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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옛 절터 가는 길 - 26] 강화 용장사터 ~ 고려산길

팔만대장경 ‘불편한 진실’…“세종이 일본에 주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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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14호 박현준⁄ 2013.02.18 11:29:13

팔만대장경의 궁금증을 갖고 세 번째 강화도 길에 나선다. 선원사길(옛 절터 가는 길 8)과 충렬사길(옛 절터 가는 길 9)에 이어 찾아가는 용장사(龍藏寺)길이다. 오늘의 출발점은 강화산성의 서문이다. 강화터미날로 오는 버스길은 신촌·홍대앞에서 3000번, 영등포·송정역에서 88번, 일산에서 96번, 부평에서 90번 등이 있다. 이 중 96번 버스는 서문까지 운행하고 다른 버스들은 터미널까지만 간다. 서문에 이르니 첨화루(瞻華樓)라 쓴 문루(門樓)가 우뚝 솟아 있다. 고려는 몽고의 1차 침략 후 곧 닥칠 2차 침략에 대비해 무신정권의 실력자 최우(崔瑀, 후에 崔怡로 개명함)가 고종을 종용해 1232년(고종 19년) 강화천도를 단행했다. 그러면서 방어에 대비했는데 이듬해(1233년)부터 내성(內城), 중성(中城), 외성(外城)을 쌓아나갔다. 이 때 쌓은 내성을 근간으로 해 조선조 19대 숙종은 석성(石城)으로 견고히 산성을 구축했다. 만일에 대비한 보장지지(保障之地)를 확고히 하려는 목적이었다. 이 때 동서남북 4개의 큰 문이 세워졌으며 첨화루(瞻華褸)라는 편액은 강화유수로 있던 민진원(閔鎭遠)의 글씨이다. 이 해가 1711년(숙종 37년)이니 서울의 북한산성이 세워진 해와 같은 때이다.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는 국화저수지 700m를 알리고 있다. 강화고등학교를 지나면 갈림길이다. 우측 ‘고비고개로 34번길’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앞쪽으로 국화저수지 뚝이 보인다. 제방위로 올라서면 시야가 트이면서 아름다운 호수가 펼쳐진다. 멀리 정상에 안테나가 서 있는 고려산의 모습이 고즈넉하게 보인다. 국화저수지는 어느 계절이나 아름답다.

고려의 국운 좌우한 대장경, 그것을 보관한 용장사 저수지 가장자리로는 나들길이 조성되어 있어 호수를 감상하며 한 바퀴 돌 수 있다. 호수가를 돌아 북녘 용장마을로 향한다. 마을 북쪽 산자락에는 군부대가 자리잡고 있는데 그 옆으로 ‘펜션 깔끄막희컨집’이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깔끄막희컨집? 이 무슨 수수께끼 같은 말일까? 이 곳 펜션 앞을 지나 산 쪽으로 잠시 들어가면 뉘집 재실(齋室)처럼 보이는 일자(一字) 기와집 한 칸이 서 있다. 나무창살 안으로는 네 개의 정려(旌閭)문이 벽에 매달려 있다. 효자 김보경지문(金普暻之門), 충신 김현경지문, 열녀 정부인 김씨지문(貞夫人 金氏之門), 효부 담양전씨지문(孝婦 潭陽田氏之門)이다. 모두 김씨 집안 정려문인데 효자, 충신, 열녀, 효부를 망라했으니 정려문의 총집합이다. 안타깝게도 안내판이 없어 어느 집안의 내력인지 알 수가 없다. 이 정려각을 지나 잠시 산 쪽으로 나아가면 엎어놓은 밭이나 마을 담장 밑, 길가 어디를 막론하고 무수히 많은 기와편이 발길에 채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간간히 전성기의 비취색 청자편도 눈에 띄었다. 산 아래 밭이나 마을(용장마을)이나 모두 고려 때 절 용장사가 자리했던 절터였던 것이다. 용장사(龍藏寺), 어떤 절이었을까? 동국여지승람 기록에 의하면, ‘옛터는 강화부 서쪽 4리에 있다. 고려 공민왕이 선위 받았는데 충정왕이 이 절에서 양위했다.(古基在府西四里 高麗 恭愍王位 忠定王遜于是寺)’라는 기록이 있다. 양위한 충정왕은 이 절에서 머물다가 끝내는 15살에 살해당한다. 공민왕은 형님 충혜왕(28대)의 작은 아들 충정왕으로부터 양위 받고 15살의 어린 조카를 살해했으니 세조와 단종 사이의 일이 불과 100년 전에 이 땅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눈 덮인 용장사터는 이때의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요하기만 하다.

