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산성으로 가는 버스는 잠실역에서 30-5번, 둔촌역에서 1번 버스가 있다. 버스는 올림픽공원과 둔촌동을 지나 하남의 광암동에서 향교고개(향여고개)를 넘는다. 고개를 넘으면 낚시터로 유명한 저수지가 있고 다음 정류장이 이성산성입구이다. 이성산성(二聖山城)은 의외로 이 지역 가까이 사는 이들에게도 생소하다. 산성에 오르기 전 옛사람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련다. 옛 광주(광주, 하남, 남한산성, 성남)지역의 역사지리를 정리한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 헌종 때 홍경모 선생 저술) 잉적(賸蹟)조에 이성산성에 대한 기록이 전한다. 500년 한성 백제의 숨결 담긴 이성산성 “온조고성이 서부면 금암산 북쪽 10여리에 있는데 우뚝한 흙산을 이성산성터라 하며 지금도 완연하다. 세상에 전하기를 온조 초에 대화산 남쪽에 도읍을 정하려고 성터를 둘러봤는데 지금 도척면이 그곳이다. 이성(二聖)이란 이름은 여기에서 생긴 것 같다.(溫祚故城在西部金岩山北十餘里 突起爲土山名二城山城址至今宛然 俗傳溫祚初欲定都於大華之南周度城址 今之都尺面是也 二聖命名似由於次)“ 이렇게 전해지는 이야기의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 13년을 보자. ‘내가 어제 나가 한수 남쪽을 둘러보았더니 땅이 기름져, 그곳에 도읍해 영구히 안정된 계책을 도모하는 것이 좋겠다.’ 7월에 한산 아래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 백성을 옮겼다.(予昨出巡觀漢水之南 土壤膏腴宜都於彼 以圖久安之計 秋七月就漢山下立柵 移慰禮城民戶) 이렇게 온조는 수도 위례성을 옮겼다. 옮긴 새 도읍(都邑)이 이른바 하남 위례성인데 삼국사기에는 그 위치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 결과 오랜 동안 위례성을 직산(稷山, 천안 북면 위례산 주변)으로 비정해 왔다. 고려사지리지, 삼국유사,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동사강목, 성호사설, 연려실기술... 조선 중기까지 모든 책은 위례성의 위치를 충청도 직산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누대에 걸친 통설에 도전장을 낸 이가 있었다. 다산 정약용(丁若鏞). 선생은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한강 인접한 땅의 남북(漢水逼近地 南北)’ 즉 광주고읍(지금의 하남 춘궁동) 지역을 위례성이라 주장했다.
이 설은 해동역사를 지은 한치윤의 조카 한진서(韓鎭書)의 해동역사속(海東歷史續, 해동역사 부속 지리서)에서 지지를 받았고, 고산자 김정호, 천관우, 이병도, 일본인 금서룡(今西龍) 등 많은 학자들이 위례성을 하남지역으로 비정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심지어 윤병무 교수 같은 분은 위례성을 이성산성으로 주장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하남 춘궁동, 이성산성 지역이 온조의 위례성이 맞는 것일까? 이제 이성산성과 동사(桐寺)터를 둘러보며 그 답을 찾으려 한다. 버스에서 내려 길을 건너면 음식점 뒤로 이성산성 안내판이 서 있다. 사적 422호로 지정되었는데 길이는 1925m, 넓이는 4만7200평이라 한다. 넓이에 비해 길이가 짧은 것은 산을 둘러싸 축성한 것이 아니라 지대가 낮은 골자기를 S자형으로 쌓은 포곡식(抱谷式) 산성이기 때문이다. 정약용 “백제 위례성은 하남시 일대다” 높이 4m는 되었을 온전한 성은 남아 있지 않다. 성의 흔적을 알 수 있는 성저(城底)부분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동문(東門)이 있었을 터에는 남아 있는 성을 근저로 해서 성벽을 복원해 놓았다. 그 곳에서는 한강과 하남이 손바닥처럼 보인다. 강 건너 넘어 올 적군을 언제라도 감시할 수 있는 위치이다. 