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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구의 한국 재벌사]동국제강그룹 편 1화

자수성가 창업자 장경호, 가마니 팔다 철강에 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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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26호 박현준⁄ 2013.05.13 15:08:47

창업주 장경호(張敬浩, 1899~1975)는 부산 동래에서 장윤식(張允植)의 4남 중 3남으로 태어나 14세 되던 해에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해 19세에 졸업했다. 모친의 영향으로 불심(佛心)이 깊었던 그는 졸업 직후인 1919년 3.1운동에 가담했다가 일본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일본으로 도피, 그곳에서 학업을 계속했으나 중도에 포기하고 귀국했다. 이후 형과 함께 행상을 하며 만주, 일본 등지에서 수입한 쌀과 잡곡 등을 판매하면서 사업경험을 축적했다. 27세 되던 해부터 새로 가마니장사를 시작했는데, 이른 봄과 여름에 시골 곳곳을 돌아다니며 헌 가마니를 수집했다가 성수기인 가을에 내다 파는 식이었다. 당시 일제는 일본공업화에 필요한 식량자원을 한국에서 조달하기 위해 산미증식계획(1920∼1934)을 획책했다. 그 결과 국내산 쌀의 일본수출이 격증하면서 부산항 인근의 가마니수요가 점증하였던 때문이다. 1929년 부산의 대표적 다운타운인 초량동 중앙시장 내에 가마니 도매상인 대궁상회(大弓商會)를 열고 정미소를 운영하는 한편, 마닐라로프, 마대 등으로 사업영역을 넓혀나갔다. 국내 최대의 부산항에는 전국적으로 가장 많은 선박들이 운집했던 탓에 수송관련 물품의 수요가 상대적으로 많았던 것이다. 1935년에는 부산 광복동에 남선물산(南鮮物産)을 설립해 가마니를 직접 제조했다. 가마니 소매에서 도매로, 가마니 제조에 이르기까지 수직계열화를 통한 사업규모 확대 및 경쟁력 제고를 도모한 것이다. 또한 조명용인 석유등잔의 수요가 점증하면서 양철로 석유통을 만드는 제조업까지 병행함으로써 남선물산은 번창했다. 전기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시절에 등잔과 호롱이 가정용 조명의 대종을 점했던 것이다. 이 무렵 그는 철물점과 창고업, 수산물 도매업도 겸영(兼營)하고 있었다.

1945년 해방 후 재일동포가 하던 신선기(伸線機, wire drawing machine)를 인수해서 1949년에 조선선재(朝鮮線材)를 설립하고 철못, 철선(철사줄) 등의 생산에 착수했다. 인발기(引拔機)로 별칭되는 신선기는 철선이나 철판 따위를 당겨 뽑는 기계다. 가마니장사에서 철물장사로 완전 탈바꿈했는데 건설수요가 꾸준해 호황을 누렸다. 원료는 고철이나 파철(破鐵) 혹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철조망 등을 수거해 조달했다. 철(鐵)과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한국전쟁 특수 힘입어 사업 기반 토대 마련 조선선재 경영이 안정권에 진입할 무렵인 1950년 6월 25일에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부산은 전국에서 몰려온 피난민들로 만원이었다. 주택난에서 비롯된 건설시장이 크게 형성되면서 철못과 철사 수요가 급증한 터에, 원료인 고철은 전쟁으로 확보가 매우 용이해 사업은 ‘땅 짚고 헤엄치기’ 식이었다. 당시 전국 대부분의 산업시설들이 전쟁으로 파괴되거나 혹은 원료조달 곤란으로 정상가동이 어려웠다. 하지만 조선선재는 부산을 무대로 사업을 전개한 때문에 한국전쟁의 피해를 전혀 입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전쟁특수로 급성장할 수 있었다. 전쟁특수로 부를 축적한 장경호는 1954년 7월 부산 초량에서 고철을 전기로(電氣爐)에서 용해시켜 선철(銑鐵)을 생산하는 자본금 100만 환의 동국제강을 설립했다. 경영난에 직면한 한국특수제강(주)을 인수해서 설립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종업원 30~40명을 거느린 소규모 공장이었다. 고철 등을 용광로에서 용해해서 선철을 생산, 제강한 후 조선선재를 비롯한 전국의 선재공장에 원료로 공급하기 위함이었다. 장경호는 종전의 가마니사업처럼 철물점(남선물산)→선재 생산(조선선재)→제강(동국제강) 순으로 점차 사업영역을 넓히는 등의 수직계열화를 통해 경쟁력을 키워나갔던 것이다.