그러나 용장사를 눈 여겨 봐야 할 또 다른 사실이 있다. 고려말 삼은(三隱) 중 한 분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 선생이 남긴 용문산 용문사 대장전기(砥平縣 彌智山 龍門寺 大藏殿記)에는 ‘대장경 한 부는 모관 모가 시주한 것이다. 처음에 강화부 용장사에 두었다.(大藏一部 某官某之所施也 始置于江華府龍藏寺)’라고 기록하고 있다. 대장경 한 부가 용장사에 있었다는 것이다. 더욱 상상력을 자극하는 일은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이다. 고종 38년(1251년) 9월 기사에 임금이 ‘성 서문밖 대장경판당에 행행하여 백관을 거느리고 행향(불공)드렸다는 것이다.(幸城西門外 大藏經板堂 率百官行香)’. 서문 밖 대장경판당은 어디에 있었을까? 고려의 중성(中城) 서문의 이름은 선기문(宣祺門)인데 속칭 승거문(僧居門)으로 불렸다는 사실이 속수증보강도지(續修增補江都誌, 1870년)에 기록되어 있다. 고종은 아마도 선기문(승거문) 밖 대장경판당에 들렸을 것이다. 그런데 강화도 역사를 기록한 강도지(江都誌)에는 용장사는 지금의 승거문(龍藏寺 今之 僧居門)이라 했으니 결국은 대장경판당은 용장사일 가능성이 크다. 조선 개국 후 이태조가 서울 지천사(支天寺)로 가져 왔다가 해인사로 보낸 팔만대장경은 용장사에 보관되어 있던 것이 선원사를 거쳐 서울로 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용장사(龍藏寺), 용을 보관한 절이라 하니 그 용(龍)은 고려의 국운을 좌우할 만한 대장경이 아니었을까? 지난 봄 고려산 진달래를 보러 갔다가 국화리 용장마을 비닐하우스에 설치한 간이식당에서 잔치국수를 먹은 일이 있다. 50대 내외가 식당을 운영했는데 바깥양반과 이야기 끝에 용장사터 이야기로 화제가 번지니 그 분이 할아버지께 들었다는 옛이야기를 풀어 놓으신다. 국화저수지 끝 용장마을 아래에 ‘싱구문’이 있었다는데 도성에서부터 거기까지 집들이 이어져 있어 비가 내려도 추녀 끝으로 걸으면 옷 젖는 일이 없었다는 할아버지들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이다. 당시 강화 인구 30만명, 용장사 선기문의 위용 그랬을 것이다. 과장된 말이겠으나 고려 적에 30만 인구가 강화에 살았다 하니 얼마나 많은 집들이 있었겠는가? 그 아저씨가 구전(口傳)으로 전해들은 ‘싱구문’이란 선기문(승거문)이 분명하다. 선기문은 국화저수지 서쪽 용장사터 앞에 있었던 것이다. 700년 너머 저편에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새로 새긴 대장경 앞에 향불 올리는 고려 고종의 모습을 상상하며 절터에서 내려온다. 고려의 생명 같았던 대장경이 조선에 와서는 어떤 대접을 받았을까? 우리에게 의외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이 있다. 팔만대장경 이외에 전해지던 대장경을 일본에 주고 팔만대장경마저 일본에 주려 했던 조선의 임금이 계셨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 그 분이 누구인지를 알면 아마도 충격일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4년(1422년) 11월 기사를 보면 일본 국왕과 그 어머니가 승려 규주(圭籌)를 보내어 대장경을 청하였다. 1년 뒤 일본은 135명이라는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해 토산품을 바친다. 이에 팔만대장경을 제외한 삼종(三種)의 대장경을 일본에 넘겨주었다. “임금이 말씀하시기를: 국왕이 요구했으나 대장경판(大藏經板)은 우리나라에 오직 한 본 밖에 없으므로 요청에 응하기 어렵고, 다만 밀교대장경판(密敎大藏經板)과 주화엄경판(註華嚴經板)과 한자대장경(漢字大藏經)의 전부를 보내고자 한다.” (上又曰: 國王所求大藏經板, 我國唯有一本, 難以塞請, 但欲以密敎大藏經板、註華嚴經板、漢字《大藏經》全部送之.) 이렇게 일본으로 간 세 종(種)의 대장경은 그 후 화재로 소실되었으니 인류(人類)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재(灰)가 되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어지는 기사(記事)를 보자. “임금께서 대장경판을 무용지물로 여겨, 이웃나라에서 청구하니 처음에는 이를 주려고 했는데, 대신들이 논의해 말하기를, ‘경판은 비록 아낄 물건이 아니오나, 일본의 요구가 그침이 없고 지금 만약에 일일이 따르다가는, 나중에 줄 수 없는 물건을 청구하면, 이는 먼 앞날을 고려하는 것이 못됩니다’.(上以大藏經板無用之物, 而隣國請之, 初欲與之, 大臣等議曰: 經板雖非可嗇之物, 日本之求無已, 今若一一從之, 後有求其不可與之物, 則非所以慮遠也)” 다행히 지금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국보 32호이며 세계문화유산 팔만대장경은 일본에 주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무용지물이지만 일본의 요구를 일일이 들어주다가는 나중이 곤란하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 때 팔만대장경을 일본에 주려했던 분이 세종대왕이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역사를 읽으며 필자는 생각한다. 사람은 흰 사람과 검은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흰 빛이 좀 더 많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는 것이라고.

