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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주의 세계문화유산 종묘스토리 ①] 왕이 사는 세 곳

영혼불멸 600년 국가 사당, 완벽미에 세계 건축계 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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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16-317호 박현준⁄ 2013.03.12 08:58:27

임금이 사는 곳은 세 곳이다. 살아서는 왕궁에서 생활하고, 사후에 몸은 왕릉으로 간다. 또 혼은 종묘에서 안식을 취한다. 임금 재위 기간은 길어야 수십 년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후의 삶은 종묘에서 오랜 기간 계속된다. 조선의 초창기 군주는 벌써 600년 이상이나 종묘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다. 망국이 된 조선의 궁궐에는 임금이 없다. 경복궁 덕수궁 등 지금의 왕궁은 박제된 역사라고 할 수도 있다. 궁궐에서 생활하는 임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묘에는 임금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 또 예전과 같이 제사 의식이 진행되고 있다. 임금이 살아서 생활한 왕궁은 죽은 공간이고, 임금이 죽어서 가는 종묘는 산 공간이 되었다는 역설이 가능하다. 종묘가 세계문화유산이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산 역사가 진행된다는 점이다. 지구촌 옛 왕국의 신전 중에서 유일하게 전통대로 제사의식이 진행된다. 세계 신전 중 유일하게 전통의식 진행 종묘는 세계 4개국에 있다. 한국 중국 일본 베트남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종묘만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그 이유는 종묘의 기능수행, 독특한 제도, 건축물의 우수성 덕분이다. 먼저, 우리의 종묘만이 앞선 왕조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 공산주의 사회인 중국과 베트남은 전 왕조에 대한 제사가 단절됐다. 일본은 정통 종묘제도가 아닌 변형제도다. 종묘는 제사 지내는 곳이고, 제사 지내는 곳은 사당이다. 임금의 개인 사당을 넘어 국가의 사당이다. 사당은 제사를 지내야 의미가 있다. 건축물은 내용을 담은 그릇이다. 사당건축물은 제사를 지낼 때 의미가 있다. 한국은 조선시대처럼 다섯 차례의 대사와 중, 소사를 하지 않지만 1년에 두 번 제향을 지낸다. 5월 첫째 주 일요일에는 문화재청이 주관한다. 세계인에게 우리의 문화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따라서 내빈 인사 등 번거로운 절차가 따른다. 전통제례에서 벗어난다는 비판도 있었다. 이에 2012년부터는 11월 첫째 일요일에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 주관을 해 옛 방식에 보다 근접한 제례를 봉행하고 있다.

다음, 한국만의 독특한 종묘제도다. 조선은 독특한 불천위제도를 하고 있다. 세실제도라고 하는데 원래 4대가 지나면 인연관계가 끝난 것으로 보아 신주를 땅에 묻는다. 그러나 4대가 지나도 땅에 묻지 않고 신주를 정성껏 모신다. 영원히 제사 지내는 불천위 제도다. 또 종묘에서 떠난 임금의 신주는 영녕전에 모신다. 이 같은 불천위 제도는 조선만의 특별함이다. 마지막으로 건축물의 우수성이다. 사당 건축물로 세계에서 가장 긴 종묘는 세 번에 걸쳐 지었다는 게 믿겨지지 않을 만큼 이음새가 매끄럽다. 세계문화 유산 등재 심사를 위해 온 조사관들이 한결같이 놀랐을 정도다. 이 같은 우수성은 '정전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정전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탔는데, 광해군 때 11칸, 영조 때 4칸, 현종 때 4칸을 더 지었다. 정전의 기둥은 20개로 안정감을 주고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엔타시스 공법으로 만들어졌다. 용마루는 일직선 그 자체일 뿐만 아니라 기왓골 역시 용마루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듯하다. 처음 본 이는 한 번에 지은 것으로 생각할 만큼 완벽한 미를 자랑한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조선왕조의 사당인 종묘에는 당시의 이데올로기와 역사가 숨어있다. 역대 국왕과 왕후에게 제사를 지냄으로써 유교의 핵심 원리인 효와 충을 실천했다. 또 백성에게 유교적 가치관을 전파하면서 통치권을 강화했다. 이를 위한 건축, 제례, 제례악은 세계적 수준의 예술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정치적 파장에 의해 종묘는 영향을 받았다. 조선의 임금은 27명인데 2명의 군주는 종묘에 모셔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종묘에 부묘된 군주는 모두 35명이다. 추존된 왕이 있기 때문이다. 또 공덕에 따라 정전에 계속 머문 임금도 있고, 별묘인 영녕전으로 옮겨진 경우도 있다. 단종, 현덕왕후, 단경왕후 등은 사후 수백 년 후에 부묘되었다. 정치 역학관계 때문이었다. 종묘는 조선의 역사와 문화, 정신이 아우러져 있다. 임금도 걷지 못하는 길(신향로) 조성 임금은 무소불위의 권력자다. 그러나 종묘에는 임금도 가지 못하는 길이 있다. 조선에는 왕토사상(王土思想)이 있었다. 시경(詩經)에 '천하의 토지는 왕의 것이 아닌 것이 없고, 천하의 신하는 왕의 신하가 아닌 것이 없다'는 구절이 나온다. 바로 왕토사상이다. 절대왕권의 조선이나 중국에는 이 천하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만큼 왕은 신성불가침한 존재다.

