 2,300명의 군사로 행주산성에 진을 친다. 이에 맞서 행주산성을 공격한 왜군은 무려 30,000명. 9차에 걸친 무차별 공격도 조선군의 사기 앞에는 당할 재간이 없었다. 얼마나 악착같았던지 부녀자들이 치마폭에 돌을 날라 투석전을 도왔기에 행주치마라는 말이 생겼다는 일화도 이날의 전투에서 비롯된 것이다.

전투는 해가 넘어가면서 끝났다. 이 전투가 한산도대첩,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기록된 행주대첩이다. 이날의 기록을 담아 세운 비(碑)가 행주대첩비인데 선조때와 헌종때 각각 세웠다. 옛비는 보호를 위해 비각을 지어 비바람을 피하게 했고 새로이 현대적 대첩비를 세웠다. 임진왜란 3대 대첩 행주대첩의 교훈 동국여지승람에는 이 곳에 소화사(小華寺)란 절을 기록하고 있다. 소화사는 군 남쪽 15리 호숫가에 있다(在郡南十五里湖上). 그러면서 고려때 인분(印份)이라는 이의 시를 소개되었다. “발(簾) 밖에 파초 우니 산에 비내리는 줄 알고(蕉鳴箔外知山雨) 봉우리 위 돛 보이니 바닷바람이 보이네(帆出峰頭見海風)“행주강변 소화사에서 파초잎에 비내리는 소리를 발을 격(隔)해 듣고 있는 시인의 모습이 역력하다. 그러다가 문득 밖을 바라보니 바닷바람 타고 한강으로 올라오는 돛배가 보인다. 종단에서 발행한 ‘한국의 사지’에는 소화사터가 덕양정에서 강가로 100m 정도 아래에 있다 하는데 팬스가 쳐져 있어 먼 발치로만 바라본다. 그런데 고양군 옛지도에는 이곳에 위어(葦魚)라는 글씨를 써 놓았다. 갈대 사이에 서식하는 물고기인데 발음이 어렵다 보니 민간에서는 ‘웅어, 우여, 웅에’ 등으로 불러 왔다. 경도잡지(京都雜誌)에는 ‘한강 하류 행주에서 봄 끝무렵 초여름에 난다(産於漢江下流幸州春末夏初)고 하였다. 궁중에서 즐기는 어종이라서 사옹원(司饔院)은 이 지역에다가 위어소(葦魚所)를 설치하고 웅어를 조달하였다. 봄이면 웅어잡이가 얼마나 장관을 이루었는지 겸재 정선은 웅어잡이를 ‘杏湖觀漁’라는 그림에 살려 놓았고, 김득신은 웅어 팔러 온 어부의 모습을 그림에 남겨 놓고 있다. 이제는 거의 씨가 마른 웅어. 능곡역 앞 어느 회집에서는 봄이면 웅어 음식을 팔고 있으니 구미가 당기는 분은 들려 보시기를.

이제 행주산성을 나선다. 큰길 따라 내려오면 좌측 고개 넘어 강가에 새로 단장한 행주산성공원이 있다. 조용하게 강을 바라 볼 수 있고, 추강 남효온, 석주 권필, 석탄 이신의 선생의 시비가 있다. 이곳을 돌아나와 큰길을 더 내려 가면 일송정이라는 음식점 간판 안쪽으로 행주서원을 재현해 놓았다. 또 하나 들려 보아야 할 곳이 있다. 서원에서 다시 큰길로 잠시 내려가면 고창풍천장어라는 음식점이 있다. 이 골목길로 구릉지 정상에 오르면 1910년에 세운 오래된 행주성당이 자리잡고 있다. 신자가 아니라도 성당 안으로 들어가 보자. 100년을 넘어 옛 세상으로 가 가톨릭신자가 아닌 필자도 기도 드린다. ‘2013에는 온 세상에 기쁜 일 가득하게 해주십시오’ - 이한성 동국대 교수 교통편 지하철 3호선 원당역 1번 출구 걷기 코스 원당역 ~ 배다리박물관 ~ 행주기씨묘역 ~ 불당골 ~ 성라산 고인돌 ~ 경주이씨묘역 ~ 지렁산 ~ 베다골 ~ 성사천 ~ 강매교 ~ 매화정 ~ 봉대산 ~ 강매동 석교 ~ 행주산성(토성/대첩비/소화사지) ~ 행주공원~ 행주서원~ 행주성당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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