이제 용장사를 뒤로 하고 고려산(高麗山)으로 발길을 향한다. 고려산에는 동쪽에 청련사(靑蓮寺), 북쪽에 백련사(白蓮寺), 서쪽에 적석사(積石寺)가 자리잡고 있다. 마을 끝에서 길은 둘로 갈라진다. 우측 ‘고비고개 188번길’로 방향을 잡는다. 청련사로 가는 길이다. 포장된 강화 농가 마을길을 지나는데 한없이 편안하다. 좌측으로 보이는 양성이씨 재실 영모재(陽成, 永慕齋)를 지나면 길은 조금씩 오르막이 된다. 그러나 걱정할 일은 없다. 잠시 후 산기슭에 고즈넉하게 자리잡은 절집이 눈 밭 고요 속에 앉아 있다. 조선 세종, 팔만대장경 제외한 삼종 일본에 줘 300년이 넘는 노거수 몇 그루가 길손을 맞는다. 법당은 한글로 큰법당이라 쓰고 주련도 한글로 써 달았다. ‘온누리 티끌 세어서 알고/ 큰 바다 물을 모두 마시고...’. 법당 안으로 들어간다. 보물 1787호로 지정된 고려불상 목조아미타상이 정좌해 계시고 인천시 문화재로 보호받고 있는 삼장탱(三藏幀), 현왕탱(現王幀), 감로탱(甘露幀) 등 벽을 장식한 불화들이 있다. 감로탱은 죽은 자의 죄를 사(赦)하여 천도하는 내용인데 칠불(七佛) 아래로 아미타불과 여러 보살들, 그리고 인간세상과 지옥 세상 등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다. 이 그림에 그려진 지옥을 보면 정말 가고 싶지 않구나. 새 해에는 죄를 좀 덜 짓고 살아야겠다.