동문의 안쪽으로는 높은 평탄지에 건물터가 나타난다. 8각형, 9각형, 12각형, 4각형 건물터가 여러 곳에 자리하고 있다. 4각형 건물들은 산성을 방위하는 이들의 생활공간이나 저장공간, 강당 등으로 여겨지고 8각, 9각, 12각 건물은 제천(祭天)이나 신앙과 관련된 건물로 여겨지고 있다. 어떤 이의 연구결과는 9각형은 천신(天神)에게 8각형은 지신(地神)에게 제사지내는 건물로 추측하고 있다. 음양오행 사상에서는 홀수를 양수(陽數), 짝수를 음수(陰數)로 구분하는데 9는 양수 중에서도 가장 높은 극양수(極陽數)이니 하늘이 되고, 8은 음수 중에서 가장 크니 땅을 상징하는 해석함도 합리성이 있다. 그런데 필자는 궁금증이 생긴다. 9각 건물을 어떻게 세웠을까 하는 점이다. 현대의 우리도 9각형을 그리라 하면 그릴 수가 없다. 구차하게 360도/9=40도 이렇게 계산하여 각도기로 40도씩을 나누어 그릴 수는 있겠지만 각도기가 없던 그 시절에는 어떻게 그렸을까? 1500년 전 그 시대 분들도 수학실력이 대단했던 것 같다. 그런데 기분 나쁜 일이 하나 있다. 일본 구마모또현 야마가시(熊本縣 山鹿市)에는 이성산성과 유사한 기꾸찌성(鞠智城)이 있는데 8각형 건물 고루(鼓樓)도 있고 2008년 11월에는 12cm쯤 되는 백제계의 청동보살상이 출토되어 백제계의 성임이 입증됐다. 660년 백제가 망한 후 백제를 살리기 위해 백촌강에 왔던 군대가 참패한 후 신라와 당군의 칩입에 대비해 세운 백제계 성(城) 중 하나이다. 일본인들은 이성산성이 기꾸찌성의 영향을 받은 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9각형은 천신, 8각형은 지신에게 제사 지내 건물터에서 내려다보면 저수지가 보인다. 이성산성에는 모두 3개의 저수지가 있다. 1986년부터 20년간 11차에 걸친 발굴기간 동안에 저수지에서는 많은 유물이 출토됐다. 옛터를 발굴한 보고서를 보면 우물이나 연못 저수지 등에서 역사의 키를 쥔 유물이 종종 나타나곤 한다. 많은 유물 중에는 부러진 채 발굴된 목간이 있다. 남은 글자에 손상이 심해 쉽게 읽히지 않는 목간(木簡)이지만 흥미를 일으키기엔 충분했다. 연구자들이 판독해 낸 글자를 소개하니 해독(解讀)에 도전해 보시기를. 전면: 戊辰年正月十二日朋南漢城道使(이하 缺失됨) 측면: 須城道使村主前南漢城○○○(이하 결실됨) 후면: ○○蒲○○○○○○(이하 결실됨) 이 목간의 무진년을 608년(신라 진평왕30년)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신라는 진흥왕의 활약으로 한강유역을 차지했는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 해(608년)에 고구려가 침략해 수 천 명이나 되는 사람을 포로로 잡아가는 참혹한 패배를 당했다. 이에 대한 복구작업을 명하는 기록이라는 연구결과가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이성산성 발굴결과에 기대가 산산이 부서진 것은 백제의 흔적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점이다. 고구려의 자(木尺), 고구려 길림성 집안(集安)오회분(五盔坟) 벽화에서 보이는 장구의 몸통(腰鼓)이 나와 고구려 계통의 유물은 확인됐으나 백제의 흔적은 없었다. 백제 고성(古城)으로 믿던 이성산성은 553년 진흥왕이 나제동맹을 배신하고 한강유역을 차지한 후 쌓은 한산성(漢山城)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아! 한성백제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성산 정상으로 오른다. 높이 208m이니 힘들 일은 없다. 이성산의 내력을 적어 놓았는데 백제의 두 왕자가 이 산에 살았기에 이성산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남한산성에서는 북쪽으로 뻗어나가는 두 산줄기가 있다. 그 한 줄기가 바로 이성산성으로 내려오는 산줄기이다. 연주봉옹성에서 시작한 산줄기가 북으로 달리면 금암산으로 이어지고 여기서 향교고개를 넘으면 이성산성이다. 김정호 선생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금암산을 설명하면서 청량산(남한산성 수어장대) 한 지류에 용호동이 있고, 금암산(金岩山) 한 지류에는 원덕산(元德山)이 있으며 또 이성산이 있는데 백제의 성터가 있다고 했다(有二聖山有百濟城址). 