하지만 임금의 조상신을 모신 종묘에서 왕은 경건히 제사를 올리는 헌관에 지나지 않았다. 종묘는 신을 모시는 공간으로, 신을 위한 장소다. 그래서 정밀하고 경외감이 우러나는 공간으로 건축된 정전과 영녕전 건물의 담 안에는 나무와 화초를 심지 않았다. 주변에 특정 나무로 울창한 숲을 조성해 하늘의 기운이 충만하도록 했으나 시선이 밖으로 트이지 않아 경건함이 더하도록 했다. 또 모든 건축물은 화려함을 멀리하고 단순함과 절제미로 신궁임을 알렸다. 신이 된 왕과 왕비의 신위가 있는 감실(신주를 모셔두는 장)까지 제를 올리는 임금 등 제관은 여러 겹의 통로와 영역을 지나는 통과 의례를 거친다. 이 때 더 빨리 걷는 것과 돌아가는 것이 금지됐다. 이를 위해 제사 지내는 제관이 다니는 길 등을 조성했다. 길은 세 길이 있다. 중앙이 귀신의 길이고, 좌우는 왕과 세자의 길이다. 가운데는 오로지 신(神)만을 위한 길이어서 신향로(神香路)로라 하고, 동쪽의 길은 왕을 위한 어로(御路), 서쪽의 길은 세자가 걷는 세자로(世子路)다. 신향로는 신주를 종묘에 모시거나 제사를 위해, 향(香), 축(祝), 폐(幣)를 들여 올 때에 이 길을 이용한다. 신이 다니는 곳이 아닌 신을 위해 제사를 지내기 위한 사람이 다니는 곳이다. 임금도 신향로는 다닐 수 없다. 신을 위한 길은 옆의 길보다 높게 했다. 정전 앞의 월대(月臺)에서는 가운데에 검은색 돌로 품위를 높인 길을 만들었다. 정전을 양분하는 이 길도 신이 된 왕과 왕비의 위패만 다닐 수 있는 신로(神路)다. 세 길은 엷고 넓적한 돌인 박석을 깔아 느리게 걷도록 신경을 썼다. 이에 비해 경복궁의 세 길은 중앙이 왕을 위한 어로이고 좌우가 문무관의 길이다. 경복궁의 주인이 살아있는 왕이라면, 종묘의 주인은 바로 돌아가신 왕, 조상신들이기 때문이다. - 글·이상주 역사작가 글쓴이 이상주 조선왕실(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전례위원으로 종묘대제, 사직대제, 왕릉제향 전승자다. 세종대왕밀성군종회 학술이사, 이상주글쓰기연구소(www.이상주글쓰기연구소.kr) 대표다. 지은 책으로는 ‘왕의 영혼, 조선의 비밀을 말하다’, ‘조선 명문가 독서교육법’, ‘공부열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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