법당을 나오면 우측 언덕 위에 자그마한 부도 두 기(基)가 어깨를 걸고 있다. 은화당(恩華堂)선사와 당화당(唐華堂)선사의 부도인데 내력은 알 수 없다. 이제 겨울에도 얼지 않고 나오는 감로수 한 바가지 마시고 등산로 표지를 따라 고려산 방향으로 향한다. 등성이(119표지 고-1 위치)에 올라 서면 갈 길은 고려산과 백련사로 갈리어진다. 백련사로 향한다. 백련사까지는 산허리를 감돌아가는 1.2km의 길이다. 눈이 발목까지 빠진다. 인적은 없고 간간히 산새의 푸덕거림만 있다. 잠시 후 백련사로 가는 도로를 만나고 백련사가 축대 위에 정갈하게 앉아 있다. 450년이 넘은 노거수(老巨樹)가 수문장처럼 길손을 맞는다. 층계를 오르면 대웅전 대신 극락전(極樂殿)이 자리잡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곳 백련사는 석가모니불 대신 아미타불을 주불(主佛)로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법당 안으로 들어가니 아미타불이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을 협시보살로 해서 정좌해 계신다. 그런데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있다. 1989년 4월 10일 이 곳 백련사 고려 철제아미타불(鐵製阿彌陀佛)은 보물 994호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 해 12월 11일 아미타불은 도난당했다. 백련사 안내판에는 보물이라 소개하고 있으나 지금 모신 아미타불은 새로 모신 부처님이다. 승단(僧團)에는 바라이죄(波羅夷罪)라는 것이 있다. 그 중 하나가 훔치는 죄인데. 이 죄를 지으면 더 이상 승단에 머물지 못하고 떠나야 한다. 속세 사람이 이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인간세상을 떠나야 할 것이다. 이제라도 바라이죄를 지은 사람은 제자리에 돌려놓아 주십시요!

잠시 순조 6년(1806년) 세운 서산대사의 6세손 의해당 처활(義海堂 處活) 대사의 부도를 둘러보고 노거수 앞으로 돌아온다. 고려산 등산길은 이곳에서 시작된다. 잠시 오르면 산 정상에 자리한 보호시설로 오르는 도로를 만난다. 도로안내판에는 백련사 0.7km, 고려산 정상 0.6km라고 적혀 있다. 아쉽지만 이 도로를 통해 고려산 정상으로 향한다. 고려산(高麗山)을 온전히 고려산이게 하는 오련지(五蓮池)의 자취를 더듬기 위해서이다. 300m 정도 오르면 우측 국가시설물 앞으로 오련지(五蓮池) 안내판이 서 있고 새로 만들어 놓은 작은 연못이 있다. 오련지는 출입금지 지역인 산 정상에 있어 뜻있는 이 지역 분들이 이곳에 오련지를 살려 놓은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벽안(碧眼)의 인도승려 천축조사(天竺祖師)가 중국 동진(東晋)으로부터 장수왕 4년(416년) 우리나라 땅에 절을 세우려고 왔다 한다. 그 때 고려산 정상에 오르니 연못에 5색의 연꽃이 피어 있기에 그 잎을 날려 떨어지는 자리에 5개의 절을 세웠다 한다. 그 절이 청련사(靑蓮寺), 적련사(赤蓮寺), 황련사(黃蓮寺), 백련사(白蓮寺), 흑련사(黑蓮寺)인데 지금은 청련사, 백련사, 적련사(적석사)만 남았다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고려산은 부 서쪽 5리에 있는 진산(鎭山)인데 국정사(國淨寺), 적석사(積石寺), 월명사(月明寺), 홍릉사(弘陵寺), 백련사가 기록되어 있다. 국정사는 전등본말사지에 따르면 청련사의 옛 이름이다. 황련사의 옛터는 혈구산에 남아 있다. 이런 연유로 고려산의 옛 이름이 오련산(五蓮山)이었는데 고려 망명정부의 진산이었기에 후에 고려산(436m)이 되었다 한다.