고산자 선생도 남한산성에서 금암산 거쳐 이성산성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와 그 역사를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한줄기는 동장대 옆 벌봉에서 시작해 객산(客山)을 거쳐 고려초 마애불로 유명한 선법사로 이어지는 산줄기이다. 이 두 산줄기 사이에 펼쳐진 들이 바로 춘궁동, 항동 지역으로 10여기(基)의 절터가 있다. 곳곳에 건물터 초석이 보여 옛부터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되어 오던 지역이다. 그러나 아직 결정적 유적은 발굴된 것이 없다. 이성산 정상에서 남쪽 금암산, 남한산성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하남시에서는 이 길을 위례둘레길 4코스로 이름 붙였다. 100여m 내려왔을까 남문지 방향 좌로 꺾이는 갈림길로 나아간다. 길옆에 별자리바위(거북바위)가 자리하고 있다. 자연석 위에 알구멍(性穴, cup mark)을 새겨놓은 것인데 주로 신석기 시대 고인돌이나 자연석 위에 홈구멍을 새겨 넣은 것이다. 이성산성의 알구멍은 구멍이 아직도 선명한데 삼태성(三台星)을 새겼다 한다. 신석기 시대 이 곳에 살던 이들이 이성산에 올라 별자리를 살피며 무엇인가 소원을 빌었던 것이다. 백제 두 왕자의 영혼이 서린 이성산 잠시 후 남문터에 도착한다. 저수지에서 내려오는 물길을 연 수로도 있고 샘도 있다. 남아 있는 성돌은 마치 옥수수알이 촘촘히 박혀 있는 듯하다. 이렇게 다듬은 돌들을 70여도 각도로 비스듬히 쌓았던 성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비스듬히 쌓아 무너지지 않으면서도 모서리를 둥글게 깎았으니 쉽게 오를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 지역을 차지한 신라가 고구려의 침공에 맞서 쌓은 그 경계심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남문터를 지나 내려오면 다시 출발했던 이성산성 입구로 돌아오게 된다.
길을 건너 100여m 서쪽(서울방향)으로 나아간다. 저수지쪽 안내판이 나타나는데 이름도 낯선 동사(桐寺)지를 가리키고 있다. 동사지는 저수지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서울외곽고속도로 굴다리를 지나면 나타난다. 어느 계절이고 동사지에 가면 삼층탑, 오층탑이 금암산에서 흘러내린 산줄기 아래 고즈넉이 서 있다. 안개 낀 새벽, 석양빛 고운 늦가을 저녁, 서설(瑞雪)이 발목까지 푹 빠지는 삼동(三冬), 언제고 두 석탑은 흩어진 마음을 바로 해 준다. 나의 길동무 어떤 이는 때때로 내게 동사지에 가자고 한다. 서울 가까운 곳에 이 두 석탑만큼 단아한 탑이 또 있을까? 동사가 언제 세워졌는지는 불확실하나 후기 신라말이나 고려초인데 출토된 기와에는 辛酉廣州桐寺, 興國三年라는 명문(銘文)이 새겨 있었다. 신유는 961년(고려 4대 光宗 12년)이며 흥국은 송나라 태종의 연호인 太平興國이 분명하므로 태평흥국삼년은 978년(고려 5대 景宗 3년)이다.
따라서 961~978년 사이에는 적어도 이곳 동사에서 불사(佛事)가 있었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기(태평2년 977년)에 2km여 떨어져 있는 (현재 이름) 선법사에서도 마애약사여래 중수가 이루어졌다. 또한 고개 너머에 있던 거대사찰 천왕사에서도 활발한 불교활동이 있었던 사실이 고려사 등의 기록에 전해진다. 이곳 춘궁동, 항공, 교산동 덕풍동 지역에는 고려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미루어 짐작할 만한 인물이 있다. 그 이름 왕규(王規: ? ~ 945년). 왕규는 이곳 광주(하남) 출신으로 그의 두 딸을 왕건의 15, 16번 째 왕비로 출가시켰다. 16번째 왕비가 된 딸 소광주원부인은 아들 광주원군(廣州院君)을 출산했고 왕규는 왕건의 최측근 신하가 되어 대광(大匡)의 벼슬을 제수받고 왕건을 보필했다. 왕건은 임종 시에 출신 성분이 미약한 태자를 보필할 것을 왕규, 박술희에게 당부하고 눈을 감았다. 이에 왕규는 태자(혜종)을 보필하고 자신의 딸을 혜종의 제2부인으로 출가시킴으로써 2대에 걸쳐 3딸을 왕후가 되게 했다.