동국제강은 비록 규모는 작았으나 성장세는 놀라웠다. 장경호는 조선선재와 동국제강의 경영을 통해 축적한 자금으로 1950년대 말 정부의 시중은행 주식불하에 참여해 서울은행(하나은행 전신) 대주주로 변신했다. 당시 시중은행 불하에는 이병철(삼성), 이정림(대한유화), 정재호(삼호방직) 등 스타 기업가들이 참여했는데, 무명의 지방 기업가인 장경호가 이 대열에 참여한 것이다. 장경호의 사업은 당초 상업자본에서 산업자본으로, 그리고 금융자본으로 점차 업그레이드됐다. 한편 동국제강의 2세 경영도 이 무렵부터 개시됐다. 장경호는 슬하에 상준·상문·상태·상철·상건·상돈 등 6남 5녀를 두었는데, 3남인 장상태(1927~2000)가 1956년 3월에 동국제강 전무로 부임한 것이다. 그는 부산에서 출생하여 1950년에 서울대 농대를 졸업한 후, 농림부 국비유학생으로 미국에 유학해서 미시간주립대 대학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동국제강에 입사했다. 철강산업에 집중…2세도 그룹 경영에 참여 1957년에는 압연공장을 건설했고, 1959년 6월에는 동일제강을 설립해서 국내 최초로 선재(wire rod)를 생산했으며, 1960년 6월에는 철근압연기 및 신선기를 증설해서 1961년부터 철근생산 개시 및 철조망공장도 신설했다. 또한 1960년 4월에는 대성기업을 인수해서 같은 해 10월에 하역 및 운송전문업체인 천양항운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중량물의 자사제품을 운반하기 위함이었다. 장경호는 철과의 인연을 맺은 지 10년 만에 제선·제강·압연·수송사업까지 일관생산체제를 지향해서 장차 철강전문 기업집단으로 도약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했다.