오련지를 떠나 고려산 정상으로 향한다. 길가 버들강아지가 눈 속에서도 싹눈을 키우고 있다. 겨울에는 결코 봄이 올 것 같지 않아도 봄은 아무도 모르게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 이치도 이와 같겠지. 정상 앞에 오르니 국가시설물이 길을 막는다. 넓은 헬리콥터장에서 서쪽으로 내려가 외포리를 바라본다. 시야가 눈이 시리다. 봄이면 고려산 서북쪽 이 곳 능선이 진달래밭이다. 이제 3개월 되면 자홍이 능선을 덮을 것이다. 통상 산객들이 다니는 나무펜스를 돌아 고려산 정상으로 향한다. 적석사 방향 안내판을 따라 가면 정상에 닿을 수 없다. 정상 0.6km, 고비고개 1.2km 안내판이 서 있는 능선에 닿으면 정상까지는 잠시길이다. 정상을 돌아 고비고개로 내려간다. 1.2km의 가파른 길이다.

고려산, 신산한 삶 마감한 고종의 홍릉 자리해 고개에 닿으면 길 안내판이 서 있는데 앞길은 혈구산, 좌로는 국화학생야영장 1.0km, 우로는 오상리 고인돌 방향을 가리킨다. 호젓한 강화의 옛길을 걸어 학생야영장에 도착한다. 이곳이 옛 홍릉사터인데 이제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 좌측으로 홍릉 300m를 가리키는 안내판과 만난다. 약간은 숨가쁜 길 300m 위에는 고려 강화 망명정부의 신산한 삶을 산 고종의 홍릉(弘陵)이 자리잡고 있다. 고려 23대 왕 고종은 재위 46년 동안 무신정권 최씨들에게 눌려 살다가 1259년 6월 30일 승하해 이곳에 묻혔다. 남한에는 고려 임금 세분의 능이 있는데 희종(熙宗)의 석릉(碩陵), 공양왕의 고릉(高陵)과 고종의 홍릉이다. 이 능을 누가 왕릉이라 하겠는가? 사대부의 묘보다 작고 초라하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부 서쪽 6리에 있는데 이름은 홍릉이라 했다(在府西六里號弘陵). 잊혀져 있다가 조선 현종 때 강화유수 조복양(趙復陽)이 다시 봉분했으니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동사강목(東史綱目)을 지은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선생은 고려산과 홍릉의 감회를 이렇게 읊었다. 고려산 봉우리에 낙조는 비치는데(高麗峰頭夕照明) 조그만 비 하나가 옛 서성에 묻혀 있네(短碑埋沒古西城) 전왕의 은덕을 유민들이 못 잊어서(遺民不忘前王德) 한 조각 산에다가 고국 이름 남겼다네(一片山存故國名) 발길 돌려 학생야영장을 지나 국화저수지 앞 국화2리로 돌아온다. 눈밭에 고라니 발자국이 어지럽다. 마을회관 앞은 버스 정류장인데 버스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회관 옆 산골휴게소에 버스시간표가 있으니 참조하시라. 강화산성 서문까지 걸어도 1km 남짓이니 걸어도 힘든 일은 아니다. 오늘은 다행히 버스를 타고 터미널로 돌아와 풍물시장으로 향한다. 매콤한 생선찌개로 안주 삼아야겠다. - 이한성 동국대 교수

교통편 신촌, 홍대앞 3000번 버스 ~ 강화터미날 / 영등포, 송정역 88번 버스 / 일산, 김포가두 96번 버스 / 부평 90번 버스 걷기 코스 서문 ~ 국화저수지 ~ 용장사터 ~ 청련사 ~ 백련사 ~ 오련지 ~ 정상 ~ 고비고개 ~ 학생야영장 ~ 홍릉 ~ 국화2리 ~ 터미널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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