고려라는 국가는 태생이 호족연합국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왕권을 강화하려는 궁예를 호족들이 연합해 제거하고 세운 나라가 고려였기에 애초부터 왕건과 호족들은 그들 딸을 매개로 피를 나누는 노력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왕건과 결혼한 호족의 딸들이 29명이나 됐다. 왕규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아마도 이 지역에 세워졌던 10여개의 절들은 호족세력 왕규의 지원을 받은 것은 아니었을까? 불행히도 왕규는 혜종이 급사한 후 반대세력에게 죽임을 당하고 고려사 열전에 역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상황을 비추어 보면 설득력은 없다.
하남 출신 왕규, 두 딸을 왕건 왕비로 출가 3층 석탑, 5층 석탑의 규모로 볼 때 대단한 세력의 지원 없이는 세워질 수 없는 규모와 완성도를 겸하고 있다. 3층 석탑은 보물 13호, 5층 석탑은 보물 12호로 지정됐는데 1966년 해체 수리할 때 3층탑에서는 금동불 1구, 동상 1구, 납석으로 만든 작은 탑 29기, 납석으로 만든 좌불상 1구 등이 발견됐다. 이제 탑이 서 있는 뒤편 언덕길로 오른다. 고개를 넘어가면 10여기의 절터가 있는 항동, 교산동 지역으로 가는 길이다. 그러나 오늘은 고갯마루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 금암산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500m 쯤 오르면 고갯길 덜미재에 닿는다. 예전 이곳 항동에서 감북동으로 넘어 다니던 민초들의 고갯길이었다.이 고개에서 좌측으로 길을 잡으면 금암산~ 남한산성에 이르고, 우측으로 길을 잡으면 이성산성 길이다. 우측으로 길을 잡는다. 능선길에서 옛무덤을 만난다. 적석분(積石墳)이다. 이미 도굴되었는지 돌로 쌓은 적석분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안내문에는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 사이 무덤이라 한다. 약 29기가 주변에 분포되어 있다고 한다. 잠시 후 좌측으로 광암동 갈림길을 만난다. 광암동(廣岩洞), 넓은 바위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인데 안내판 설명을 보니 이 지역에는 고인돌이 많아 평평하게 넓은 고인돌 뚜껑을 보고 광암이라 불렀기에 광암동이 됐다고 한다. 도로확장 공사를 하며 발견된 고인돌은 지금 하남시청 앞마당으로 이전됐다.
잠시 후 향여고개(향교고개)를 넘는다. 동물이동통로가 설치되어 있다. 좌측 50여m 아래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광암동사지(개두사지)가 보인다. 잠시 이성산을 향해 오르다 보면 우측으로 다시 동사지(桐寺址)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나타난다. 동사지 방향으로 내려가자. 잠시 후 아래에 비닐하우스처럼 보이는 3기의 플라스틱하우스가 있다. 2001년 광암동에서 이곳 이성산성 앞을 지나 덕풍동으로 이어지는 길을 4차선화하는 공사가 시작됐다. 그런데 공사 구간에서는 고인돌을 비롯해 백제횡혈식석실묘 (橫穴式石室墓)와 신라의 적석분이 여럿 출토되니 공사는 여러 번 중단되었다. 그래서 언덕 위로 이전해 복원한 고분에 강화풀라스틱으로 보호막을 만든 것이다. 복원된 것은 2기의 백제묘, 1기의 신라묘이다. 이 지역은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백제의 횡혈식석실묘, 신라 적석묘가 자리한 지역으로 무덤형식을 골고루 볼 수 있는 박물관이다. 백제를 찾아 온 답사길에 백제는 없다. 언젠가 더 깊이 묻혀 있을 흔적이 나타날 것인가? 현재까지 나타난 결과는 풍납토성이 가장 풍부한 유물, 유적을 드러냈다. 잊혀진 위례성을 좀 더 기다려 봐야겠다. 성(城), 절터, 탑, 무덤으로 이루어진 답사길을 마무리한다. 복원한 묘역 바로 아래는 서울로 가는 버스길이다. 이곳 묘들이 본래 자리했던 그 자리가 이제는 길이 되었다. 우리의 편리함을 위해서 죽은 자들의 영혼도 이사를 했다. -이한성 동국대 교수
교통편 1) 잠실역 7번 출구 / 올림픽공원역 1번 출구 30-5 버스 ~ 이성산성 입구 하차 2) 둔촌역 1번 출구 1번 버스 ~ 이성산성 입구 하차 걷기 코스 이성산성 입구 ~ 이성산성(동문터, 건물터, 저수지, 남문터, 별자리 바위) ~ 동사지 ~ 금암산 능선(적석묘) ~ 향여고개 ~ 광암동 석실고분군(복원한 석실분 3기)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