제철소는 철광석에서 철을 뽑아내어 강판과 강관 등의 철재를 생산하는 곳으로, 선강일관공장과 독립제강공장으로 구분된다. 모든 철제품은 고로(高爐)에서 철광석을 녹여 쇳물(선철)을 뽑아내 제강로에서 정련해 강괴(鋼塊)로 만든 후 다시 압연가공공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고로 등에서 선철을 만드는 공정을 제선(製銑)이라 하고, 제강로에서 쇠의 물성을 견고하게 하는 과정을 제강(製鋼)이라 한다. 또한 강괴(鋼塊)를 회전하는 2개의 롤 사이로 통과시켜 판(板)·봉(棒)·관(管)·형재(形材) 등으로 가공하는 공정을 압연(壓延, rolling)이라 하는데, 제선·제강·압연에 이르는 전 공정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공장을 선강일관공장이라 한다. 포스코의 포항제철소와 광양제철소가 대표적이다. 독립제강공장이란 고철·환원철·선철 등을 원료로 해서 전기로 혹은 평로에서 제강한 다음에 압연가공해서 강재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동국제강, 한국철강, 인천제철 등이 대표적이다. 강괴를 원료로 해서 못이나 철선 등 최종 생산물을 생산하는 조선선재 같은 중소 철강공장은 단독압연공장이다. 고로제철법은 철을 만드는 전통적이며 진정한 제철법이나, 원료인 철광석이나 코크스용 석탄 채굴과정에서 불가피하게 환경이 파괴된다. 또한 코크스 생산 및 제선과정에서는 엄청난 CO2도 발생된다. 국내에서 CO2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단일사업장을 꼽는다면 단연 포스코의 포항제철소와 광양제철소다. 그러나 전기로제철의 경우 전기를 이용해 고철을 녹여서 철강제품을 만들기 때문에 자연파괴가 야기되지 않음은 물론 제선과정에서 발생하는 CO2도 고로제철법에 비해 30%에 정도에 불과해 훨씬 환경 친화적이며 자원 순환적이다. 대신에 전기를 많이 사용하고 고로제철에 비해 생산규모도 작은 약점이 있으나 훨씬 기술집약적인 산업이다. 철강에 이은 자동차 사업…재무구조 악화로 위기 전기로업체인 동국제강은 1961년에 철강과 기계메이커인 부산제강소(동국중기)를 설립하고, 1963년 부산 앞바다 20만여 평을 매립해서 대규모의 부산제강소 압연공장을 건설했다. 또한 1965년에는 민간기업 최초인 50톤 규모의 고로(高爐)를 준공해 한국 최초로 용광로시대를 개막했다. 같은 해 6월에는 도금공장 생산개시 및 월남에 대한 철제품 수출에 착수했으며, 7월에는 15톤급 소결(燒結)공장도 준공했다. 소결이란 선철을 석회석 등과 반응시켜 광재(slag) 제거와 탄소함유량을 최소화해 강(鋼)으로 만드는 공정을 의미한다.

1966년 10월에는 국내 최초로 15톤급 전기로 제강공장을 준공하고, 1967년에는 산업기계부품 메이커인 부산주공(釜山鑄工)을, 1968년에는 그룹의 무역창구인 대원사(현 동국산업)를 각각 설립했다. 대원(大圓)이란 창업자 장경호의 아호였다. 1969년에는 철골 시공업체인 동남건설(동국건설)을 설립하는 한편, 아세아자동차를 인수해 자동차산업에도 진출했다. 이문환(李文煥)은 1965년 7월 2일에 전남 광주공업단지에서 아세아자동차를 설립하고, 1966년 12월에 공장건설을 시작해서 외자 1250만 달러와 현금차관 225만 달러, 내자 8억 원을 들여 1968년 12월에 대지 30만여 평에 연산 8000대 규모의 광주공장을 준공했다. 이탈리아의 FIAT와 프랑스의 SER사와 제휴해서 승용차와 버스를 생산할 예정이었다. 공장을 준공한지 1년도 못돼 재무구조가 악화되는 바람에 부실기업체로 지정돼 1969년 12월에 경영권이 동국제강으로 넘어갔던 것이다. 아세아자동차는 1970년 1월부터 국산화율 30%의 승용차 ‘FIAT124’(1200CC)와 고속버스 및 일반버스를 생산했는데, ‘FIAT124’는 뛰어난 내구성과 경제성으로 당시 신진자동차의 ‘코로나’, 현대자동차의 ‘코티나’와 치열하게 경쟁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1973년에 ‘FIAT124’ 생산계약이 중단되면서 다시 경영위기를 맞아 은행관리 하에 있다가 1976년에 기아자동차에 재인수됐다. 한편 1971년에는 부산신철(현 한국특수형강)을 설립하고, 1972년에는 한국철강과 한국강업(현 동국제강 인천제강소)를 인수했다. 한국철강은 신영술이 1957년 2월 19일 경남 마산에서 설립한 국내 최초의 현대식 철강공장으로, 1965년 3월 부천 제2공장을 준공하고, 같은 해 7월부터 제강공장과 강판공장을 가동했다. 또한 1967년 4월 마산공장을 준공하고 1·2 압연공장을 증설하였으나, 1971년 부도로 좌초돼 1972년 2월 동국제강(주)에 인수되었던 것이다. - 이한구 수원대학교 경제금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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