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사를 사용하는 것은 금이나 은과 같은 재료에 비해 비싸지 않고, 튼튼한 것 같습니다. 구하기 쉽고, 더욱이 영원한 것이 아니죠. 시간이 지나 녹이 슬어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꼭 인간의 생명과 같은 자연스러움에 끌렸습니다." 세계적인 조각가 존 배(75)가 3월 28일부터 4월 25일까지 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현대에 7년 만에 한국에서 개인전을 마련하며, 자신이 가지고 작업을 하고 있는 재료에 대한 감상의 변이다. 전시장에 펼쳐놓은 존 배의 작업은 사각형의 철사형태가 하나의 조화를 이루듯 긴장과 규칙을 보이며 빛에 방향에 따라 다양한 이미지로 눈에 비추어진다. 개개의 철사 하나 하나를 용접에서 마무리까지 전 과정을 오직 작가의 손을 통해서만 만들어내는 장인의 노고가 깃들어 있다.
존 배 작가는 자신의 작업 과정을 재즈 음악가가 즉흥 연주를 하는 것에 비유한다. 즉흥 연주는 연주가 누군가에 따라 곡이 달라지고 어떻게 끝이 날지 모르듯 존 배의 조각도 매 순간 작가의 우연한 선택에 의해 형태가 결정되고 탄생한다. 75세에 이르는 현재까지도 재료 선택부터 용접, 마무리까지 전 과정을 홀로 해내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언제 어느 지점에서 끝이 날지 짐작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이러한 '길 잃기'를 즐긴다고 한다. 때문에 작품 1개를 완성하는데 2-3년의 오랜 기간이 걸리기도 한다. 우연과 선택으로 만들어지는 작업 과정은 동양 철학의 선문답과 같은 작품의 제목에서도 그대로 반영된다. 반원형 곡선을 끝없이 결합한 구조의 작품 '의도치 않은 결과'는 몇 달간의 용접 작업 중에 작품이 얼마나 커질지에 대한 감을 잃었다고 말한다. "작가로서 직접 작업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과물 자체보다 내가 직접 작업을 하는 그 과정들이 더 중요하다고 느껴요. 작가 자신의 끝없는 의식과 무의식적 결정과 선택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과정이거든요. 작업 안에서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하느냐가 그 작가를 정의한다고 생각합니다." 율동적이고 부드러운 작품을 만드는 소재가 차가운 철사의 '선(Line)'이 좋아서라고 말하는 작가는 만났다가 헤어지고 다시 만나기를 반복하는, 불교의 윤회 사상을 연상케 하는 선의 속성을 좋아한다.
전시에 선보인 '영원한 순간'과 '원자의 갈비뼈'와 같은 작품은 무수한 선들이 무작위로 휘어져 형성된 기형적 육면체를 만들었다. 2008년에서 2011년까지 작가가 선보였던 정육면체를 변형한 작품의 연장선상에 있다. 반면, '철 무지개', '믿음의 도약', '모서리에서부터' 같은 작업은 직선적 형태를 바탕으로 육면체를 만들었다. 곡선들을 합쳐 만든 '기억의 은신처'나 '선택, 선택'과 같은 작품과도 다른 매력을 보인다. 한국에서 7년만의 개인전 '기억의 은신처'展 은 75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의 예술적 절정에 이른 신작 20여점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존 배 작가의 대해 "해답을 찾아 성지를 순례하는 순례자"라고 표현한 한 평론가의 말처럼 끊임없이 새로운 작업 세계를 개척하는 작가의 뜨거운 열정을 작품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자리로 여겨진다. 02-2287-3500 왕진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